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단녀가 되는 잠깐의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백수가 되어 있었다. 연말 보너스를 받기 위해 휘몰아치는 입덧을 참아내며 임신 3개월까지 버텼는데 안정기에 들어서니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냥 더 버티다 육아휴직을 쓸 걸 그랬나 생각을 했을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사실 당시에는 육아휴직을 쓰는 사람도 별로 없긴 했다. 불과 5년이 지난 후에는 육아휴직을 쓰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많이 보였는데 당시만 해도 그조차 당연한 권리임에도 눈치를 봐야했다. 배가 막 부르기 시작할 무렵, 임신 안정기에 들어가서 난 자발적 백수가 되었다. 내 발로 회사를 걸어 나왔으니 실업급여도 육아휴직 수당도 당연히 받을 수 없었다. 어느날 아침 눈을 뜨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임신, 유산, 다시 임신 입덧 그리고 퇴사가 폭풍처럼 휘몰아 쳤고 나는 백수가 된 것이다.
소중한 아이를 얻었지만 너무 내가 감정적이었나 싶었다. 당시에 너무 힘들어 한치 앞도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아이를 지켜야 겠다는 마음 뿐이었는데 눈떠 보니 직업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속상한 마음이 몰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사실 나한테 일이 꼭 필요하다 생각한 건 첫번째 회사를 퇴사 후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간 직후부터였다.
내가 처음부터 일욕심이 많았던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 첫 직장에 입사 후 난 잠시 가정주부를 꿈꿨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 뭐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있겠냐만은 당시에는 그런 것을 알리 만무했다. 아직 철이 없었던 20대 후반. 어려웠던 취업의 관문을 뚫고 운 좋게 국내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행복하지 않았었다. 큰 기계의 부품처럼 잘 짜여진 틀에 나를 구겨 넣는게 영 어려웠었다. 그래도 좋은 선후배님과 동기들 덕분에 즐겁고 웃는 날들도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살 자신이 없었더랬다. 그러던 중 구 남친 현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당시 남편이 미국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 뒤도 안보고 퇴사를 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냥 일단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보면서 앞길을 모색하는 정도...
맞다. 참 바보 같았다. 나의 소중한 인생을 타인에게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경험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남편의 직장이 있는 곳은 미국 남부의 중간 규모의 도시지만 거주지는 시골과 다른 없는 곳이었다 .일단 대중 교통이 발달 하지 않아 운전을 하지 못하면 혼자의 힘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손 꼽히는 정도였다. 남편이 출근을 하면 하루종일 남편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사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교회, 도서관 마트. 사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밥솥을 사용한 것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기 때문에 새로운 곳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도전의 연속이었다.
한달만에 남편을 통해 내 행복을 찾으려는 발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나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운 좋게 남편의 비자문제로 우리는 일년만에 한국에 돌어오게 되었고 나는 경력직으로 국내 1위 뷰티회사에 경력직으로 입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절대로 일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었는데... 결혼에 이어 출산이라는 허들도 넘지 못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