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아름다운 배꼽
비행기는 산 아래로 치닫고 있었다. 창밖의 날개가 산자락에 스칠 것만 같아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고지대의 분지에 내리기 위해 산 사이를 파고드는 거였다. 기체의 고도가 돌연 낮아질 때마다 심장도 같이 덜컹거렸다. 마침내 바퀴가 활주로에 닿았을 때 승객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보냈다. 잉카 문명 깊숙이로 향하는 관문, 쿠스코(Cuzco)에 도착했다.
다행히 고산 증세는 거의 없었다. 견딜만한 두통뿐이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금방 주택가에 접어들었는데, 집집마다 나부끼는 무지개 깃발이 시선을 끌었다. 처음에는 LGBT 상징인 줄 알았다. 잉카 도시의 이토록 진보적인 면모라니. 알고 보니 색 조합이 다른 무지개였다. 쿠스코를 뒤덮은 무지개 깃발들은 잉카 제국의 상징이었으며, 지금은 쿠스코 주의 상징으로 남았다. 우기 때면 쿠스코에서 무지개를 보기도 쉽다고 한다.
쿠스코에 도착하던 날, 도시의 중심부인 아르마스 광장에서는 전통 의상으로 치장한 주민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열리는 행사라고 했다. 매주 열리는 것 치고는 꽤나 성대했다. 짧은 일정인데도 볼거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어서 기뻤다. 알록달록한 잉카의 복식을 한 메스티소들이 성당 앞을 행진하는 모습은 매우 이국적이었다. 아름다웠다. 성당 앞 계단에 주저앉아 몇 시간을 넋 놓고 마냥 보았다.
해발 3400m의 분지에 위치한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이라는 뜻이다. 험준한 안데스 산맥 사이에 옴폭 들어간 이 곳이 잉카인들에겐 세상의 배꼽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잉카 제국의 9대 왕 파차쿠텍이 여기에 종교적, 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하는 복합도시를 세웠다. 쿠스코는 기능으로써도 배꼽처럼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퓨마가 땅을 지배한다고 믿는 잉카의 세계관에 따라 퓨마 모양으로 지어진 도시이기도 했다.
잉카의 도시는 16세기에 이르러 스페인 손에 넘어갔다. 피사로는 잉카의 궁전과 신전을 허물고 바로크 양식의 성당과 건축물들을 세웠다. 태양 신전 코리칸차 위에 산토 도밍고 교회가, 와이나 카파쿠 궁전 자리엔 라 콤파냐 데 헤수스 교회가 들어섰다. 정복자의 화려한 건물들이 뒤덮은 잉카 문명의 입구. 그렇게 지금의 쿠스코가 탄생했다.
쿠스코는 지금껏 지나온 그 어느 도시보다도 오밀조밀 예뻤다. 좁다란 골목을 따라 발길 가는 대로 걸으면 다다르는 모든 곳이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무지개 깃발이 도처에서 휘날리는 거리를 누비면서 옛사람들의 귀여운 발상이 떠오를 때마다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퓨마 모양을 한 세계의 배꼽 속을 쏘다니는 셈이었다.
하늘로 시선을 돌릴 때마다, 깎아질 듯한 경사를 따라 자리 잡은 건물들과 그보다 더 높이 솟아있는 산봉우리들이 먼저 보였다. 새파란 하늘은 만년설 덮인 능선 위로 펼쳐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것 같은 뭉게구름을 가득 머금은 채였다. 미미한 고산 증세 때문에 대체로 멍했던 나의 정신 상태와 가빠진 숨결 덕분에(?) 구석구석이 더욱 신비롭고 가슴 벅차게 느껴졌다.
장기 여행자들 가운데 고산 증세를 겪지 않는 사람들은 쿠스코에서 한참을 머무른다고 들었다. 이곳이 마추픽추로, 성스러운 계곡으로, 잉카 문명의 심장부를 향해 여행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이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쿠스코는 제 모습 그대로 여행자들의 마음과 걸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매력이 또렷한 도시였다.
삭사이와만(Sacsayhuamán)으로 향한 건 해질 때가 다 돼서였다. 쿠스코 퓨마의 머리에 해당하는 삭사이와만의 기능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종교의 중심이자 요새 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설도 있고, 수로 시설이었다는 추측도 있다. 매년 6월이면 삭사이와만에서 열리는 태양제를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든다. 삭사이와만은 쿠스코보다도 더 높은 곳에 있었다. 태양에 한껏 가까운 곳이었다. 겨울바람 매서운 고지대 한복판인데도 이미 저물어가는 해로부터 내리쬐는 뜨거운 기운이 제법 강렬했다. 잉카인들이 태양을 섬겼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세월에 맞서 다부지게 버티고 서있는 석벽은 숭고했다. 사실상 제 모양을 거의 잃은 폐허에 가까웠지만, 그조차 완벽했다. 무너진 벽을 이루는 거대한 돌덩이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옹골차게 들어차 있었다. 까마득한 언덕 아래로는 쿠스코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온통 붉은 지붕들이 석양을 받아 더욱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옛날 이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거대한 돌들이 전부 어디서 왔을까, 잦은 지진과 침략에도 어떻게 이만큼의 원형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 언젠가 인류가 이 오래된 비밀을 풀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아득하게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건 앞으로 마추픽추로, 성스러운 계곡으로 돌아다닐수록 더욱더 뚜렷하게 느끼게 될, 미지의 매혹이었다. 내가 정말 남미에 있다는 것이 비로소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다.
쿠스코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새로운 인연들이 있었고, 오래 그리워한 벗이 있었다. 1년 가까이 떨어져 있던 짝꿍 E언니를 만난 건 둘째 날 저녁이었다. 언니는 브라질에서부터 남미 대륙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이날 쿠스코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재회했다. 다만, 여의도나 서대문, 광화문이 아닌 쿠스코의 스타벅스에서. 나는 복작거리는 스타벅스 한가운데서 언니를 껴안고 방방 뛰었다. 눈물이 날 뻔했다.
언니는 예의 그 인자한 미소를 만면에 띠고, 귤이 한가득 든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귤 먹을래?" 그는 그대로인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인 것 같지가 않았다. 더 깊고 밝고, 생기발랄해 보였다. 이 사람이 내내 행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포근해졌다.
언니와 '킨타로'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일식집이었는데, 날리지 않는 쌀밥을 오래간만에 먹으니 속이 다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함께 지내기 위해 새로 예약한 가성비 좋아 보이는 호텔은 아주 까마득한 언덕 위에 있었다. 창 밖의 야경이 예쁘기까지 한 곳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드는 그 높은 방에서 일교차 때문에 중증 감기 환자가 된 나도, 갓 도착해 피곤했을 언니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우유니 사막 투어를 위해 카톡방을 열었던 사람들과도 쿠스코에서 미리 만났다. K오빠와 S, H언니와 J오빠 부부, S언니, Y까지. 리마 한인민박에서 한번 안면을 튼 K오빠와 S를 제외하면 전부 초면이었지만 저녁 한 끼로 어색함을 풀 수 있었다. 하나같이 유쾌하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다른 곳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이 단지 같은 때에 같은 곳을 여행한다는 이유만으로 인연을 이루게 되는 것이 새삼 신기하고 감사했다. 앞으로의 여행이 즐거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소소한 여행 팁
1. 고산병이 걱정된다면 쿠스코 입성 전날 소로체필이나 타이레놀을 먹어두자. 소로체필은 남미 현지에서 구입할 수 있는 고산병 약인데 성분은 타이레놀과 비슷하다고 들었다. 위약효과인진 모르겠으나 한국에서 사온 고산병 약보다 잘 듣는다기에 몇 알 사 먹었다.
2. 약보다는 코카티가 좋단다. 어느 숙소엘 가든지 코카티를 무료로 비치해 두는 편이다. 비행기 안에서도 마실 수 있다. 허브티 맛이라 물처럼 마실 수 있어서 물병에 휴대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스위스 친구 말로는 코카티의 심각한 부작용이 허기를 못 느끼게 하는 거라고 한다. 그 친구는 코카티 때문에 배 주린 줄 모르고 굶다가 5kg가 빠졌다고 했다.
3. 물을 의식적으로 많이많이 마시고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소화도 잘 안되므로 꼭꼭 천천히 씹어먹어야 한다.
4. 심각한 고산병 증세가 이어진다면 고도가 쿠스코보다 낮은 마추픽추로 빨리 이동하는 게 좋다.
5. 감기에 걸렸다면 한국에서 가져온 감기약으로 버티지 말고 페루 약국에서 생약 성분의 물약을 얼른 사 먹자. 잘 듣는다.
6. 기념품은 산 페드로 시장보다 12각돌 옆 가게가 훨씬 싸다. 모든 곳을 통틀어 제일 싼 것 같다. 도매가라고 했다. 물건 양도 많다. 광장에서부터 올라갈 때 12각돌을 조금 지나서 우측으로 꺾어지는 곳 골목에 있다.
7. 앞으로 필요한 방한용품을 여기서 사재기하면 좋다. 소재가 전부 알파카라는데 믿지는 못하겠고 아무튼 따듯한 니트, 토시, 양말, 스웨터, 머플러, 장갑, 모자 등을 헐값에 살 수 있다.
8. 광장 옆 스타벅스에서 와이파이를 쓸 수 있다. 매일 비밀번호가 바뀌긴 하는데 예전 비밀번호를 써도 접속이 되므로 비밀번호 종이를 받아서 사진을 찍어두면 편하다.
9. 어차피 성스러운 계곡 일대를 둘러볼 거라면 삭사이와만 갈 때 통합 티켓을 사는 게 좋다. 당일에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간 사용 가능하다.
10. 앞선 도시들에 비해, 쿠스코의 밤거리는 꽤나 안전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