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아이가 엄마 손에 이끌려 화실 문 앞에 멈춰 섰다.
한참을 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자리에 앉았다.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했다.
체험 수업을 오는 아이들에게 나는 먼저 나무를 그려보자고 한다.
사람을 그리는 건 너무 많은 정보를 요구한다.
첫 만남에서 사람을 그리게 하는 건,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무거운 과제다.
대신, 누구나 본 적 있는 나무.
작은 종이를 건네며 말한다.
편하게,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보자고.
나는 대학원에서 미술치료를 전공했다.
그래서 나무 그림을 보면 아이의 감정이나 상태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작업을 통해 아이와 대화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건 뭐야?” 대신, “이 나무는 어떤 나무야?”
아이가 직접 그린 나무를 매개 삼으면 경계는 조금 더 쉽게 풀린다.
그 아이도 그랬다.
처음엔 건네는 말에 시큰둥했지만, 점점 집중하며 붓질을 시작했다.
신중하게 색을 고르고, 명암을 넣는 손놀림에 배운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얼마 전, 다니던 화실을 그만뒀다고 했다.
수채화를 집중적으로 배웠지만, 그림을 못 그리면 선생님이 화를 냈다고 했다.
때로는 때리거나, 꼬집기도 했다고.
듣는 내가 더 화가 났다.
붓을 쥐는 순간마다 공포가 따라붙었을 것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아직 아이에게 손을 대는 교사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렇게까지 해서 수채화를 잘 그리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림은,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시간이 아니다.
감정을 표현하고, 마음을 다독이는 일이다.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기는 힘을 키우는 시간이다.
그 힘이 아이의 삶을 조금 더 단단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미술이 싫어진 아이.
조금 더 잘 그리는 아이를 만들고 싶은 어른들의 욕심.
그 사이에서 나는 다시 묻는다.
우리는 왜 그림을 가르치는가.
내가 만들고 싶은 수업은,
조금은 서툴러도 괜찮은 수업이다.
기술보다 이야기,
정확함보다 마음이 먼저 오는 수업이다.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자기 손으로 그려낼 수 있는 시간.
나는 그런 그림 수업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