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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th in Sep 10. 2017

아름다운 이별, 모험의 시작

지겹거나, 재밌거나 - 퇴사하고 여행 간 흔하고 특별한 얘기

사랑했다. 그것도 꽤 열렬히. 이유라면 이유라 할 것들이 있었지만, 돌이켜보니 그냥 좋았던 것 같다. 막연한 환상이나 무지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20대 초반이면 중요한 결정을 하기엔 퍽 어린 시기이니까. 당시의 열정은 맹목적이었다. 한 눈 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차례 거절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도전했다. 부족한 내 탓도, 피치 못할 상황 탓도 해 봤다. 끝끝내 받아들여진 건 한 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서 분명 날아갈 것처럼 기쁜 날들이 있었다. 매일이 새롭고 설렜다. 죽을 만큼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버텼다. 그럴 수 있었다. 푹 빠져서 허우적댈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한 해 두 해 세월이 쌓일수록 차츰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또 시들해졌다. 기쁜 날들만큼 괴로운 날들이 생겨났고,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 역전이 일어났다. 마음속에서는 잡다한 의문들이 꿈틀거렸다.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는 여기 적합한 사람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삶이 최선일까. 뜨거움이 시나브로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초심이 제 빛을 잃은 건 아마도 그 공허하고 울적한 물음표들 사이 어디쯤부터였을 것이다.


일 년 가까이 아주 황폐한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다. 이 사막만큼 아름답지도 못했다. 20170808, 소서스블레이, 나미비아


오랫동안 전부라고 믿었던 것들과 서먹해지자 삶은 정물 같기만 했다. 어쩌면 그게 대다수의 성숙한 어른들이 짊어지고 살아가는 생활이자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봤다. 그래도 아프고 슬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내가 커다란 갈림길 앞에서 대개 안주를 택했다는 사실과, 내 삶에 그토록 획기적인 기로는 더 이상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함께 찾아왔다. 있는 자리를 떠나보기로 결심한 이유다. 마크 트웨인의 말로 알려졌으나 확인된 바는 없는 아래의 글귀가 힘이 됐다.


20년 뒤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 때문에 더 실망할 것이다. 그러니 밧줄을 풀고 안전한 항구를 떠나라. 돛을 펼쳐 무역풍을 받아라. 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
Twenty years from now you will be more disappointed by the things that you didn't do than by the ones you did do. So throw off the bowlines. Sail away from the safe harbor. Catch the trade winds in your sails. Explore. Dream. Discover.


일 얘기다. 2017년 6월 중순, 나는 기자를 그만두고 정해진 것 없이 회사 밖으로 나왔다. 입사한 지 4년 4개월 만이었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보니 퇴사를 위해 거쳐야 했던 모든 감정들이 실연의 그것과 낱낱이 닮아 있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만큼 내 직업과 일을 사랑했다. 딴마음을 품게 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나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글쓰기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안에서 차고 넘치는 게 있어야 뭔가를 써낼 수 있을 텐데, 언젠가부터 구멍 뚫린 바닥을 한없이 파내려 가는 것 같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글 쓰는 일로 밥 벌어먹고 있으니까 꿈에 한 발쯤 걸치고 있다는 자기 위안은 연약했다. 이렇게 살면서는 내내 꿈만 꾸다 말 것 같았다. 여유와 사색이 절실했다.


성인으로서의 삶 전체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시간, 평생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 소속됐던 집단을 박차고 나오는 건 쉽지 않았다. 내가 일로 연을 맺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는 걸 뒤돌아서는 순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생각에 괴롭기도 했다. 더 할 수 있었던, 더 잘할 수 있었던 아쉬운 순간들과 함께 더할 나위 없이 벅차고 충만했던 순간들이 밀물처럼 기억의 곳간 밖으로 쏟아져 나와 나를 적셨다.


거친 바다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어가는 물개. 무모하게 퇴사하는 나를 보는 듯.  20170628, 산크리스토발섬, 갈라파고스제도, 에콰도르


어쨌거나 결심이 선 뒤의 하늘은 쾌청했다. 마음의 일기 또한 그와 같았다. 문 밖의 길로 향하는 걸음 앞에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물론 그 끝에 낭떠러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없는 추락을 경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박차고 날아오를 힘을 얻게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가 조금 더 컸다. 나는 여전히 젊고, 젊은 만큼 돌아갈 여유와 무모할 기회가 남아있다고 믿었으니까.


끝이라는 말에는 가공할 힘이 있다. 그 힘의 일부는 끝이 언제나 시작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 빚지고 있다. 회사와의 작별로 뭇 직장인의 입버릇이 내겐 현실이 됐다. 누구나 한 번쯤 말해봤을 법한, '퇴사하고 남미 여행'. 에콰도르에서 시작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 잠비아, 스페인 마드리드 등 남미, 아프리카 12개국을 거치는 약 70일간의 여정. 오래 고민한 만큼 결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앞뒤 재볼 겨를도 없이 떠나야 했다. 그게 지난 6월 20일. 만 28세 생일 바로 다음 날이었다.


숨 가빴던 시작만큼이나 방랑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마음이 영 돌아오지 않아서 돌아왔다는 사실도 주변에 얼버무려야 했다. 여행을 정리하려고 보니 출발 전의 포부와 달리 생각보다 벅찬 일정 때문에 기록다운 기록을 못한 날들이 더 많았다. 어떻게든 써두지 않으면 제아무리 찬란한 순간의 빛들도 시간을 따라 휘발돼버리고 말 것이란 점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완벽하지 않더라도 적어 내려가고자 한다. 어쩌면 영영 끝을 맺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시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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