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102~103일 차>
102일 차 - 6월 25일
이틀에 걸쳐 하선과 승선이 동시에 이뤄졌다.
전날 갑작스럽게 통보받은 필리피노 11명과
필리핀 거주 브리티시 1명,
교체가 예정되어 있던 필리피노 19명,
그리고 그동안 항공편을 마련하지 못했거나
본국이 받아주지 않아 귀환시키지 못했던
일단 영국으로 보내지는 러시안 2명,
총 33명이 하선했다.
영국으로 가는 크루들은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 도착함과 동시에
사우샘프턴에서 있는 퀸 빅토리아로 가게 된다.
퀸 빅토리아에서는 개인실에서 격리될 것이며
본사가 직접 항공편을 준비하게 되며
마련되는 대로 귀환시킬 예정이다.
하선이 끝나니 승선이다.
이미 몇 주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승선이다.
테크니컬 부서의 필리피노 크루를
교체하려는 목적이다.
이미 많은 크루들이 장기간 동안 일했기 때문에
그중 몇 명을 교체 가능할 때에 해놓자는 의도이다.
그들은 이미 검사를 마치고 음성 결과를 받아
항구 근처 호텔에서 승선 대기를 하고 있었던
총 20명의 크루이다.
그중 18명의 필리피노 크루가 먼저 승선했다.
승선한 크루들은 곧바로 격리되었다.
14일 후에 격리 해제되면 정상 근무를 하게 된다.
정신없었던 승하선 업무를 마치고
방에서 쉬고 있는데 무지개가 보이는 듯했다.
발코니에 나가보니 뚜렷하지는 않지만
빗줄기 틈을 비집고 나온 커다란 무지개가 보였다.
우리가 간다니 무지개 선물을 주는 건가.
이별 선물이니.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그랬니....
바텐더 업무까지 마치고
밤 11시가 다되어서 방에 들어왔다.
샤워까지 하고 침대에 누우려니 12시가 넘었었다.
그런데 불현듯 갑자기 든 생각.
이제 마닐라 밤도 마지막인 거야!?!?
그렇게도 떠나고 싶었던 마닐라이거늘
왠지 모를 아쉬움에 사로잡혀
그래도 마지막 밤인데 밤 산책은 해야지 싶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픈덱으로 올라갔었다.
마지막이라고 해서
마닐라 밤이 라스베이거스 밤 같을 리 만무하다.
그저 두 달 동안 내내 느껴왔던
눅눅하니 덥기만 한 밤공기였다.
그래도 평생 언제 다시 겪을까 싶은 값진 경험을 한
살면서 두고두고 생각날 곳임에는 틀림없다.
103일 차 - 6월 26일
전날에 이어 2명 더 승선했다.
테크니컬 부서의 필리피노 크루 1명과
오스트레일리안 너스 1명이다.
그들도 전날의 18명과 동일하게 바로 격리되었다.
다음에는 마닐라 마지막 하선 작업이었다.
추가로 귀환하게 된 인디안 2명과,
본국이 아니라 영국으로 보내지는
나이지리안 1명, 니카라구안 1명, 케니안 2명,
세인트 루시안 1명, 그레나디안 1명, 모리시안 17명,
러시안 1명, 우크레이니안 1명, 콜롬비안 1명,
총 28명이 하선했다.
하선 작업은 다들 도가 터서인지
마지막을 빨리 마무리하고 빨리 떠나기 위해서인지
정말 최고로 빠르게 끝났다.
지긋지긋했던 텐더링 하선도 이제 끝이다.
저 멀리 항구를 향해
바다 위를 달리는 텐더 보트를 보고 있자니
마지막이 뭐라고 괜히 달라 보였었다.
항구에 나갔던 텐더 보트가 돌아왔으니
이제 우리 엘리자베스가 달릴 때가 왔다.
떠날 때가 되니 여기저기서 뱃고동을 울리며
우리 엘리자베스를 배웅해줬다.
이날을 기준으로 크루즈선만 31척이 있었다.
어디서 온 누가 얼마나 왜 타있는지도 모르면서
떠난다는 게 뭐라고 괜히 아쉬웠다.
앞으로 이런 광경을 볼 날이 있을까.
절대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다.
언뜻 보면 마냥 멋있는 사진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바다에 갇힌
수십만 명에 달하는 크루의 희로애락이 담긴
길고 긴 코로나 쇼크 드라마다.
153명의 크루를 태운 우리들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69일 동안 머물렀던 마닐라를 뒤로하고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마닐라 - 싱가포르 - 수에즈 운하 - 사우샘프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