어릴 적 주말 아침은 아버지의 기상 외침으로 시작되었다. 유일하게 쉬는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자식들을 친히 깨우는 아버지는 집안 구석구석 청소하라며 자신의 군대 시절 청소방법을 잠에 취한 우리에게 떠들어댔다. 검지에 침을 탁! 뱉어 책장에 닦았을 때 먼지 한 톨 붙어 나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귓가에 박혀 있다. 아버지는 군대에서 살아남은 방식의 일부를 자식들에게도 끊임없이 전수한 것이다.
어머니는 남들 다 자는 시간이 훌쩍 넘어 수면제 몇 알을 털어 넣어도 잠들지 못했다. 수면제에 반쯤 넋이 나간 엄마의 모습을 새벽녘에 보노라면 그 모습이 애처롭다가도 어머니의 몸이 어찌 될까 하는 불안감에 화가 솟구치곤 했다. 어린 시절 이집 저집 밥 빌어먹으며, 젊어서는 사는 일에 치여, 결혼 후에는 서방과 시댁들의 난리에 편히 눈 붙이지 못한 엄마의 삶을 그대로 느끼며 자란 나 역시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청하지 못한 깊은 잠을 자는 일은 죄를 짓는 기분이다. 왜 잠을 자지 않느냐는 말에 죽으면 평생 잘 것을 뭐 하러 자냐는 말로 되받아 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뱉은 말의 속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건 바로 나태함과 잠을 동일시 한 불안함이며, 녹록지 않은 현실에 잠을 택함은 죽음으로 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두 눈을 뜨고 무언가를 할 때 쓸모 있는 인간으로 인정받았고, 눈을 감는 순간 아무 쓰잘머리 없는 존재가 되는 모습을 죽음과 동일시 한 것이다. 나는 잠이 아닌 죽음을 지독히 두려워 한 것이다.
평생을 늘어지게 잔 적도 없지만, 깨어있다 해서 뭔가를 제대로 해보지도 않은 나는 마흔을 훌쩍 넘어서야 내 할 일에 몰두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며 그간 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느라 잠자는 시간은 더욱더 아깝게 느껴졌다. 몇 날 며칠을 날밤 새듯 보내기도 했고, 그 사이사이 몸살이나 드러눕기도 했다. 그런 시간이 쌓여 지금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잠을 청하지도, 주어진 시간에 잠들지도 못하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잠이 곧 죽음이라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공식을 스스로 주입했던 불안함을 무장한 삶에서 이젠 벗어나야 할 때이다.
잠은 나태함이 아니다.
잠은 죽음이 아니다.
잠은 뒤엉킨 삶을 정리하는 평온의 상징이다.
그러니 이제 깊게 잠들기를
더 이상 죽음에 주눅 들지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