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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Jun 22. 2020

친구와의 이별 “またね”

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96일 차>


96일 차 - 6월 19일
2019년 7월, 마리나 생일 파티 후에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한 내용


크루즈에서 일하면서뿐만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언제일까?


진짜 내 편, 내 사람, 내 친구, 내 가족이

나와 함께라고 느낄 때가 아닐까 싶다.


그 행복을 위해 수없이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십여 년 동안의 내 사람에게 마음이 닫히기도 했고

몇 달 동안의 내 사람에게 아낌없이 퍼주기도 했다.


화나고 눈물 나게 깨지면서도

기쁘고 풍족해지는 마음을 알기에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만남을 추구하고

관계를 맺어보고자 노력해왔다.


전적으로 서로를 신뢰하고 지지하는 가족과

몇 달 몇 년 만에 만나도 늘 함께 한듯한 친구와

언제 만나도 고맙고 든든하고 반가운 사람과

매일 함께함이 즐겁고 의지되는 크루즈 친구와

관계를 형성하고 지속하며 행복함을 느껴왔다.


최근 일이 년 동안

그 행복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게 해 준 친구가 있다.


그저 같은 팀 한 달 후배로 시작해서

일 좀 하는 동료로

같은 방에서 이층 침대 쓰는 룸메이트로

24시간을 같이 있어도 괜찮은 녀석으로

선내 모두가 다 아는 트윈즈로까지

관계가 발전된 내 친구 마리나다.


이날은 그 마리나가 하선한 날이었다.


귀국 항공편 및 모든 준비가 확정된 이후부터는

주변 모두가 둘 다 눈물바다가 될 거라며

짓궂게 놀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우리 둘 다

어차피 또 볼 건데 그럴 일 없다며 쿨한 척했었다.


막상 하선하는 순간이 다가오니

평소와는 다르게 둘 다 감정적이 되었다.


마리나가 배웅하러 온 친구들과 인사를 한 후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 순간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버려서 흐르기 직전이었고,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감춰보려고 포옹을 했지만

이미 넘치도록 가득 찬 눈물샘은

폭발해서 멈출 줄을 몰랐다.


가는 길 조심하고 가서도 조심하라며

남은 기간 힘내고 조심하라며

수차례 포옹을 하며 이별 인사를 반복했다.


어찌하여 이 날의 이별이 그렇게도 슬펐을까.


14년 동안 뱃생활과 해외생활을 해오면서

내 사람과 이별하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말이다.


이 코로나 팬데믹만 끝나면

배에서든 육지에서든 다시 만나게 될 텐데 말이다.


도대체가 코로나 종식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그로 인해 크루즈 운영 재개가

언제가 될지 몰라서일까.


그로 인해 아직 바다를 포기하지 못한 내가

배로 돌아오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될까 바일까.


가타부타 모든 것이 다 불안해져서일까.


아니면 승선한 지 9달이 다되어가서

육지를 못 밟은 지 3달이 지나서

그러고도 집에 가려면 아직 2달이나 남아서

그저 감정이 너무 물렁물렁해져 버린 걸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나는 내 친구와 또 이별을 했다.



텐더 보트에 타기 전까지 배웅해놓고

떠나는 거까지 보겠다고

다 같이 서둘러 덱 3의 오픈덱으로 뛰어갔었다.


마리나와 함께 마세도니안 2명과 칠리안 2명,

총 5명이 하선했다.


마리나가 텐더 보트에서 찍은 우리 배
마리나가 텐더 보트에서 찍은 우리 배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어 보트를 타고 갔는데

저녁 7시가 되어서야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항구에 도착해서 이민국 심사를 하고

여권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그 여권을 받는데 몇 시간이나 걸린 것이었다.


마닐라 공항 밖에서, 공항 안으로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줄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공항에서도

한 시간을 넘게 공항 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항공편 출발 시간을 기준으로 네 시간 전에만

공항 안으로 들여보내 주기 때문이다.


선사가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마닐라 항구와 이민국 측의 조건에 맞추려면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매번 우리 크루들은

찌덥게 더운 마닐라 항구와 공항에서

몇 시간씩을 기다린다.


그렇게 해서라도 집에 갈 수 있다면 다행이다.


아직도 국경이 닫혀있어서

전세기나 전세선을 마련할 만큼의 인원이 안돼서

언제 귀국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로

아직도 기다리기만 하는 크루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리나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저녁 8시가 넘어서야

공항 안으로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체크인을 마치고 공항 안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주문하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설렌다고 했다.


얼마 후에는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했다고 했다.


또 얼마 후에는 무사히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비빔밥을 주문했다면서

오랜만에 밥 같은 밥을 먹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또 얼마 후에는 무사히 칸사이 공항에 도착해서

 코로나 검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또 얼마 후에는 음성 결과를 받아

부모님 차를 타고 히메지로 출발한다고,

집에 도착해서는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거의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나는 내가 집에 가는 날을 상상해보았다.


어떤 기분일지 도저히 감도 안 잡힌다.


이제는 껌딱지처럼 항상 함께하던

마리나가 없다는 것도 감이 안 잡힌다.


물론 다른 친구들과 잘 지내지만

혼자서도 정말 잘 지내지만

아쉽고 허전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어디에 가든지 많이도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너무나도 다시 가고 싶은 기항지에서의

마리나와의 추억을 되짚었다.


언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머리 터지게 다리 아프게 일하면서도

한두 시간의 쉬는 시간에라도 한껏 기항지를 즐기던

우리의 일상으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WEWILLBEBACK


Australia, Brisbane //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캥거루랑 코알라 구경하고 먹이 준 날
Alaska, Skagway // 알래스카, 스캐그웨이에서 엉덩이 아프도록 말 타고 달린 날
Alaska, Hubbard Glacier // 알래스카, 허버드 글레이시어랑 사진 찍으려고 데스크는 동료에게 맡기고 오픈덱으로 뛰어간 날
Mexico, Cabo San Lucas // 멕시코, 카보 산 루카스에서 못내려서 선내 짐에서 씩씩거리다가 사진만 찍은 날
Guatemala, Puerto Quetzal // 과테말라, 푸에르토 케찰의 수공예품 시장에서 수없이 바가지 가격 강매 당한 날
Aruba, Oranjestad // 아루바, 오라녜스타트의 알록달록한 건물과 에메랄드 빛 바다때문에 배에 돌아가기 싫었던 날
Canada, Halifax // 캐나다, 핼리팩스에서 만난 퀸 메리2에 들어가보지는 못하고 사진만 찍은 날
Iceland, Reykjavik //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남들 다 하는 교회 구경은 안하고 신나게 먹은 날
Portugal, Lisbon // 포르투갈, 리스본의 하몽과 샹그리아에 반한 날
New Zealand, Wellington //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쇼핑하러 나갔다가 마리나가 커플 가방만 산 날
New Zealand, Tauranga // 뉴질랜드, 타우랑가에서 트래킹하고 비치에는 갈 시간이 없어 크루 풀에서 만족한 날
New Zealand, Dunedin // 뉴질랜드, 더니든에서 진짜 맛있는 해산물 요리 배 터지게 먹은 날
Australia, Cairns, Great Barrier Reef // 오스트레일리아, 케언스,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서 스노클링이랑 스쿠버다이빙한다고 엄청 물 먹은 날
Queen Elizabeth, Deck A, Forward, Crew Cabin A621 // 자기 전에 난데없이 잠옷 바람으로 사진 찍은 날
Queen Elizabeth, Deck 12, Aft, Crew Open Deck // 큐나드의 상징인 빨간 굴뚝 앞에서, 마리나 하선 전 셀프 사진 촬영한 날
Queen Elizabeth, Deck 11, Forward, Chess Deck // 촬영 핫스팟인 체스 덱에서, 마리나 하선 전 셀프 사진 촬영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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