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마음 식으면 두 번 돌아보기 싫어하던 내게 엄마는 늘 마지막을 모질게 내치지 마라 했다. 다시 돌아 보지 않을듯해도 살다 보면 또 만날 수도 있다며 세상일에 단정 지을 일은 없다고 했다.
남편을 따라 떠난 베트남에서 평생을 살 줄 알았다.
그곳에서 늙고, 그곳에서 아이를 키우며 생을 마무리할 즈음 돌아올 거라며 모든 삶을 계획했다.
하지만 사는 게 그렇듯 계획대로 되는 일은 많지 않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엄마의 소식에 그 오랜 베트남 생활을 접고 돌아온 고향에서 나는 단 하루도 엄마와 함께 하지 못한 채 장례를 치렀다.
엄마가 떠난 후 너무나 멀쩡히 삶을 이어가는 나 자신이 싫을 만큼 아무렇지 않게 살았다.
어떻게 이토록 담담히, 밥도 먹고 일도 하며 차갑게 엄마를 보낼 수 있는 건지.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내가 자란 옛 골목길을 찾은 내 모습을 보며 그건 내게 슬픔이 없어서가 아니라 슬픔의 무게가 천근만근 같았기에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강제 종료시켜버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시월은 잔인한 달,
엄마와 이별한 달.
폭염의 더위가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이 계절은 사람을 걷게 만든다.
내가 자리 잡은 화실에서 걸어서 삼십 분 남짓이면
어릴 적 동네가 나온다.
처음엔 그곳을 외면했다.
돌아보면 무너질 것 같아서.
하지만 몇 번이고 발길을 돌린 그 골목을
어느새 구석구석 걷고 있다.
골목은 당연히 달라져 있다.
매일 코 묻은 동전 쥐고 드나들던 슈퍼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따닥따딱 빌라들이 들어섰다.
어릴 적 잽싸게 뛰어다니던 좁디좁은 골목은 이제 보니 내 몸뚱이 겨우 지날 작은 골목이었다.
촘촘히 붙어 있던 집들은 모두 허물어져 아담한 동네 도서관으로 바뀌었고, 그 앞 공터를 사람 손이 그리운 고양이 한 마리가 오래전 동네를 찾은 내게 배를 보이며 애교를 부린다. 다리 사이를 간지럽히듯 팔자를 그리며 도는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시원한 시월의 가을바람에 길고양이 같지 않은 깨끗한 털을 가진 황금빛 고양이와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나는 내가 자란 그 집 앞에 섰다.
사라졌을 줄 알았던 그 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초록 기와는 회색 시멘트로 덮였고,
나무 기둥에는 쇠 파이프가 부축하듯 버티고 있다.
하지만 내 눈엔 여전히 한여름 퍼질러 수박을 썰어먹던 대청마루와 나만의 비밀 공간이라 여겼던 창고의 자리가 보인다.
지금은 봉제공장으로 바뀐 듯한 그곳.
살짝 열린 문을 밀치고 들어가 볼까 했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한참을 서성이다 먼발치에서 사진 몇 장 남긴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앞까지 걷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멈춘다.
다 헤진 간판 하나가 내 발길을 잡는다.
가게 앞을 서성인다.
짧고 빠글거리는 머리, 마른 몸, 큰 목소리.
그때의 문방구 아줌마가 얼굴가득 세월을 담고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믿을 수 없다.
아이 하나가 과자를 사며 뛰어 들어가자
내 머릿속 오래된 필름이 돌아간다.
그 시절 나도 그 아이처럼 문방구로 뛰어들어가고 있다.
안은 세월을 붙잡아둔듯하다.
누런 때 낀 창호지 문, 먼지 뽀얀 형광등,
칠 벗겨진 선반, 낡은 노트와 연필들
그리고 보글보글 끓던 미원 듬뿍 들어간 떡뽂이 냄새.
모든 게 그대로다.
나는 냉장고 속 물 한 병을 꺼내들고 조심스레 말을 건다.
“저… 여기 학교 다녔던 학생이에요.”
문방구 주인장 할머니와 옛 추억과 세상 변한 이야기 나누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곳까지 왔냐는 할머니 말에 나도 모르게 “엄마 보고 싶어서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터진다.
작고 야윈 할머니는 말없이 나를 안아 준다.
“엄마 보고 싶을 땐 언제든 와.”
그 한마디에, 나는 겨우 멈춘 울음을 또 터뜨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시장통을 울며 걷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따뜻하다.
슬픔보다는 포근함이 몸을 감싼다.
주말, 아무 계획 없이 나선 발걸음에서
나는 엄마를 만났다.
시간을 건너, 기억 속에서,
그리고 나 자신 속에서.
엄마의 흔적이 남은 동네,
내 유년의 공간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위로가 될 줄 몰랐다.
멀리 온 딸 얼굴 한 번 보고 가지 않은 엄마를 이제 그만 미워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두고 두고 되새김질한 추억가득 주었으니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엄마를 놓으려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