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카빙, 또 다른 칼끝 앞에 서다.

칼끝에서 다시 시작된 시간

by 붕어빵숨니

제과기능장 실기시험이 끝나고,

합격의 기쁨을 잠시 맛볼 틈도 없이

나는 곧바로 푸드카빙 국가대표 선발전 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정말 숨 돌릴 새도 없었다.


제과기능장이라는 큰 산 하나를 겨우 넘었더니,

이번에는 또 다른 산이 눈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푸드카빙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제과기능장 학원을 찾을 때처럼 이번에도 학원 선택은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푸드카빙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많지 않았고

겉으로 보기엔 다 비슷해 보여도

막상 들어가 보면 수업 방식도, 기술도,

선생님의 경력과 실력도,

심지어 학원 분위기까지 전부 달랐다.


경기도, 서울, 천안까지

눈에 띄는 곳은 전부 찾아봤다.


그러다 광고가 가장 많이 보이던 학원 한 곳에 문의를 넣고 직접 찾아갔다.


긴장한 채로 학원 문을 열고 들어섰지만,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그리고 그 불편한 예감은 오래 지나지 않아 맞아떨어졌다.


학원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수업의 질보다 돈 이야기부터 앞서는 분위기였다.


첫 등록 상담부터 나는 크게 실망했다.


대회를 준비하려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드는 건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용이 크더라도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수업의 질이었다.


돈을 내고도 배울 게 없다면

그건 수강이 아니라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곳은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다시 다른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러 곳을 비교해 본 끝에

이번엔 조금 더 저렴하지만

적어도 내가 한 달 정도는 버텨보며 판단해 볼 수 있는 곳으로 정했다.


그렇게 나는 또 다른 칼을 쥐기 위한 연습실로 들어갔다.


빵 반죽 냄새 대신 채소 냄새와 과일 향이 먼저 코끝에 닿았다.


작업대 위에는 빵 틀도, 오븐도, 짤주머니도 없었다.


대신 수박, 무, 당근, 호박, 그리고 처음 보는 모양의 칼들이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바로 느꼈다.


‘아, 여긴 완전히 다른 세계구나.’


제과제빵이

반죽과 온도, 시간과의 싸움이라면

푸드카빙은 칼끝 하나로 바로 결과가 드러나는 작업이었다.


한 번 잘못 깎으면 끝.


선생님이 무 한 조각으로 꽃잎을 깎아내는 모습을 보는데

순식간에 작품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막상 내 차례가 되자

생각처럼 손이 따라주지 않았다.


칼은 생각보다 훨씬 예민했고,

힘을 조금만 잘못 줘도

꽃잎이 찢어지거나 두께가 들쑥날쑥해졌다.


그때 선생님은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시더니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관찰력도 좋고, 눈썰미도 있네.

디자인 감각도 있고, 카빙 할 힘도 있어서

너는 크게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뜨거워졌다.


제과기능장 학원에 이어

푸드카빙 학원에서도

나는 또 한 번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첫 수업을 마치고 나니 어깨와 손목이 묘하게 뻐근했다.


제과기능장 연습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진이 빠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더 해보고 싶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나는 원래 손으로 하는 작업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제과제빵의 길이 아닌

푸드카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경험해 보니

이쪽도 내 적성에 잘 맞았다.


아직은 꽃 하나도 제대로 못 깎았지만,

이 칼끝으로도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결국 또 시작이었다.


제과기능장을 끝내고

잠깐 숨을 돌리는 줄 알았는데,

나는 또 다른 연습실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갈아 넣기 시작했다.


빵 대신 과일과 채소를 앞에 두고,

오븐 대신 칼끝을 붙잡은 채

이번에도 나는 같은 마음으로 출발선 앞에 섰다.


그리고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 낯설고 서툰 시작이 훗날 내 인생에서

‘푸드카빙 직종 최초 장애인 국가대표 홍수민’이라는

또 하나의 최초로 남게 될 줄은.


한 달, 칼끝으로 버틴 시간

연습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됐다.


무와 당근으로

꽃, 독수리, 새우, 물고기 같은 조각을 만들고,

수박 카빙, 호박 카빙까지 이어졌다.


KakaoTalk_20260328_154400606.jpg
KakaoTalk_20260328_154401155.jpg
KakaoTalk_20260328_154400044.jpg
KakaoTalk_20260328_154400892.jpg
KakaoTalk_20260328_154359798.jpg
KakaoTalk_20260328_154401489.jpg
KakaoTalk_20260328_154400318.jpg


보기에는 예뻤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힘과 집중력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단단하고,

가장 섬세해야 했고,

가장 힘들었던 작업은 단연 호박 카빙이었다.


KakaoTalk_20260328_154401788.jpg


호박은 너무 단단해서 칼에 힘을 잔뜩 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손은 퉁퉁 붓고, 팔은 늘 저릿저릿했다.


작업이 끝나고 나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렸고,

손목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묵직했다.


그래도 쉬지 않았다.


칼을 쥔 손이 아프면 반대 손으로 재료를 더 세게 붙잡았다.


팔이 저리면 잠깐 털어내고 다시 깎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한 달은 거의 실전보다 더 실전 같은 연습이었다.


시간은 짧았고, 기술은 처음이었고,

결과는 국가대표 선발전이었다.


푸드카빙을 시작한 지는 겨우 한 달이었다.


보통이라면

‘한 달 가지고 국가대표가 될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불안보다 자신감이 더 컸다.


칼도 조금씩 손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선생님께서도 내 관찰력과 눈썰미,

디자인 감각과 카빙 할 힘이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다.


무엇보다 직접 해보니 이 분야가 생각보다 내 적성에 잘 맞았다.


처음이라 서툰 부분은 분명 있었지만, 할수록 손에 붙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막연한 걱정에 시간을 쓰기보다

‘끝까지 밀어붙여 보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다’는 확신이 더 컸다.


그렇다고 연습을 가볍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많이 깎고, 더 많이 보고,

더 제대로 해내고 싶었다.


어차피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냉정하게 평가받는 건

결국 실력이었으니까.


나는 원래 한 번 시작하면 잠수 타듯 깊게 파고드는 스타일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짧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정말 끝까지 밀어붙여 보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만큼 새로운 경험을 쌓았고,

전문적인 시야도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진열대 위에 작품을 하나둘 올려놓고

뒤로 한두 걸음 물러섰다.


무와 당근, 수박과 호박으로 만든 조각들이

드디어 하나의 무대를 이루고 있었다.


KakaoTalk_20260328_151812200.jpg
KakaoTalk_20260328_151811915.jpg
KakaoTalk_20260328_151812581.jpg


그때마다 생각했다.


‘아, 조금씩 모양이 나오고 있구나.

내 손도 이제 칼을 기억하기 시작하는구나.’


그리고 마침내,

국가대표 선발전 대회 출전용 최종 작품이 완성됐다.


진열대 위에 놓인 작품들을 바라보는데

뿌듯함보다 먼저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래, 여기까지는 왔다.’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시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정말 다 쏟아부은 결과였다.


대회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또다시 익숙한 긴장감이 몸을 감쌌다.


도구 가방을 챙기고, 짐을 정리하고,

조금이라도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누웠다.


제과기능장 실기시험을 치르고 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나는 또 다른 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내 삶은 늘 “이제 좀 쉬어도 되겠다” 싶은 순간에

다음 시작선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또 그 시작선 앞에 서 있었다.


칼끝을 붙잡은 채,

이번에도 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래, 수민아.

이번에도 끝까지 가보자.”


이전 06화합격의 순간, 대통령이 꿈에 찾아오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