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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Sep 13. 2017

줄이기, 비우기, 버리기

짐 싸기에 대한 고찰

여행이 주는 두근거림이 현실로 다가오는 어떤 순간들이 있다. 비행기 티켓 결제 완료 창이 보일 때, 휴가를 받기 위한 결재 서류에 승인이 났을 때, 묵을 곳을 하나하나 둘러볼 때, 새로 산 여행 서적의 빳빳한 표지가 넘어갈 때. 짐을 꾸리는 과정도 피부로 와 닿는 구체화된 설렘 중 하나다. 일주일 안팎의 짧은 여행이라면 주로 가서 뭘 입어야 예쁜 사진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고민하면 된다. 어렵지 않다. 그런데 두 달이 넘는 여행, 그것도 사계절을 두루 넘나드는 여행을 준비하려니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캐리어 들고 배낭여행


질끈 동여맨 머리와 보기 좋게 그을린 민낯의 피부, 어딘가 남루해 보이는 옷차림, 그리고 등 뒤에 매달린 태산 같은 백팩.


많은 사람들이 남미나 아프리카처럼 꽤 난이도 있는 여행지를 떠도는 사람을 이런 이미지로 기억하거나 상상할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배낭을 지고 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커다란 백팩을 사려고 인터넷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필리핀 타클로반에 태풍 피해 취재차 출장을 갔을 때를 빼고는 한 번도 배낭을 지고 여행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캐리어와 백팩 사이에서 선택을 내리는 게 첫 번째 관문이 됐다.


적도의 석양. 그늘 아래 삼삼오오 모여 아이스크림을 먹는 주민들. 20170626, 산타크루즈섬, 갈라파고스제도, 에콰도르

갈팡질팡하는 내게 큰 도움을 준 건 현지에 있는 수백 명의 여행자들이었다. 시대가 좋아진 덕분에 예전 같으면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고, 여행 카페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기다리고, 댓글을 달고, 새로고침 하고, 새로고침 해야 했던 모든 것들을 카카오톡 그룹채팅방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남미 여행 정보가 모이는 카페 남미사랑과 여행 전방위 여행 커뮤니티 여행에미치다에서 만들어진 채팅방들이 중심이 됐다. 특히 남미사랑 카톡방에는 900여 명의 전현직 여행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카톡방의 많은 여행 선배들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주체할 수 없는 크기의 배낭을 지고 왔다가 병 나는 여자들을 꽤 봤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견은 많지 않았다. 나는 집단지성에 힘입어 5년간 동고동락한 24인치 캐리어를 들고 가기로 했다. 이 캐리어에 지갑이나 여권 같은 걸 담을 작은 배낭이면 되겠거니 싶었다. 오산이었다.



무소유의 난이도


가장 큰 난관은 날씨였다. 겨울이라 봤자 남미이며 아프리카인데 추우면 얼마나 춥겠나 하는 무지한 용기가 금방 산산조각 났다. 7~8월, 남극에 가까운 파타고니아의 최저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것은 예상 가능했다. 다만 영하의 추위가 남미와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건 뜻밖이었다. 사막 기후인 볼리비아 우유니나 나미비아 이곳저곳은 물론, 볼리비아 라파즈, 페루 쿠스코처럼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들의 기온이 생각보다도 더 낮았다. 에콰도르 갈라파고스는 적도의 여름을 자랑하고 있었고, 밤이면 영하로 떨어지는 도시들도 낮엔 20도를 웃돌기 일쑤였다. 여행지 날씨를 쭉 열거해 놓고 보니 -6부터 33까지 널뛰는 숫자가 아찔했다. 한 여름과 한 겨울 옷이 모두 필요했다.

 

둘리가 나올 것 같은 빙하.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남미 대륙의 남단이며, 그곳의 겨울이다. 오리털 파카 만세. 20170721, 모레노 빙하, 엘칼라파테, 아르헨티나


이번에는 카톡방 여행 선배들 의견이 갈렸다. 추위를 많이 탄다면 겨울 패딩을 챙기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경량 패딩에 겹겹이 껴입는 걸로도 거뜬하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난방이 안 되는 곳이 많으므로 전기방석을 챙기라고 덧붙였다. 겨울 패딩은 아무리 성능 좋은 압축팩에 욱여넣는대도 캐리어 부피의 1/4은 차지할 터였다. 그렇지만 감기로 앓아눕느니 짐이 무거운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더 많은 블로그를 찾아볼수록, 정보에 노출되면 될수록 필요해 보이는 것들의 목록은 늘어만 갔다. 가져갈 물건을 전부 내놓았더니 방 안에는 발 디딜 틈이 하나 없었다. 캐리어에 들어갈 리 만무한 양이었다. 닷새가 넘도록 짐을 꾸렸다 푸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아주 근원적인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나는 왜 짐을 싸고 있는가


짐이라는 명사의 첫째 뜻은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챙기거나 꾸려 놓은 물건'으로 돼 있다. 두 번째론 '맡겨진 임무나 책임'이란 뜻이다. 마지막은 '수고로운 일이나 귀찮은 물건'. 물론 내가 짐을 싸는 것은 남미와 아프리카로 당분간 옮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옮겨가는 것은 밭은 바 임무와 책임을 모두 내려놓은 백수가 되었기 때문이었고, 백수가 된 것은 삶의 모든 수고로부터 달아나 원점에서 성찰하기 위함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출국 당일 새벽 2시, 화장도 안 지운 채 외출복 차림으로 난장판이 된 방바닥 한가운데 퍼질러 앉아 머리를 쥐어뜯는 내가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다 잃을 것까지 감수하고 떠나는 여행에 앞서,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아등바등하는 스스로가 가엾게 느껴져서였다.



절박한 미니멀리즘


고군분투 끝에 24인치 캐리어 하나, 30~40리터 배낭 하나, 8리터 보조 배낭 하나가 미어지도록 아래와 같은 것들을 챙겼다. 혹시 짐 싸느라 사경을 헤매는 후배 여행자들에게 도움이 될까봐 적었다. 적고 보니 쓸데없는 걸 참 많이도 가져갔다 싶어서 안타깝다. 코멘트 없는 항목들은 잘 쓰고 집으로 가져왔으며, 가져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 것들이다.


엉덩이를 덮는 오리털 패딩 1

초경량 패딩 1: 잘 입고 아프리카 벗어날 때 버렸다

후리스 집업 1

기모 후드 1: 갈라파고스에서 버렸다. 괜히 가져갔다.

니트 집업 1: 아프리카 벗어날 때 버렸다.

히트텍 1

긴팔 티 1

반팔 티 2

간절기 카디건 1

나시 1: 아프리카 벗어날 때 버렸다.

브라캡 내장 나시 1

운동복 브랜드 레깅스 1

청바지 2: 하나 잃어버렸고, 다른 하나는 살찌는 바람에 아프리카부터 잘 못 입었다. 하나만 가져갈 걸.

반바지 1

와이드 밴딩 팬츠 1

트레이닝팬츠 1

해변용 원피스 1

비키니 1: 빅토리아 폭포 래프팅이 마지막 물놀이였으므로 거기서 폐기.

브래지어 2

팬티 7: 주섬주섬 버리기 시작해 4장 가지고 손빨래로 돌려 입었다.

일반 양말 3: 주섬주섬 결국 다 버렸다.

겨울 양말 2: 시차를 두고 다 버렸다.

수면 양말 1: 남미 끝나고 쓰레기통 행

기모 레깅스 1

고어텍스 트래킹화 1

도시용 스니커즈 1

쪼리 1

캡 모자 1: 중간에 잃어버려서 하나 새로 샀다.

밀짚모자 1

방한 마스크 1

작은 스카프 1: 나미비아에서 분실.

낡은 롱샴 숄더백 1: 짐바브웨에서 폐기.

전기방석 1: 보츠와나 이후로 폐기.

스포츠 타월 2: 중간에 하나 버렸다.

손전등 1: 왜 가져갔는지 대체 모르겠는데 아빠 물건이라 다시 가져왔다.

어댑터 2: 하나 잃어버렸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에서 무용지물.

멀티 USB 꽂이 2

아이폰 충전 케이블 2: 둘 다 망가져서 두 번이나 새로 샀다.

카메라 충전 케이블 1

소니 하이엔드 디카 1

고프로 1

블루투스 키보드 소형 1: 괜히 가져갔다. 내가 지금 끄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현지에서 적을 줄로만 알았다.

갤럭시 탭 1

아이폰 1

신라면 짜파게티 각 1

튜브 고추장 2

수저 1: 쓸데없었는데 새 거라서 다시 가져왔다.

각종 핫팩 도합 10

마스크팩 10

샴푸 트리트먼트 250ml 각 1

세면도구 일체와 기초화장품: 그냥 당장 쓸 것만 챙기길 추천. 어디서든 다 살 수는 있다. 비싸서 그렇지.

소형 섬유탈취제 1

모기기피제 1

살충제 1

이렇게 중간에 샀는데 안 쓴 것들도 있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아프리카에선 책을 펼 수가 없다. 다섯 장 읽었다. 20170731, 상파울로, 브라질

상비약: 감기약이 부족했다.

안대 1: 불필요. 폐기.

자전거용 자물쇠 1: 한 번도 안 쓰고 도로 가져왔다.

메모리폼 목베개 1: 공기 주입식으로 챙기길 추천.

오리털 침낭 1

휴대폰 방수팩 1

소형 반짇고리 1

몰스킨 다이어리 1

필기도구 3

시집 1

남미 여행책 1: 중간에 폰으로 찍고 폐기.

계간 문예잡지 1: 아르헨티나에서 다 읽고 폐기.

잉카 문명 관련 책 1: 남미 진입 전 완독 후 폐기.

자물쇠 2: 하나 분실.

휴대용 물티슈 4: 쓸 것만 가져가자.

휴대용 티슈 4: 위와 마찬가지.

한 주기 분 생리용품: 발암물질 덩어린 줄 알았다면 아예 안 가져갔을 것이다. 차라리 거기서 사 올걸.


마음의 무게


2017년 6월 20일, 나는 이렇게 잡다한 것들을 짊어지고 끙끙대며 한국을 떠났다. 인생의 무게처럼 버거웠던 짐은 나날이 가벼워졌다. 마음 또한 그랬다. 기특한 변화였다. 틈틈이 많은 것을 버리면서, 기념품 하나 들어갈 곳 없던 캐리어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 무렵 캐리어도 버려졌다. 아프리카 트럭킹은 개인 락커 규격에 맞는 더플백이나 백팩에 짐을 챙겨가야 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8월 2일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두 번째로 대대적인 감량에 나섰다. 이튿날 새벽이 되도록 버리고 또 덜어냈지만, 더플백이 고작 캐리어의 절반 크기인 까닭에 지퍼가 여며지지 않을 정도로 한껏 눌러 담아야 했다. 백팩과 롱샴 가방, 보조 배낭에까지 한가득 챙긴 짐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휘청거리며 트럭에 올랐다. 다행히 8월의 내겐 남미에서 터득한 여유와 대담함이 있었고, 버리는 것에 대한 노하우도 있었다. 매일 버리고 또 버렸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들른 마지막 행선지 마드리드에선 쇼핑을 하고도 가방에 공간이 남았다.


여행길에서 만난 장기(6개월 이상이어야 장기 축에 낄 수 있는 듯했다)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단출한 백팩만 짊어지고 있었다. "짐이 그것밖에 안 돼요?"하고 물으면 어김없이 "이것도 너무 많은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매일같이 짐과 마음을 줄이고, 비우고, 버리는 법을 단련했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 훈련을 통해 앞으로도 움켜쥐기보다 내려놓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이 어디로 향하든지 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어진 길을 저벅저벅 걸어갈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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