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향형과 내향형 그 어딘가..
사람의 성향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행동 반경이 줄었다. 여전히 나의 에너지는 사람들을 만나면 신나고 즐거워 밤새 떠들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의 체력이지만, 이제는 그 체력의 대부분을 아이와 놀아주고 아이를 키우는 데 사용한다.
사람들을 만나고는 싶지만 만나고 싶지 않다. 모순적이지만 그게 지금의 내 마음일거다. 엄마가 되면 고립된다고들 하는데, 처음에는 그 고립이 견디기 어려웠지만 아이가 어느 정도 말이 통하고 나니 이제는 오히려 그 고립이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기존의 내 소중한 친구들, 지인들과의 모임도 소홀해지는 마당에 이제는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어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아이의 엄마들과 새로운 만남, 관계 형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때로는 회피형 성격인 내게 아주 부담이 된다.
나는 겉으로는 잘 지내고 에너지가 넘쳐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들과 지나치게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느껴지는 불편함. 마치 미용실 가위가 내 목 근처를 서걱서걱 지나가면 그 불편감에 소름이 돋는 느낌처럼. 그래서 내게는 친하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주 많으며, 사실 나는 오랫동안 고독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적당히 갈등 없이 모두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 갈등을 피하고 싶은 마음, 내가 엄마가 아니라 그냥 나인 채 서른, 마흔, 쉰이 지나가면 그렇게 살아도 된다. 하지만 엄마가 되었으니 내 아이 앞에서는 갈등을 직면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문제 상황을 회피하기만 해서는 그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한 번 형성된 성격이 바뀌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바꾸기 위해서는 마음 속 모든 불편감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나는 고독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 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된다는 말이 있다. 밑바닥이랄 것 까진 아니지만 잊고 있었던 진짜 나를 찾기도 한다. 나는 적어도 이삼십년 간 내가 철저한 외향형 인간이라고 믿고 살았다. 하지만 아이를 보면 나의 유년 시절이 떠오른다. 잊고 있었다. 나는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친구와의 대화나 놀이보다 혼자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걸 좋아했던 아이.
방과 후 수업 첫 시간 때 출석을 부르던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날, 나는 "선생님 제 이름은 없는데요"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다음날부터 수업을 빠지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 몰래 집 담벼락 뒤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었던 아이였다. 칠판에 '버스'라고 적어야 할 것을 ㅂ이 조금 튀어나와 "벼스"라고 되어 급우들이 킬킬거리고 놀릴 때 부끄럽기만 했던 아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마도 또래 관계의 영향이었을 거다. 산만해지고 활동적이고 밝아지고 외부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되었다. 아마도 나와 반대인 성격의 언니 친구를 보고 '저렇게 되고 싶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일종의 대리학습이랄까. 그렇게 대학생이 된 후에도 열정과 쾌활함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에 적극 참여했던 나였다. 그게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동안은 만들어진 나로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실 아이의 성향은 나를 빼다 박았다. (적어도 남편은 아니다. 그는 내가 범접할 수조차 없는 인싸 of 인싸다)
어째서 외향형의 두 인간들 사이에서 내향형 아기가 태어났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지만 이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과거의 나를 닮았다는 걸. 그리고 나도 점점 과거의 나로 돌아간다는 걸 말이다.
이렇게 앉아서 내 마음과 생각을 담은 글을 쓰고 있노라면 이게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거라고,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사람들과의 교류가 아닌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말 대신 글을 끄적이는 거라고. 그렇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니 이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