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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Jul 03. 2020

엘리자베스,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101일 차>


101일 차 - 6월 24일


전날 밤에 캡틴에게 연락이 왔었다.


중요한 업데이트가 있으니

다음날 오전 10시 반에 극장으로

한 명도 빠짐없이 전원 모이라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정말 모르는 새로운 내용인 건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 괜히 드라마는 아닌지

모두들 궁금해하며 모여들었다.


완전 새로운 업데이트였다.



We’re finally heading to our home port,
Southampton!!



우리 배가 드디어 사우샘프턴으로 가는 것이다.


격리생활이 시작되고 나서

다른 두 배는 이미 사우샘프턴으로 간지 오래였다.


세계일주 크루즈를 하며 호주에 있던 퀸 매리 2는

영국과 유럽 승객의 하선을 우선시하여

일찌감치 사우샘프턴으로 갔었다.


유럽 크루즈를 하던 빅토리아도

비교적 큰 문제없이 사우샘프턴으로 돌아갔었다.


당시 퀸 엘리자베스, 우리는 시드니에 있었다.


이후 우리의 일정은 호주와 뉴질랜드 노선,

싱가포르 및 홍콩 등을 걸쳐 한국과 일본 노선,

미국을 걸쳐 캐나다와 알래스카 노선이었다.


선사가 최악을 대비하여 결정했다면

우리도 아마 진작에 사우샘프턴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팬데믹이 진정되지 않아 노선이 다 취소될지

그래서 하루빨리 크루들을 집에 보내야 할지

한 달이 걸리더라도 보다 수월한 업무를 위해

비싼 기름을 써서라도 사우샘프턴으로 가야 할지....


최악만을 대비하기에는 놓치기 힘든 희망이 있었다.


팬데믹이 진정되어 국경 봉쇄가 풀릴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크루즈를 재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희망적인 가능성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기에

선사 입장에서는 무언가를 결단하는 것이

참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글래드스톤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호주와 뉴질랜드의 국경 봉쇄로 인해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었었다.


이후 크루 인원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필리피노 크루를 귀환시키고자 마닐라로 향했었다.


그 사이 상황은 악화되었고

배는 최소 운영 인원만 남기기 위해

8백여 명에 가까운 크루를 귀환시키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진작부터 사우샘프턴으로 갔었다면

마닐라에서 두 달이 넘게 고생을 하면서

시간과 돈을 소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영국은 매번 약속을 안 지키거나

무리하게 일방적 요구를 해오거나 하지 않을 것이고

항공편을 수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고

본사와의 협력이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데믹이 이렇게까지 악화될 것이라고

그 누가 알고 대비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때때마다 최선을 다한 결정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지금에라도 집으로 간다니

갑작스럽지만 여러모로 좋은 소식이었다.



The crew couldn’t repatriate so far,
you will fly to UK within 2 days.



Russian, Ukrainian, Nigerian, Nicaraguan,

Grenadian, Kenyan, Mauritian,

Saint Lucian, Colombian,

총 26명이 항공편이 없어 귀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항공편 및 본국 허가 문제 등으로

귀환이 어려워 계속 기다리고 있는 크루들이다.


영국은 항공편이 훨씬 더 많고,

퀸 매리 2와 빅토리아에 있는 크루를 합쳐서

전세기를 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그들을 하루라도 빨리 영국으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오늘 당장 항공편을 마련할 것이고

이틀 안에 하선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갑작스럽지만 나름 괜찮은 소식이었다.



The ship will be anchored in Singapore
for restoring.



싱가포르에 물류 목적으로 들른다는 것이다.


원래는 지난 4월에 갔어야 할 항구이다.


한국과 일본 노선을 시작하기 전에 들르는 거점으로

수개월 전에 이미 많은 주문을 해놓았던 항구이다.


3개월이나 지난 지금에야

취소 및 반품하지 못해서 파기하지 않았던 것들을

배로 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새롭게 주문한 유류와 선용품을 비롯해서

식료품도 함께 들이게 된다.


우리들 손안에 당장 뭔가 쥐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배 안에 식료품이 들어온다는 소식은

식사 메뉴가 업그레이드되거나

간식거리가 늘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남아있는 크루들에게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



The ship will sail through Suez Canal.



수에즈 운하를 지나간다는 것이다.


아직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이 수없이 많지만

크루즈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그중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이

지난 이맘때 즈음 지났던 파나마 운하.


좁은 수로와 수문을 지나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가로질렀던 80km는

꼭 한번 다시 해보고 싶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번에는 수에즈 운하란다!!


이미 가본 항해사 친구들은

황량한 사막뿐이라며 지루하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흥분되는 소식이었다.


2019년 7월 16일에 지난 파나마 운하
2019년 7월 16일에 지난 파나마 운하
2019년 7월 16일에 지난 파나마 운하
2019년 7월 16일에 지난 파나마 운하


캡틴과의 미팅 이후에

갑작스러운 하선 준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후에 더 갑작스러운 소식이 있었다.


에센셜 매닝​인 필리피노 크루 중

11명을 하선시킨다는 것이었다.


마닐라를 떠난 이후에는

필리피노를 귀환시키려면 많은 비용이 드니

그전에 마닐라에서 추가로 하선시키려는 의도이다.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보느라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그 과정을 모든 크루에게 공개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일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진행된 것이라

우리는 그저 이해해볼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일을 잃고 집에 가야 한다는 소식에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크루도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이다.


코로나 쇼크다.


Out of control.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


비록 9개월 동안 배에 있어 힘들고 지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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