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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삿날, 다시 그분들을 생각한다

《내 삶을 뒤흔든 찰나의 기적들》 21화

by 수미소

시작은 작았다.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장면 하나, 바람에 스쳐간 기억 하나가
글이 되고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게 쓰다 보니 내 삶 속의 ‘찰나의 기적들’이 한 편씩 쌓여
이제는 한 권의 이야기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이야기의 문을 연다.


제삿날은 언제나 조금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방바닥을 쓸고, 상을 닦고, 음식의 간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손끝이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마음속은 늘 한결같다.
‘오늘만큼은 허투루 해서는 안 된다.’
비록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분들을 맞이하는 마음만큼은
그때의 예의를 잃지 않으려 한다.

상 위에 놓인 전과 나물, 조기 한 마리와 소박한 탕국.
그 모든 음식이 완성되면 자연스레 그 시절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
허리가 굽은 채로 조심스레 불을 지피던 할머니.
그 두 분의 모습이 마치 연기처럼 피어올라 방안을 가득 채운다.

어릴 적에는 제사가 그저 번거로운 날이었다.
왜 매년 이렇게 많은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왜 그렇게 무겁고 조용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
그 예의와 절차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려는 마지막 존중이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늘 남보다 뒤에 서 계셨다.
성실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능력에 비해 세상은 너무 냉정했다.
그럼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가족을 지켰다.
한때는 그런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강함이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끝까지 버틴 사람.
그게 아버지였다.

제사상을 앞에 두고 절을 하다 보면,
가끔은 마음이 아리다.
‘그때 조금 더 따뜻하게 말을 걸었더라면,
한 번이라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했더라면….’
늦은 후회가 뒤늦게 가슴을 적신다.
살아 있을 때는 그저 당연하게만 느꼈던 일들이
이제는 죄송하고, 고맙고, 아프다.

그리고 그 곁에는 언제나 할머니의 그림자가 겹친다.
가느다란 손으로 방바닥을 쓸며,
“이 날만큼은 정갈해야지.” 하시던 목소리.
할머니는 늘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 엄격하게
그 예의를 지켜내셨다.
아버지도, 나도, 결국 그 마음을 물려받았다.

이제는 제사상이 끝나면 잠시 마당에 나가 하늘을 본다.
별빛이 드문 밤이면, 그 두 분이 마주 앉아
서로 웃고 계신 모습이 그려진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허리도 굽지 않고,
삶의 무게도 내려놓았기를 바란다.

내겐 아직도 제삿날이 단순한 의식이 아니다.
그건 기억을 다시 살려내는 의식이며,
그리움을 새로 덧칠하는 시간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그 품 안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를
되새기는 순간이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그리 크지 않은 자리에서 살다 가셨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그분이 남긴 성실함과 조용한 품격이
내 삶의 밑바탕이 되어 있다.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그분의 예의와 정갈함, 그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던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도 향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절을 마친 후, 나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버지, 할머니, 고맙습니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마 그분들도 알고 계시겠지.
삶이 아무리 멀어져도,
그리움은 이렇게 매년 되살아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시리즈의 끝이 곧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누군가의 삶 속에서도, 또 다른 기적의 순간이 피어날 테니까.

《내 삶을 뒤흔든 찰나의 기적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이야기는 잊히는 것들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삶의 순간들’을 기록한 한 사람의 기억입니다.
만약 이 글이 당신의 마음에도 작은 온기를 남겼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기적일 것입니다.

– 인생주방장, 수MI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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