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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Sep 21. 2017

갈라파고스: 섬에서 만난 사람들

인생이라는 여로 위에서 우리는

20170622~20170629: Galapagos Islands, Ecuador


휴양지에 혼자 온 사람은 가끔 지독하게 외롭고 머쓱하다. 다이빙 자격증 따겠다고 홀로 괌에, 제주도에 갔을 때 이미 뼈저리게 느꼈다. 다신 휴양지에 혼자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나는 다시 환상적인 휴양지에 혼자였다. 외로움은 불현듯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래도 값진 순간이었다. 오롯이 혼자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철저한 고독이 있었기에 여행 중 만난 좋은 사람들이 더욱 반짝반짝 빛났다.


인상파 화가의 그림 같은 갈라파고스의 선인장나무. 20170624

 

기회는 어긋날 용기에서부터


6월 26일. 다이빙을 마치고 돌아온 산타크루즈 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라고는 부슬비처럼 아침저녁으로 내리던 게 여태 전부였는데 이날 오후부터는 빗줄기가 꽤 거셌다. 섬과 곧 작별하는 마당에 비까지 쏟아부으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끼니는 거르기로 하고 잘 준비를 하는데 뜻밖에 룸메이트가 저녁 식사 제안을 해왔다.


내가 묵은 호텔의 3인 도미토리라는 기이한 방에는 싱글 침대 하나와 더블 침대 하나가 있었다. 첫날은 혼자 방을 전부 썼는데 이튿날 더블침대의 임자가 생겼다. 이스라엘 북부에서 온 스물세 살, 울리아(읽을 리 없으니 실명을 쓰겠다)라는 청년이었다. 처음 만난 날 시뻘건 얼굴과 어눌한 말투 때문에 술에 취한 줄 알고 한껏 경계를 했다. 알고 보니 갈라파고스의 태양이 한 짓이었다. 얼굴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시뻘갰고 그게 나을 틈도 없이 그는 매일 다이빙을 나갔다. 영어 역시 아침저녁으로 어눌하긴 마찬가지였다.


숙소 옥상에서 아침을 먹을 때 보이는 풍경. 제 집인양 날아든 희귀 새들을 볼 수 있다. 조류공포증인 나는 아침 먹을 때마다 조마조마해서 혼났다. 20170623, 산타크루즈


울리아에게는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비몽사몽간에 매번 열쇠를 챙기는 것을 깜빡하고 나갔다. 그리곤 방문이 잠기는 바람에 로비의 소파에서 잠을 잤다. 자그마치 나흘 중 사흘을 그랬다. 나를 깨우거나 리셉션에 다녀올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어리바리한 건지, 대충 사는 건지, 착한 건지. 나는 아침마다 방문 밖 소파에 웅크리고 있는 그를 깨우며 괜한 죄책감을 느꼈다.


울리아는 삼 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6개월짜리 여행을 시작했다. 갈라파고스는 마지막 행선지였다. 홍해를 지척에 둔 축복받은 나라에서 태어난 만큼, 그는 다이빙을 즐겼다. 언젠가 다이브 마스터가 되겠다고 했다. 생물학을 전공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대입 시험을 다시 봐야 해서 귀국 후가 걱정이라고도 그랬다. 자세히 보니 회색과 호박색의 중간 빛깔로 반짝이는 두 눈이 예뻤다. 고슬고슬한 곱슬머리는 남동생을 떠올리게 했다.


짙푸른 태평양 위로 펼쳐진 쪽빛 하늘에 낮게 구름이 깔렸다. 금방이라도 구름이 바다와 맞닿을 것만 같아 신비로웠다. 20170624


귀국하면 서로 자기 코가 석 자이긴 마찬가지인데,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도 짧은(6개월이 안 되는 여행은 짧게만 여겨지는 대륙이다) 여행을 하는 나를 굉장히 안쓰러워했다. "너는 지금 완전히 자유롭잖아. 그런데 남미에 고작 2개월? 맙소사!!" 족히 다섯 번은 들은 것 같다. 나는 기껏해야 "그러게", "왜 그랬을까", "후회돼"라는 추임새를 반복할 뿐이었다. 울리아는 자신이 다녀왔으나 나는 가지 못할 와라즈, 69 호수 등지의 절경 사진을 잔뜩 보여줬다. 그리고 말했다. "아직 기회는 있어. 계획을 바꾸면 돼!" 그는 서툰 발음으로 스페인어 한 문장을 말하곤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표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것은 확실하지 않다'


현자와 같은 말을 끄덕끄덕 듣고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못 박혀있는 아프리카 여행 일정 때문이었다. 그 모든 걸 변경하는 게 심적으로나 물적으로나 결코 불가능해 보이기만 했다. 그때야말로 계획을 바꿀 적기였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때의 나에겐 여전히 무언가를 어긋나게 하고 뒤틀어버릴 용기가 부족했다. 다만 울리아의 말이 여행 내내 위기의 순간들마다 귓가를 맴돌며 위안이 돼줬다.


곳곳에 숨어 있는 붉은 게들. 20170624


더욱 어린 날의 흔들림


여행 첫날, 한낮의 태양이 뜨거운 산타크루즈 푸에르토 아요라 항구. 새파란 파도를 넋 놓고 바라보며 한없는 막막함을 느꼈다. 무작정 떠나온 여행인지라 이 아기자기한 섬에서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갈라파고스 여행자 오픈 채팅방에서 일정이 비슷한 Y를 찾았다. 이날 저녁 맛은 하나도 없으면서 비싸기만 한 파스타를 시작으로, 우리는 산타크루즈와 산크리스토발에서 총 네 끼를 함께했다.  


Y는 투명한 사람이었다. 잘 타지 못하는 자전거 안장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눈빛, 거북이 등껍질 모형 아래로 비집고 들어가 기어코 사진을 찍고 지었던 천진난만한 미소, 태닝을 하겠다고 온 몸을 시뻘겋게 만들고는 근심 가득해진 표정, 랍스터를 앞에 두고 밝아진 안색. 모든 게 생생하게 드러나는, 소녀 같은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꽤나 얘기가 잘 통하는 편이었던 우리는 술술 이런저런 얘기를 터놓고 할 수 있게 됐다.


스페인어를 전공한 Y는 멕시코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몇 개월간 일을 하다가, 귀국 기념 남미 여행을 시작했다고 했다. 7년 전쯤의 내가 그랬듯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불어닥칠 현실이라는 광풍을 꽤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는 먼 훗날 남미에서 일할 거라는 계획까지 가지고 전공을 선택한 야무진 학생이었다. 공부도, 일도 어느 정도 재미있게 했지만 확신이 생기지 않아서 혼란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어떻게 퇴사를 하게 됐는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도 물었다.

 


스스로의 욕구를 찾는 건 이 여행 내내 따라붙을 나의 숙제였다. Y가 겪는 당장의 혼란이 차라리 부러웠던 이유다. 나는 왜 그토록 어린 나이에 어떤 직업이 내 평생의 천직이리라는 맹목적인 확신을 했을까. 한 순간도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플랜 B나 C 같은 것들을 왜 진지하게 탐구해보지 않았을까. 왜 더 실컷 흔들리고, 좌충우돌하지 못했을까. 궤도 안에서 끊임없이 경쟁하되, 안정적이고 성공적이기를 아주 어릴 때부터 주문하는 우리 사회 때문이었을까. 결국 어릴 때부터 꿈꾸던 길이 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뒤늦은 의심이 스멀스멀 나를 잠식했다. 그 허망한 좌절감을 잊지 못한다.


나는 Y에게 그 시기에 과감하게 길을 잃어보라고 말해주었다. 지금이 딱 길을 잃고 여기저기 헤매 보기 좋을 때라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실컷 방황해 볼 때라고, 수십 년은 더 산 사람처럼 말해주었다. 그 시절 무섭도록 길게만 느껴졌던 1년 2년이 돌이켜보니 그토록 긴 것은 아니었으니 조급해하진 말란 얘기도, 늦은 방황보다는 이른 방황이 낫다는 얘기도 건넸다. 울리아가 내게 해 준 말이 힘을 보탰다. 산크리스토발 섬의 석양이 스며드는 카페에 앉아 Y와 두런두런 푸념을 나누면서, 이 시간이 앞으로 이어질 Y와 나의 방황에 담백한 양분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던 새 두 마리. 20170628, 토르투가 베이, 산타크루즈섬, 갈라파고스 제도, 에콰도르


같은 곳을 향해 함께

영원한 여행


여행 서가에나 꽂혀 있을 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갈라파고스에도 많았다. 유독 세계일주를 하는 커플들을 많이 만났다.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이라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특히 K 부부와는 다이빙 두 번에 저녁식사 한 끼를 함께하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눴다. 살짝 묻어나는 사투리 억양이 정겹고 미소가 예쁜 분들이었다. 무심한 듯 서로를 습관처럼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영락없는 완패였다.


K 부부에게는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이 없었다. 다음 목적지는 그때그때 기분 따라, 더러는 티켓 특가에 따라 정한다고 했다. 갈라파고스를 끝으로 남미 여행을 마무리짓고 이집트 다합으로 가게 될 것 같다는 게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여행의 호흡은 아주 느렸다. 마음 맞는 곳에선 몇 주가 되던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두면서, 말 그대로 하루하루를, 한 곳 한 곳을 한껏 만끽하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1년 여정의 절반을 왔다고 했다.  



궁금했다. 어떻게 세계일주라는 일탈을 계획하게 됐는지, 어떻게 그걸 같이 할 짝을 만나게 됐는지, 어떻게 부모님을 설득했는지. 우문마다 현답이 돌아왔다. 비결이랄 게 따로 없었다. 모든 것은 서로를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거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연애 시절 처음 함께 다녀온 여행 덕분이었다고 한다. 대단히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사소한 게 즐거워지는 그런 여행이었다. 남은 생을 같이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은 짝꿍, 함께라면 내내 즐겁게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라는 걸 여행을 통해 확인했다. 그게 모든 것의 원동력이었다.


K부부는 결혼한 지 4개월쯤 됐을 때 나란히 퇴사하고 세계를 떠도는 여행길에 올랐다. 무모한 계획을 털어놓는 아들에게 “니 미칬나”고 묻던 아버지도 결국 부부의 편이 되었다. 부부는 취미 활동은 물론, 평생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여행 메이트를 만나는 날이 내게도 반드시 올 거라고 했다. (아멘)

 


사실 퇴사를 하면서 몇 가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각오했다. 이 직장을 떠나면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 프리터족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앞만 보고 달리던 인생의 리듬이 깨짐으로써 결혼, 출산, 육아와 같은 다음 관문들이 요원해질 수도 있다는 것. 물론 남들이 한다고 다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애초에 커질 대로 커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K부부를 만나고 그 이후로도 줄곧 여행하는 부부들을 만나면서, 결혼을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것은 결국 여행과 같다. 그 길 위에 계획과 무산, 뜻밖의 변수, 고난과 즐거움이 뒤엉켜있다. 험하고 고된 길을 갈 때도, 한없는 평안함을 즐길 때도, 이 세상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마주칠 때도, 언제 어디서든 함께하는 나만의 동행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든든한 일이다. 그걸 이 여행에서 만난 부부들이, 삶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들어간 사진은 안 올리려고 했는데 이건 물개가 너무 귀여워서 자랑하겠다. 자다 깨서 정신 못차리는 아기 물개다. 20170629, 라로베리아 해변, 산크리스토발섬, 갈라파고스
#소소한 여행 팁

1. 발트라 공항에서 산타크루즈 섬으로 가려면 무료 셔틀버스-배-유료 버스를 타야 한다. 다만 산타크루즈 섬 시내에서 다시 공항에 가려면 오전 8시에 유료 버스를 잡아타거나 택시를 타야 한다. 버스는 하루 딱 한번, 오전 8시에만 있다.

2. 산타크루즈 섬에서 묵은 숙소는 호텔 가르드너(Hotel Gardner). 가격이 합리적이고 시설도 나쁘지 않았으며 아침이 맛있었다. 시내도 가깝다. 산크리스토발 섬에서는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다.

3. 맛집은 산타크루즈보다는 산크리스토발에 더 많다.

4. 키토 공항에서 갈라파고스로 입도하기 위해서는 항공사 체크인에 앞서 별도의 입도 수속을 밟아야 한다. 입도비($100)와 별개로 이때 $20를 지불하고 서류를 발급받는다. 짐 검사도 미리 한다. 이 서류가 있어야 항공사 체크인을 할 수 있다. 오전 5시부터 문을 여는데 줄이 길게 늘어지므로 일찍 가는 게 좋다.

5. 남미사랑에서 파생된 갈라파고스 채팅방에서 유용한 자료를 받았다. 누가 작성했는지 출처가 표기돼 있지 않지만 아주 유용하고 친절하다. 서로서로 돌려보는 것이었으므로 문제 될 게 없지 않을까 싶어서 첨부한다. 문제시 빛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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