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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글 뽀글 미용실

by 수미

긴 생머리를 한 번쯤 해보겠다 마음먹은 적 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어깨선만 넘으면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린다. 결국 몇 번을 시도해도 기를 수 없었다.

흰머리가 검은머리보다 많아지는 나이가 되고서야,
‘백발이 되기 전엔 꼭 길러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하여 인내심을 다잡고 기르고 있었는데,
또 이놈의 ‘컷트병’이 도지는 바람에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때 주변에서 말한다.
“파마해. 여름엔 그게 더 편하고, 머리 기르기도 수월해.”
늘 생머리만 해왔기에 호기심도 생겼다.
그래서 집 근처 미용실을 검색해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단순한 펌도 십만 원이 훌쩍 넘는다.
경기 안 좋은 요즘, 머리에 그 돈을 쓰는 게 과연 맞는가 싶다.

망설이던 찰나, 오가며 몇 번 눈에 띈 미용실이 떠올랐다.
낡은 간판, 어르신들의 수상쩍은 출입,
헤진 가림막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움직임들.
‘저긴 뭐 하는 데지?’ 궁금했던 그곳.
며칠 전 산책 중, 어떤 할머니가 길을 물으셨다.
“OO미용실이 근처에 있다는데, 도무지 못 찾겠네.”
순간 촉이 왔다. 그 미용실 같다.
할머니를 모시고 그곳으로 갔더니, 역시 맞다며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하신다.

그래, 거기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갔더니 마감시간이란다.
“일찍 열고, 일찍 닫아. 내일 와.”
몇 시부터 여냐고 물으니,
“새벽 6시부터.”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미장원을 찾았다.
이미 나보다 먼저 온 할머니들이 머리를 하고 계신다.

여기저기 실밥 풀린 낡은 소파가 이상하게 포근하다.
무심히 쌓여 있는 미용도구들, 수북한 수건들,
그 낯선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데,
백발의 단발머리 원장님이 말없이 내게 앉으라고 손짓하신다.
“젊은 사람이니 제일 굵은 걸로 하면 돼. 한두 시간 말면 되겠네.”
묻지도 않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내 숱 많은 머리를 감아올리신다.
파마약 냄새가 밴 수건 위로 빨갛고 파란 광나는 보자기를 덮어주시고
이 상태로 집에 가 있다가 두 시간 뒤에 다시 오라신다.
보자기를 뒤집어쓴 내 모습에 웃음이 터진다.
거울 앞에서 한참을 낄낄거렸다.

두 시간 뒤, 다시 찾은 미용실.
낡은 쇼파는 이미 만석이다.
자식이 사준 양산을 잃어버릴까 몇 번이고 챙기는 할머니,
며느리 험담에 바쁜 할머니,
자식이 노령연금을 받아먹고 본인에겐 주지 않는다며 신세를 한탄하는 할머니.
원장님은 그 모든 이야기들에 추임새를 넣고,
가끔은 거친 욕도 한 마디씩 얹지만,
장갑 하나 끼지 않은 세월 담은 그 손은 쉴 틈 없이 움직인다.

내 차례가 되었다.
“머리카락이 많이 늘어나있네. 중화약 바르기 전에 한 번 감아야겠다.”
드라이와 고데기로 상한 머리를 보며 전문가의 포스로 진단하신다.
“그런데 젊은 사람이 이런 데는 어찌 알고 왔대?
몇몇은 들어왔다가 이 안보고 도망갔어.
근데 내가 머리는 기가 막히게 하잖아.”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나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파마를 푸는 시간.
“잘 나왔네! 아주 잘 나왔어!”
백발의 원장님이 웃으며 칭찬한다.
소파에 빼곡히 앉아 있던 할머니들도
내 꼬불꼬불 숱 많은 머리를 보며 박수와 감탄을 보낸다.
이런 걸로 이른 아침 박수 받을 줄은 몰랐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30년 전 파마값을 그대로 받는 원장님께
그 돈만 내기 미안해서 근처 슈퍼에서 음료수를 사다 드렸다.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하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리엔 파마약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고,
몸엔 이상한 웃음과 따뜻함이 오래도록 감돈다.

뽀글뽀글한 내 머리, 아마 당분간은 자르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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