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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환쟁이

by 수미

어린 시절 나는 화가 나면 종이에 색연필을 휘갈겼다. 글을 아는 나이가 되면서 분노의 선들은 글씨가 되었고, 그 글씨는 어느새 감정의 그림이 되었다. 학교는 그것을 ‘그림일기’라 불렀다. 나에게 그림일기는 꼭 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놀이였다. 내 마음 담은 하잘것 없는 짧은 기록 하나에도 선생님의 칭찬이 따라왔고, 칭찬은 나를 또다시 연필과 그림 앞으로 불러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내 글과 그림은 사라지고 남의 글이 내 앞을 채웠다. 암기와 해석이 점수로 환산되던 시절, 내 글은 시험지 밖에서 낙서였다. 미술 시간조차 입시라는 이름 앞에서 자습이란 이름으로 사라져 갔고, 학교는 더 이상 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대학에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잠시 숨을 돌렸다. 하루에도 몇 통씩 오가던 손 편지는 내 존재를 드러내는 증표였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결혼, 아이, 살림이 쌓이자 글은 점점 자취를 감췄다. 책 한 권 펼칠 겨를조차 감지덕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을 멈춰 세운 코로나가 찾아왔다. 더구나 나는 타국, 베트남에서 그 시간을 맞았다. 문밖을 나설 수 없는 긴 고립은 처음 며칠은 달콤했지만 곧 공허로 변했다. 나는 오래 미뤄 두었던 글을 꺼냈다. 그리고 그 순간, 엄마의 시한부 소식이 날아왔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확진자 수가 늘어나는 뉴스 앞에서 나는 망설였다. 생활의 터전인 이곳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마침내 비행기를 탔을 때, 엄마는 이미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중환자실의 문은 코로나라는 이유로 닫혀 있었고, 나는 서늘한 규칙 앞에서 엄마를 만날 수 없었다. 임종만이 유일한 만남의 순간이었다.

나는 글을 썼다.

엄마의 목소리를 붙잡기 위해, 사라져 가는 이야기를 잃지 않기 위해. 전화기 너머로 흘려들었던 유년의 기억들을 적으며 종이 위에 엄마를 기록했다. 글은 엄마를 불러오는 주문이자, 무너지는 나를 세우는 기둥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무심히 쌓아 두던 내 글을 읽고 누군가는 공감하고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브런치를 알게 되었다. 내 글을 기록할 자리를 찾고 싶었고, 세상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나는 일곱 번이나 도전했다. 낙방의 부끄러움은 깊었지만 그때마다 내 글을 돌아봤다. ‘이 정도면 될까? 아직 부족한 건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는 동안 깨달았다. 글은 끄적임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 약간의 낯부끄러움이 있었지만, 더 이상 혼자만의 끄적임에 머물 수 없음을 느꼈다. 독자와 만나는 사람,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 글로 세상을 잇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이 들었다.

지금도 나는 에세이를 차곡차곡 쌓아 가고 있다. 당장의 수익도, 명예도 없다. 하지만 글을 통해 나는 내 안의 깊은 어둠을 들여다보고,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게 되었다. 브런치는 내 글에 첫 독자를 선물해 주며, 혼자 쓰던 문장이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고,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낸다. 글은 혼자 쓰지만,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브런치는 내게 작가라는 꿈을 생활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글 속에서 엄마를 만나고, 나를 만나고, 당신을 만난다. 이 길이 어디로 닿을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글 쓰는 환쟁이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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