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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Jun 14. 2020

고스트쉽 아니고 크루즈쉽

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84~87일 차>


84일 차 (코로나 의심증상 격리 6일 차)  - 6월 7일


밴드 멤버 중 혼자만 남아 늘 쓸쓸해 보였던

불가리안 기타리스트 긴 머리 아저씨와

브리티시 닥터 제임스,

총 2명이 하선했다.


닥터는 최장 3개월까지만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프린세스 크루즈의 배에 있던

사우스 아프리칸 닥터가 우리 배로 트랜스퍼하여

제임스를 릴리스해준 것이다.


나도 3개월 컨트랙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8개월 하고도 9일째 되는 날이다.







85일 차 (코로나 의심증상 격리 7일 차)  - 6월 8일


스페인, 칠레, 콜롬비아, 페루,

모리셔스, 사우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세인트 루시아, 마세도니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말레이시아, 인디아, 등등


귀국하기 까다로운 국적의 크루들이

아직도 많이 100여 명이 남아 있다.


평소 같으면 항공편을 예약하고

공항에 가면 그만인 것을,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놓고

대사관 및 현지 에이전트, 항공사 등의

답변과 처분을 기다리는 일이

기다리는 크루에게도 준비하는 우리에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날은 그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하고

독촉 전화와 메일만 하루 종일 하는 날이었다.


그 와중에 기다리는 크루들은

우리를 독촉하러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온다.


몇 번이나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겠니.

우리가 아니고, 너네 나라가 문제라니까.

그만 찾아와라 제발, 같은 말 반복하기 지친다.







86일 차 (코로나 의심증상 격리 8일 차)  - 6월 9일


잠들기 전에 찾아온 목과 어깨의 통증이 심해서

두 시간도 못 잔 채 아침 6시에 출근해야 했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또 준비하고 또 기다리던

인디안 크루 하선이 시작된 날이다.


전세기냐 전세선이냐 절차가 복잡하고 길었지만

결국에는 전세기로 결정되었고,


이날이 우리 배에서는

처음으로 인디안 크루를 전세기로 보내는 날이었다.


크루즈에서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은

크루즈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현장에서 귀환 업무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의 연속이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전세기나 전세선으로 밖에 귀국할 수 없는 크루들이

힘겹게 그 귀환에 성공했을 때의 그 안도감,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9명의 인디안 크루가 무사히 하선했고

전세기를 타고 인디아로 집으로 향했다.



하선 작업을 마치고 메디컬 센터에 가서

진통제와 연고를 처방받아 오피스로 돌아왔다.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오피스에 앉아서 살살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우스키핑 매니저 올가가

객실의 TV 리모콘 수백 개를 가지고 왔다.


객실의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는 중인데

심심할 때 닦아 달라며 가져온 것이었다.


리모콘이 더럽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버튼 사이사이 먼지가 오랫동안 앉아 있어

브러시로 한참을 제거하고 닦아야 했다.  


하여튼 다른 부서들은 이상하게도

우리 부서를 가만 두지 못한다.


오피스에서 하는 일이다 보니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는 줄 안다.







87일 차 (코로나 의심증상 격리 9일 차)  - 6월 10일



마음과 다르게 실천하기 참 힘든 것이 있는데

나에게는 운동이다.


목과 어깨의 통증을 계기로

게을리하던 운동을 다시 시작해보고자

오픈덱을 걸으러 나갔었다.



한 시간의 운동을 마치고 오후에 출근했는데

로비가 깜깜했다.


선사가 정상 운영을 못하여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으니

적극적으로 전력 절약을 해야 한다며

얼마 전 캡틴이 방송을 했다.


백 번 천 번 옳은 말이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비는 중앙 부분의 몇 라이트와

비상용 라이트로 겨우 주변을 밝히는 정도였다.


오피스에서도 절반의 라이트만 사용했다.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고

절약이 중요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저녁에 출근했는데

로비가 우리 데스크가 완전 깜깜했다.


오후 때보다도 라이트를 더 꺼버린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오피스로 가는 길은

사실 1분도 안 되는 정도이다.


그 짧은 몇 초가

마치 고스트쉽에 온 듯 오싹해졌다.


근무 시간 중 저녁 9시부터 밤 12시까지는

혼자 오피스에 있게 된다.


평소 같으면 동료도 매니저도 있지만

지금은 최소 운영 인원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바쁘지 않은 시간대에는

의료 및 각종 긴급 상황에 대비하여

한 명만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오피스 바깥이 환해도 가끔씩 무서울 때가 있는데

지금은 멀리 있는 엘리베이터 말고는 시커먼 것이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오피스 안쪽 문을 닫아 버리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3시간이 30시간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 1월의 로비
지난 1월의 퍼서즈 오피스


평소 같으면 2천 명의 승객과 천명의 크루로 붐비는

어디를 걸어도 사람을 안 만날 수가 없는

활기롭고 바쁜 크루즈쉽이다.


그런데 지금은 3백 명의 크루만 남아 있는

어디를 걸어도 사람을 만나기가 힘든

게다가 이제는 라이트까지 꺼버려서

시커멓고 오싹한 고스트쉽이 되어버렸다.


고스트쉽이 아닌 크루즈쉽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가 잘 견딜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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