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99~100일 차>
99일 차 - 6월 22일
식음료 부서 중 음료 파트의 포지션이다.
와인 부서, 즉 소믈리에는 별도로 나눠지는데
바 60여 명과 와인 20여 명을 합하면
약 90명이 정상 운영 인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부서가
Essential Manning (최소 운영 인원)만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90명이 아닌 단 1명이 일을 하고 있다.
바로 내 친구인
선내에는 2천 명의 승객과 천명의 크루는 아니지만
아직 216명의 크루가 있다.
정상 업무와 비교하면 누워서 떡 먹기이지만
아직 216명을 위한 서비스와
바와 와인 관련된 모든 것은 점검 및 유지해야 한다.
이를테면,
[ 크루 바 오프닝 ]
맥주잔 및 와인잔 같은 각종 유리잔과
오프너 및 지거, 믹싱 스푼 같은 각종 용품 준비와,
30가지가 넘는 무알코올 및 알코올 음료와 담배의
재고를 확인하고 충분한 수량을 유지해야 한다.
[ 크루 바 운영 ]
바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POS(Point of Sale)라는 시스템에 입력한다.
주문받은 음료는 바로 카운터에서 서빙하고,
유리잔은 식기세척기로 유리병은 쓰레기통으로 등
항상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 크루 바 클로징 ]
그날 판매한 것에 대한 총명세서를 출력하여
재고를 확인하고 다음날 주문할 수량을 정한다.
준비했던 모든 용품과 음료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깨끗이 정리하고 청소한다.
열개 정도 되는 냉장고 및 창고를 자물쇠로 잠근다.
[ 바 관련 시설과 창고 확인 및 유지 ]
매일 모든 바 시설이 잘 보존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매주 창고에 있는 재고가 정확한지 확인한다.
나열하지 않은 내가 모르는 업무까지 포함하면
아무리 17년 배테랑이라 할지라도
혼자보다는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것이 훨씬 낫다.
그래서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내 업무 시간이 끝나고 저녁에 바로 갔다.
바에는 어떤 음료가 있는지
30가지가 넘는 그것들이 다 어디에 있는지
POS 시스템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어떤 음료를 어떤 이름으로 입력하는지 등
여러 가지를 배우고 익혀야 했다.
이런 비슷한 업무를 평생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5년 정도 레스토랑과 바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무엇이든 새롭게 해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자처해서 도와주겠다고 온 나를
응원(?)해주겠다며 와인 마시러 온 친구들이다.
그래.. 굉장히 고맙구나..ㅎㅎ
100일 차 - 6월 23일
우리 오늘 100일 되었어요
사귄 지 100일 뭐 그런 달달한 100일이 아니고
받아주는 데가 없어서 바다에만 떠 다니느라
그래서 육지를 못 밟아본, 그런 웃픈 100일이다.
배에 탄지는 264일이고
배에서 내려보지 못한지는 100일이다.
너무 힘들고 지치고 우울하고 등등
뭐 그런 부정적인 감정 따위는 사실 하나도 없다.
견딜만하고 나름 잘 지낸다.
그래도...... 일 년이 365일이다.
무지하게 유니크한 경험이긴 하다.
특별한 경험이니만큼
이날 저녁 따라 유난히도 석양이 아름다웠다.
신비로운 석양빛을 뒤로하고
두 번째 바 출근이다.
선내에는 100가지가 넘는 와인이 있다.
부담 없는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와인부터
한잔에 몇십 만원 하는 최고급 와인까지 다양하다.
소믈리에들이 어떻게 다 기억하는지 참 신기하다.
그중 부담 없는 두 와인을 골라
바에 모인 크루들끼리 우리들의 100을 기념했다.
[ 칠레산 아니케나 말벡 ]
풀바디에 가깝고 드라이한
산도와 타닌이 그리 강하지 않은
플럼과 블랙 후르츠 향이 나는 레드 와인.
[ 뉴질랜드산 랜드메이드 소비뇽 블랑 ]
드라이하고 산도가 강한
시트러스와 트로피칼 향이 나는 화이트 와인.
이에 어울릴만한 양고기나 새우요리는 없지만
허다 못해 치즈나 크래커조차도 없지만
적당한 신맛이 안주 없이도 편하게 즐길 수 있었던
100일 기념 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