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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Oct 02. 2017

리마: 조각난 아름다움

꽃을 찾아서

20170630~20170702, Lima, Peru


"다른 데 들를 생각 말고 바로 미라플로레스로 가."

손에 쥔 거라고는 리마로 가는 비행기 표뿐일 때, J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숙소도 거기에 잡고, 공항에서도 바로 그리로 가야 돼. 버스가 있을 거야." 페루의 수도인 이 도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 갈라파고스에서 처음 접한 지명이었다. Mira Flores. 보라, 꽃들을. 꼭 꽃이 만개한 들판이라도 펼쳐질 것처럼 어색하리만치 화려하게 들리는 곳. 그 동네에 위치한 한인민박을 예약했다.


미라플로레스에서 찍은 사진을 대거 날리는 바람에 남은 것이라곤 이 한 장 뿐이다.  그다지 인상적인 풍경도 아닌데. 20170701, 미라플로레스, 리마, 페루


꽃들을 보라


리마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밤의 도시를 질주하는 기사 아저씨는 거침이 없었다. 그가 아내로 추정되는 사람과 통화를 하면서 계기판이 팽그르르 돌도록 밟아대는 통에, 나는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안전벨트를 부여잡았다. 키토에 이어 다시 난폭운전으로 새로운 도시를 만나게 되니까 여행자보험이 교통사고도 커버하는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차창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칙칙한 길거리는 괜히 위태로워 보였다. 이 도시의 밤은 위험하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주워들은 선입견의 마법이 나를 이미 사로잡은 상태였다.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번득이는 불빛이 가득한 곳이 보였다. 미라플로레스였다. 낭만적인 지명만큼이나 아름다운 부촌. 40개가 넘는 행정구가 모여있는 리마는 신시가지인 미라플로레스, 구도심인 센트로 데 리마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 쇼핑몰 등이 밀집한 미라플로레스에는 백인들과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했다.  


미라플로레스의 대형 쇼핑몰. 하루를 마무리한 이곳에서 올해의 보도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떠나온 나의 일에 대한 애틋하고 아련한 마음을 한국어로 방명록에 남겼다. 20170701


이튿날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리마 곳곳을 하루 안에 돌아보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미라플로레스는 과연 웬만한 유럽의 부촌 못잖을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한 곳이었다. 숙소를 나서 걷는 동안 척 보기에도 혈통 좋은 개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백인들을 계속 마주쳤다. 외제차들은 한적한 골목골목을 굴러다녔다. 전날 밤 스쳐지나온 낡은 거리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고급 빌라와 아파트가 즐비할 뿐, 꽃들이 만개한 들판 같은 건 없었다.


구시가지까지는 꽤나 거리가 있어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이어주는 메트로폴리타노 버스를 탔다. 버스가 역 하나하나를 벗어날 때마다 빛이 바래는 것처럼 창 밖의 풍경이 달라졌고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행색도 조금씩 달라졌다. 리마의 다른 얼굴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을 지나는 마차와 택시. 겨울 야자수들은 옷을 입었다. 20170701, 센트로데리마, 리마, 페루


 도시 이야기


중앙역에 내린 뒤, 산마르틴 광장을 지나 리마의 명동이라는 라 우니온 거리를 따라 걸었다. 센트로 데 리마에는 식민지 시절 스페인이 지어 올린 정교한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정복자 피사로는 잉카의 도시를 부수고 그 위에 자신들의 건물을 세웠다. 잉카 문명이 숨 쉬던 유서 깊은 땅에서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이유다. 거리의 끝에서 만난 아르마스 광장의 스페인식 건물들은 해가 보이지 않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색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광장의 채도와 대비되는 시든 야자수와 잿빛 하늘이 묘하게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마침 대통령궁에서는 근위병 교대식이 열리고 있었다. 낯선 군가를 들으며 박자에 맞춰 도열하는 군인들을 한참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대성당과 산토도밍고 교회를 기웃거리다가 리막강 쪽으로 향했다. 리마라는 도시의 이름이 이 강에서 비롯됐다. 안데스 산지의 만년설은 녹아서 리막강을 이루고 서편의 해안으로 빠져나간다. 잉카 케추아족의 언어로 리막(Rimac)은 '말하다'라는 뜻이라 한다. 강바닥에서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재잘거리는 말소리 같아서 말하는 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통령궁에서 열리는 근위병 교대식. 특별한 날인지 언론 촬영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20170701, 센트로데리마, 리마, 페루


유속이 꽤 빠른 그 강은 국경선처럼 이 편과 저 편의 사이를 흘렀다. 그 위에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있었다. 경찰이 다리의 양 쪽을 지키고 서 있어서 강이 정말 국경이라도 되는 듯했다. 다리를 건너는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뭔가를 잔뜩 짊어지고 걸어갔다. 더러는 손을 맞잡은 연인들이 다리를 건넜다. 다리 저편은 리막 지구였다. 키가 낮은 건물들 뒤로는 십자가가 서 있는 산 크리스토발 언덕이 보였다. 그 아래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빈민촌이라고 했다.


모험심이 발동해서 조심스레 다리를 건넜다. 다리가 끝나는 데서부터 펼쳐진 맞은편의 건물들은 확연히 낡은 모습이었다. 삼사 분도 가지 못해서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나절 내내 걸은 탓에 체력이 거진 다한 느낌이었고 돌아올 길이 까마득하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댔지만, 사실 겁을 먹었다. 다리를 건너면 금세 빈민촌으로 이어지는 우범지대에 다다를 테니 조심해야 한다는 숙소 사람들의 말과, 온갖 블로그 게시물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으니까. 그곳에서라면 확실히 미라플로레스, 센트로에 이어 리마의 세 번째 얼굴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리마는 빈부의 구획이 생각보다도 더 선연한 곳이었다. 그건 차라리 격리에 가까웠다. 같은 도시인데 구도심 너머의 빈민촌과 구도심, 그리고 미라플로레스가 서로 수십 년은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리마'라는 이름으로 이웃하긴 했지만, 그곳들은 비슷한 맵시를 한 건물들 끼리끼리 모여 한껏 벌어진 채 존재했다. 도시의 부분 부분은 또 제 나름대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번듯한 신도시의 세련된 첨단이 있었고, 정복자가 과시하던 화려함이 있었고, 시간과 생활에 스쳐 닳아버린 남루함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도시가 돈의 흐름을 따라, 오래된 신분의 계통을 따라 조각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이미 알았다. 하지만 이토록 눈에 선명한 격차를 걸음걸음 느끼게 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리마의 부와 질서, 청결과 안락이 오로지 미라플로레스 안에만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라플로레스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 이 안락한 신시가지 밖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리마의 석양을 미라플로레스의 대형 쇼핑몰에서 감상했다. 서퍼들의 천국이라는 자갈 해변에서는 보기 좋은 파도가 오르내리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거리들과는 아주 다른 나라인 것처럼 동떨어진 이곳에서 사방을 내다보았다. 왼편 저 멀리 리막강 다리 위에서 한층 가까웠던 산크리스토발 언덕이 보였다. 꼭대기에 십자가가 서 있는 빈민촌이었다. 여기 쇼핑몰 전망대에 선 사람들에게는 매일 밤 그 판자집들의 불빛이 언덕에 피어난 들꽃처럼 반짝일 터였다.




#소소한 여행 팁

1. 숙소는 미라플로레스에 잡는 것이 옳다.

2. 공항에서 미라플로레스로 가는 버스가 있으니 사전에 시간표를 확인해보면 좋을 것이다.

3. 미라플로레스에서 묵은 숙소는 한인민박 '숙소 191'. 191은 이 집의 번지수이기도 하다. 쾌적하고 스태프들이 친절했다. 공항 픽업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 집 식구인 고양이 '꾸이'는 아주 순하지만 자유로우므로 고양이가 무섭다면 힘들 수도 있겠다.

4. 출금은 멀티레드에서. 하나비바 체크카드로 출금하면 수수료가 없다. 환전을 할 요량이라면 케네디 공원, 센트럴 공원 쪽에서 '깜비오'를 외치는 불법 환전상과 접촉하는 게 좋다. 환율을 잘 쳐준다고 한다.

5. 메트로폴리타노 운임은 일반 버스보다 비싸지만 쾌적하고 빠르다. 분명 버스인데, 전철 같은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특이한 탈것이다. 버스 중앙차로에 위치한 정류장 양쪽으로 플랫폼이 있다. 노선이 여러 가지지만 환승은 그 자리에서 가능하다. 로컬 버스도 타볼까 했는데 노선이 너무 복잡하고 늘상 현지인으로 만원 상태라서 짐 간수하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6. 구도심 내에서는 충분히 걸어 다닐 수 있다.

7. 리마플로레스 해변에 위치한 라르코마르(Larcomar) 쇼핑몰에 웬만한 게 다 있다. 혹시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미처 갖추지 못했다면 여기서 사면 좋겠다. 시계 반대방향 국민 루트로 도는 거라면, 당분간 이토록 다채로운 공산품을 갖춘 대형 쇼핑몰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8. 서핑 천국이라는데 내가 여행했던 시기는 겨울이어서 알아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멀리서 내려다보기에도 파도가 참 좋아 보였다.

9. 리마 공항 노숙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다. 다만 비행기 탑승을 위해 노숙을 하는 것인지, 노숙을 위해 노숙을 하는 것인지 알쏭달쏭한 사람들이 함께 노숙하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비교적 높다. 물론 공항 건물 자체에 들어갈 때부터 여권 검사를 하긴 한다. 그게 보는 둥 마는 둥이다.

10. 쾌적하고 안전한 노숙 장소는 2층에 위치한 스타벅스다. 와이파이가 되고, 콘센트가 있으며, 근처에 화장실도 있다. 하지만 자리가 많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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