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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Jun 27. 2020

크루즈 승무원의 대단한 언박싱

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97~98일 차>


97일 차 - 6월 20일



오늘은 오늘의 해가 뜬다.


3개월이 넘도록

300척이 넘는 크루즈 배가 항해를 못해서

    22만 명이 넘는 승무원이 일을 못하고 있어도

3만 명이 넘는 승무원이 바다 위를 떠돌고 있어도

3천만 명의 승객이 크루즈 재개를 기다리고 있어도

크루즈 관련 산업이 더 많이 힘들어졌어도


오늘은 오늘의 해가 또 떴다.


그래도 전 세계 코로나 확진자 1000만 명과

사망자 50만 명을 바라보는 참담한 시점에


앞날은 불안할지언정

바다 위에서 건강히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일출을 바라보는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3주 전에 캡틴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포트 에이전트를 통해

필요한 물건이든 음식이든 무엇이든지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얼마나 어찌하여 반가운 것이냐면,

우리는 3개월이 넘도록

먹는 것은 레스토랑에 나오는 것만 먹어야 했고

마시는 것은 크루 바에 있는 것만 살 수 있었고

필요한 것은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 아껴 써야 했다.


짭조름한 감자칩이 먹고 싶어도

차갑고 달달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도

칫솔이 달아서 새것이 사고 싶어도

불가능한 일이니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평소 같으면 육지에 내려서 직접 구매하지만

지금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캡틴이

나처럼 3개월을 넘게 참았는데

앞으로도 더 참아야만 하는 백여 명의 크루를 위해

포트 에이전트와 협의를 한 것이었다.


과정은 공유 목록에 각자 필요한 것을 기입하면

그 목록을 포트 에이전트로 넘기고

몇 주 후에 배로 보내주는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온라인 쇼핑의 위시 리스트 같은

Ship Chandler List가 탄생했다.


Chandler List의 일부


23장이나 되는 리스트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세탁 세제, 샴푸, 칫솔, 데오드란트,

과카몰리 및 살사 소스, M&M 초콜릿,

제로 칼로리 맥주, 물병, 운동화 등등.


사진에는 없지만 비타민 및 핸드폰까지

별의별 것들이 다 있었다.


꿈같은 “쇼핑”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가능성이 크고

기입한 것이 반드시 배송될 것이란 보장도 없고

얼마나 가격이 불려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필리핀 온라인 쇼핑 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는 제품의 이름을 자세히 적고

수량 또한 굉장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다.


나는 한국의 맛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컵라면과

유일하게 찾은 한국제 군것질거리를 적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안 올 수도 있겠구나 하고 포기했던 찰나

4일 전 모든 물건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았고


이날 드디어 소독 및 격리를 마친 물건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짜잔~~~~~~~~~


너무 들뜬나머지 언박싱 영상까지 찍을뻔했다.


주문한 것이 맞을까 걱정까지 하며 열었다.


얼마 만에 보는 메이드 인 코리아인가!?!?!?


내가 평소에 즐겨먹는 브랜드도 아니지만

계란 넣고 팔팔 끓여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만 분의 일이라도 한국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활어회랑 족발이라도 먹는듯한 들뜬 기분으로

컵라면 두 개를 쓱싹 깔끔히 비워버렸다.



사실 평소에는

한국음식에 목메지 않기 때문에 어디 가도 잘 먹고

필요한 것이 없으면 굳이 쇼핑을 하지도 않고

20살 적부터 향수병 같은 건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3개월이 넘도록 육지를 못 밟고

9개월이 다되도록 한국땅을 밟지 못한 지금은


한국 음식 냄새만이라도 좋으니 맡고 싶고

다리가 아프도록 쇼핑몰을 걸어 다니고 싶고

어떤 한국인이든 만나서 한국어로 수다 떨고 싶다.


그리운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참으로 많지만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장대한 바다 위에 있는 것만으로 감사한다.






98일 차 - 6월 21일



All by myself

Don’t wanna be

All by myself anymore


나는 혼자야

더 이상 혼자이고 싶지 않아



라고 진짜 이런 슬프디 슬픈 생각을 한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붙어 지내던 절친 마리나가 떠났으니

이제는 혼자라며 친구들이 나를 놀리려고

아침 일찍부터 농담 삼아 녹음한 것이었다.


1970년대에 Eric Carmen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을

모티브로 작곡한 곡으로


많은 아티스트들이 리메이크했고

1990년대에 Celine Dion

리메이크해서 더 유명해진 곡이기도 하다.


친구들이 나를 놀려보려고

하루 종일 몇 번이고 버튼을 눌러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결국에는 제풀에 꺾여

너무 슬픈 가사와 인상 깊은 노래 때문에 쳐진다며

저녁 무렵에는 다른 노래를 녹음했다.


이런 농담 따위가 통하지 않는

365일 바쁘게 전 세계를 넘나들던 비행기와 배가

바이러스 걱정 없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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