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나 음악, 그림이 그렇듯 책 역시 내가 어느 시절, 어떤 삶의 자리에서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변신도 그러하다.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납득이되질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버린 인물의 설정은 허술해 보였고, 주인공 그레고르를 내치는 가족들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라도 그를 보듬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분노가 일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지금, 다시 읽은 <변신>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온다. 허무맹랑한 설정의 소설이 아니라,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아이와 나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하나의 거울이 된다.
최근 사춘기인 아이와 잔소리쟁이가 된 나의 일상은 조용할 날이 없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기보다는, 네 말과 행동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들며 귀를 닫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의 방문은 늘 닫혀 있고, 나 역시 어질러진 방과 스마트폰에 몰두한 아이를 못마땅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문이 열려 있으면 오히려 닫아버리곤 한다. 그런 시기에 <변신>을 다시 읽었다.
변화는 아이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성장 과정에서 호르몬의 변화를 겪으며 독립을 갈망하게 되는 아이, 그리고 갱년기의 문턱을 넘으며 늘어나는 주름과 예전 같지 않은 체력 앞에서 혼란을 느끼는 나. 우리는 각자의 삶의 통과의례를 같은 시기에, 서로에게 가장 예민한 방식으로 겪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아이를 더 이상 내가 정해둔 기준 안의 사랑스럽던 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실망하고 있었다. 아이를 내 틀 안에 넣으려 윽박지르고, 회유하며, 곁에 붙들어 두려 했다. 그런 태도는 아이에게 보호자가 아닌 맞서 싸워야 할 대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변신> 속에서 가족을 부양하던 그레고르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지만, 그의 내면은 여전히 그레고르다. 그는 가족의 말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지만, 가족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없다. 그 순간 그는 쓸모없는 존재, 귀찮고 때로는 생계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인식된다. 최소한의 소통을 위해 열어두었던 방문은 점점 닫히고, 그를 위해 들여놓던 음식은 이제 쓰레기 봉투가 던져지는 공간이 된다.
19세기 산업사회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읽을 때 <변신>은 ‘쓸모’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던 사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로 더욱 선명해진다. 가장의 역할을 잃은 그레고르는 가족에게서 밀려나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이 서늘한 이야기가 지금의 나에게는 사춘기를 겪는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겹쳐진다.
사랑스럽던 아이가 더 이상 ‘내게 쓸모 있는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는 순간, 나는 아이를 그레고르의 가족들처럼 낯선 타자로 밀어내고 있었다. 아이는 변한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었을 뿐인데, 나는 내가 기대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을 변신처럼 받아들였다. <변신>에서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본질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변한 것은 가족의 시선뿐이다.
닫힌 방문, 끊긴 소통, 버려진 존재처럼 취급되는 장면들은 내가 아이에게 보였던 태도와 닮아 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존재 자체로 사랑했던 아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대화가 끊겼던 아이와 조금씩 말을 섞고 있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지만, 닫혀 있던 방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존재 그 자체로 아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 책, <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