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연탄

by 수미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거리는 꽃으로 가득하다. 여린 분홍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간질거린다. 시폰 원피스를 꺼내 입어볼까 하다가도 아침저녁으로 스며드는 찬 기운에 다시 옷장으로 넣어둔다.


봄이 왔다지만, 겨울 끝자락은 아직 남아 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방바닥이 너무 차서 어쩔 수 없이 보일러를 잠깐씩 켰다. 아이를 재우다 같이 잠든 날이면 뜨끈한 방바닥 온도에 화들짝 놀라 보일러를 껐다. 어떤 날은 눅눅해진 공기를 뽀송하게 만들려 보일러 스위치를 살짝 켰다 끊다. 집안에 감도는 따스함이 좋다가도 이번 달 가스 요금이 떠올라 걱정이 쌓이기도 한다.


출근 준비를 마친 남편이 마스크를 챙기며 말한다.

“연탄재가 눈까지 따갑게 해.”

그 말에 멈칫했다.

남편말에 지금도 연탄을 떼는 곳이 있다니라 여기다 나의 꼬꼬마적 기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동네 구석구석엔 연탄가게가 있었다. 검정 집게로 연탄 두 장씩 들어 벽면에 차곡차곡 쌓던 연탄집 아저씨. 활활 타는 연탄불 아끼려 “불구멍 꼭 막아라” 하시던 엄마의 목소리. 연탄보일러 통어 물이 말라 물통이 그르렁 거리면 빨리 물 부으라며 호들갑이던 엄마 잔소리까지.

봄이 와도 여름이 와도 낙엽이 떨어져도 우리 집 한편엔 연탄이 있었다.

검게 그을린 구멍 사이로 피어오르던 붉은 온기. 그것이 우리 가족의 따뜻함이었다.


어느 날, 반 친구 중에서도 제일 부잣집이던 병원 원장 딸네 집에 놀러 갔다. 내가 한번 먹어보지 못한 꼬부랑 글이 써진 간식과, 눈이 크고 머리가 금발인 바비 인형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드디어 그 집에 놀러 갈 수 있다는 게 어찌나 들뜨던지. 하지만 집 나서기 전, 엄마가 연탄불 구멍 꼭 막고 나가라고 했던 말이 그 집에 도착해서야 떠올랐다. 공장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허옇게 식어버린 연탄을 보고 날 혼낼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 편히 놀고 있을 수만 없었다.

연탄불 구멍 막으러 잠깐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그 집 엄마가 물었다.

“너희 집은 아직도 연탄 쓰니?”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따뜻함보다는 차가움과 하찮음에 가까웠다.

갑자기 따뜻한 온기를 주던 우리 집 연탄이 부끄럽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연탄은 우리가 가진 최소한의 안락함이었고, 엄마의 손길이었고, 아빠의 수고였고, 나의 유년이었다.


남편을 배웅하고 돌아와 다시 침대에 눕는다.

새벽 공기는 아직 차갑지만, 기억 속 연탄은 언제나 따뜻하다.

눈을 감고 그 시절의 소리를 떠올려본다. 연탄을 쌓던 소리, 엄마의 말, 연탄 타는 냄새.

그 모든 것이 마음 깊은 곳을 스멀스멀 데워온다.


누군가에겐 봄날의 추억일 수도,

누군가에겐 지금도 몸을 녹이는 현실일 수도,

또 누군가에겐 그저 매캐한 쓰레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연탄은

겨울을 견디게 해 준 온기이고,

계절을 잇는 기억이고,

사랑의 모양이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과 의미를 품은

봄날의 연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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