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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Dec 31. 2017

바르셀로나에서 가방을 잃고 나는 쓰네

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추억하며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나선 아침,

문득 폴 오스터의 단편소설인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떠올랐다.

담배가게 주인인 오기 렌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가게 앞 똑같은 자리에서 거리의 모습을 찍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이 어느덧 4천 여장이 넘은 그에게 문득 소설가 폴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자 오기는 자신의 카메라와 크리스마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오기의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도망가면서 지갑을 떨어트렸는데, 지갑 속에는 도둑의 신분증과 그가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할머니의 사진을 본 오기는 경찰에 신고할 마음을 접고 얼마 후 성탄절에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신분증의 주소로 찾아간다. 그곳에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할머니만 있었는데 오기를 자신의 손자라고 생각한 그녀는 그를 집으로 들여 함께 음식을 나누고, 오기 역시 모른 척하며 할머니와 정겨운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할머니가 잠든 후 집에서 나오려던 오기는 카메라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것 역시 훔친 물건일 것이라는 생각에 슬며시 가지고 나온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카메라를 돌려주기 위해 그 집을 찾아갔을 때는 할머니도 이미 이사를 간 후였다. 이후 오랜 시간 오기는 계속 사진을 찍으며 카메라와 그렇게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는, 사실인지 꾸며낸 것인지 알 수는 없는 소박한 이야기가 소설의 전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였다.

더블린의 추위를 피해 좀 더 따뜻한 스페인에서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떠나온 여행. 사흘 내내 하늘은 맑고 날은 더없이 포근하고,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들은 가슴 뭉클할 만큼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그러나 엊그제 당한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우리 가족은 깊은 혼란에 빠졌고 그 여파로 성탄의 감격과 여행의 여흥을 잠시 잊은 채 마드리드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던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그놈의 바다였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지 사흘 째 되는 날, 전날 다녀온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느낀 전율의 여운이 여전히 가시지 않아, 다음날도 가우디의 건축물을 계속 감상하기로 한 우리는 이른 아침 구엘공원을 산책 삼아 휘휘 돌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다음 행선지인 까사밀라와 까사 바뜨요로 향했다.

여행 다니면서 아이들을 갤러리나 뮤지엄에 데리고 가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녀석들이 오디오 가이드에 한번 맛을 들인 이후로 신기하게도 여행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까사 바뜨요에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마련되어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의미 있게 가우디의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어느 성당보다도 따뜻함이 느껴졌던 자연 가득한 가우디의 사그리다 파미리아 성당.
이른 아침 산책하기에 좋은 구엘 공원
까사 밀라
밖에서 바라본 까사 바뜨요
까사 바뜨요에서 오디오 가이드에 열중하고 있는 남매

역시나 가우디의 창의력에 감탄하며 나와보니 아직 이른 오후였다. 신이 난 김에 남편과 나는 피카소 갤러리까지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우선 바닷가에서 바람도 쐬고 아이스크림도 먹으며 한숨을 돌리기로 했다. 일곱 살과 열 살인 남매와 여행을 다니면서 는 것은 밀당의 스킬이랄까. 언제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물을 항상 준비해두고, 컨디션이 괜찮아 보일 때는 우리 부부가 꼭 가고 싶은 장소로 끌고 가고, 슬슬 찡얼거리기 시작할 때는 아이스크림이든 초콜릿이든 당근을 쥐어주며 달래야 한다. 또 이따금씩 놀이터가 보이면 실컷 놀게도 해주고, 간간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행사나 장소가 있는지 때마다 체크를 하는 것은 필수다.

바르셀로네타 해변

어쨌든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리고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나가보니 몸도 마음도 스르르 풀어졌다.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남편의 배낭에서 물과 바나나를 꺼내 오후의 허기를 달래고 나서 딸내미와 슬슬 모래사장을 밟으며 바다로 걸어가 보았다. 자, 이제 도심을 벗어나 수평선을 보며 힐링을 할 시간이었다. 한 열일곱 발자국쯤 떼었을까?

"당신이 내 가방 가져갔어요?"

벤치에 앉아있던 남편이 갑자기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무슨 장난을 하나 싶어 돌아봤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남편과 아들 녀석이 의자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가방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보고 벤치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불과 10초 사이였을까?

드넓은 모래사장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봐도 어떻게, 누가 가져간 것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안에 별거 안 들었죠?"

스페인은 소매치기가 워낙 유명하다는 소문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우리는 여행 가기 전에 단단히 계획을 짜 놓았다. 지갑이며 여권, 핸드폰은 항상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배낭이나 핸드백은 절대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고, 넷이 서로 오고 가며 가방을 지켜보기로 약속을 해둔 터였다. 그런데 여행 나흘 만에 긴장이 풀어진 탓이었을까. 간식을 꺼내 먹느라 가방을 버젓이 풀어서 옆에 내려놓은 것도 모자라, 여권은 가방 안에 몽땅 들어 있었고, 때마침 남편은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해 가방에 넣어놓은 상태였다고 했다.

정리해보니, 가방 안에는 우리 네 사람의 여권과 남편의 핸드폰, 충전기 두 개, 마드리드로 갈 기차표와 더블린으로 돌아갈 비행기표, 숙소 예약 문서를 출력해놓은 프린트물, 그리고 삶은 계란 네 개와 머핀 두 개, 물병 두 개가 담겨 있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놈은, 아니 어쩌면 놈들은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되었을 테니 우리가 그들을 직접 찾는 일은 불가능했다. 일단 가장 가까운 인근의 경찰서를 물어 찾아갔다. 지나고 보니 경찰서에 가장 먼저 간 일은 그중 잘한 일이었다. 해외에서 여권을 잃어버렸을 경우, 다시 공항에서 출국과 입국 수속을 밟을 때 경찰서에서 작성한 신고 문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찰서 직원은 이런 일이 워낙 흔한지 그다지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가 하는 얘기를 아주 차분하게 듣더니 혹시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순간 우리는 당시 자전거를 끌고 옆에 지나가던 사람, 전화를 걸고 있던 한 여자 등 몇몇 사람을 용의자로 의심해봤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경찰들은 이미 용의자들의 사진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해외에서 여권이나 물건을 소매치기당했을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가까운 경찰서에 갈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범인의 인상착의를 기억해둘 것. 그리고 핸드폰의 모델과 기계 버전, 일련번호 등을 미리 메모해 두는 것이 좋다. 아무리 소매치기를 당했더라도 다시 그 기계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두는 것이 안전하다. 또 하나 내가 잘 한 일은(누구나 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여권의 사진을 미리 찍어둔 것이었다. 번호를 적어두거나 기억하면 더욱 좋지만, 경찰에 신고할 때나 나중에 다시 임시여권을 만들 때 여권번호는 반드시 필요하고, 주민등록번호와 여권 발행일과 만료일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사진이 있는 앞면을 찍어두면 요긴하다(사진이 담긴 핸드폰을 분실하면 말짱 꽝이지만). 우리와 같은 가족 여행의 경우 가족관계 증명서까지 사진자료로 갖고 있다면 임시여권을 만들 때 더 용이하다. 다행히 분실되지 않은 나의 핸드폰에는 더블린으로 떠나오기 전에 미리 찍어놓았던 우리 가족 모두의 여권 사진이 담겨있었다.


경찰 접수를 마치고 숙소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머리 속이 하얘졌다. 일단 인터넷이 가능한 남편의 핸드폰은 사라졌고, 내 핸드폰은 유심을 구입하지 않은 상태라 밖에서는 구글맵도 대중교통 안내도 사용이 불가능했다. 이곳까지 왔던 기억과 숙소의 위치를 떠올리며 일단은 지하철을 타러 역으로 내려갔다. 지하철 안에 자리를 잡으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엄마 아빠의 정신없는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며 지켜만 보고 있던 아이들은 그제야 사태에 대해 하나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빠의 가방도, 핸드폰도, 자신의 물병도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딸아이가 갑자기 지하철 안에서 훌쩍훌쩍 우는 것이 아닌가. "괜찮아 잘 될 거야~" 하며 겨우겨우 달래면서 밖을 보니 열차는 어느덧 우리가 내려야 할 역에서 멈춰있었다. 그리고 열렸던 문은 곧 닫힐 타이밍이었다.

"내려야 하는 거 아냐?" 벌떡 일어나서 문 앞으로 달려 나가는 중에 그나마 우리 가족 중 가장 재빠르고 날씬한 딸아이가 말릴 틈도 없이 제일 먼저 문 밖으로 폴짝 뛰어나갔다. 그런데 나머지 셋을 열차 안에 남겨둔 채 문은 닫히려 했다. 남편과 나는 팔과 어깨를 문 사이로 밀어 넣었고, 남편은 순간 헐크처럼 문을 찢을 듯 열어젖혔다. 다행히 문은 다시 열렸고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나간 우리 셋은 누구랄 것도 없이 딸아이를 부둥켜안았다. 놀란 딸아이가 다시 엉엉 울기 시작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 차려! 여권은 다시 만들면 돼! 지갑은 다행히 안 없어졌잖아! 핸드폰이야 싼 거로 사면되지! 우리 가족 건강하면 된 거야! 정신 차리자고!"


서로를 다독이며 지하철 통로를 나서는데 조그만 핸드폰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내 핸드폰에 새 유심을 구입하고 숙소 이름을 떠올리려는데 아들 녀석이 재킷 속주머니에서 숙소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꺼낸다. 혹시나 길을 잃을 것에 대비해 넣어준 것을 용케도 기억해 낸 것이다. 덕분에 숙소로 가는 길을 쉽게 검색할 수 있었다. 그나마 모든 여행 일정과 계획을 나와 남편의 아이폰 메모장에 공유해 놓은 덕분에 여행에는 차질이 없을 듯했다.

세상에, 핸드폰과 구글이 없었던 때는 도대체 어떻게 여행을 다녔던 걸까. 모든 것을 문명에 의지하게 된 우리 처지가 새삼 안쓰러웠다.


숙소로 돌아와 보니 이런! 숙소의 열쇠도 그 가방에 넣어놓은 것이 떠올랐다. 호텔 직원에게 사정을 얘기하니 안타깝게 우리를 바라보며 무료로 마스터키를 건넨다. 그리고 잃어버린 기차표와 비행기 관련 서류도 프린트해주겠단다. 힘든 일이 있을수록 주변의 작은 도움이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일단은 스페인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고, 그다음은 아일랜드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해야 했다. 우리는 한국이 아닌, 우리가 현재 머물고 있는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일이 복잡할 수도 있었다. 때마침 크리스마스 연휴라 모두들 쉬는 시즌이고 다음날은 일요일이어서 더욱 난감했지만, 다행히 대사관에는 항상 긴급 연락처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우리가 머물고 이는 곳은 바르셀로나, 그리고 스페인 한국 대사관은 마드리드. 그러나 정말 다행히도 우리는 이미 이틀 후인 25일에 마드리도 가는 일정을 세워둔 터였다. 새로 여권을 만드는 데는 1~2시간이면 가능하니, 29일,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충분했다. 더블린 입국은 한국 대사관이 아니라, 아일랜드 이민국 소관이라는 사실이 문제였지만, 우리는 아일랜드에서 만든 일종의 외국인 비자이자 카드인 GNIB를 잃어버리지 않은 상황이라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급한 일들을 어느 정도 처리하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얼른 쌀을 씻어 밥을 짓고 카레를 만들어 네 식구 먹고 나니 이번에는 피곤이 몰려왔다. 한시름 돌리고 쉬려는데 별안간 아이들의 푸념이 시작되었다.

“소매치기 정말 나쁘다! 난 이제 스페인이 무서워졌어!”

역시나 경험이 중요한 법이다. 사실 나는 가방을 잃어버린 것 말고는 여행의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지만, 아이들의 눈은 조금 달랐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돈을 달라고 하는 거야? 도둑질은 도대체 왜 하는 거야?"

유럽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얘기를 처음 들은 것도 아니고, 버스킹을 하거나 호객행위를 하는 이들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우리가 만난 이들이 더 노골적으로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오전에 잠시 거리에서 쉬고 있을 때도 삐에로 분장을 한 나이 든 여성이 다가오더니 순식간에 딸아이에게 자신의 머플러를 둘러주며 나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손짓을 했다. 싫다고 하기엔 아이의 표정이 너무 밝아서 한 장 찰칵 찍었더니 머플러를 풀기가 무섭게 돈을 내놓으란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1유로 동전을 건네었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동전을 모두 모아 1유로를 더 주었더니 그제야 새초롬하게 자리를 떠났다.

몬주이크 분수대에 갔을 때는 장난감을 파는 아저씨들이 산다는 얘기도 안 했는데 아예 아이들 앞에 두 개를 내려놓고는 흥정을 해댔다. 오히려 아이들이 한국말로 "엄마 안 살 거야. 안 사고 싶어."라고 외치는데도 계속 안 가고 부탁하는 것을 거절하기가 민망해서 어쩔 수 없이 돈을 주기도 했다.

바르셀로나 대성당 앞에서는 비눗방울을 펼치던 남자를 보고 우리 아이들이 잠시 멈춘 적이 있었다. 비눗방울에 달려든 것도 아니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만 하고 있는 아이들과 성당 앞 거리의 풍경을 찰칵 찍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손짓을 해대는 것이 아닌가. 자기 동전통에 돈을 넣으라면서 한동안 시위하듯 나를 쏘아보았다. 베를린이나 런던에서도 비눗방울 놀이를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이 한참을 신나게 뛰어논 후 흥겨운 마음에 기꺼이 동전을 건넨 적은 있었지만, 이토록 황당하게 돈을 요구한 적은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나도 어이가 없어서 두 손을 으쓱하면서 그냥 뒤돌아서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가방이 없어졌을 때도 이상한 일이 있었다. 없어진 가방을 찾느라 우리 가족 모두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장미꽃 두 송이를 들고 있던 한 남자가 다가와 딸아이에게 꽃 한 송이를 억지로 쥐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어리둥절해하는 딸아이 손에서 꽃을 빼앗아 돌려주고는 그에게 경찰서가 어디냐고 물으니 가르쳐주지는 않고 묘한 웃음만 지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 사람도 우리의 정신을 분산시키려고 했던 한 패는 아니었을까?

큰돈은 아니지만 석연치 않게 여러 번 돈을 쓰고 나니 아이들도 우리 부부도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누군가 관심과 호의를 표하기만 해도 기겁을 하며 오히려 뿌리칠 정도였다.

마드리드 왕궁 앞에서 마치 사슴처럼 생긴 묘한 개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들 녀석이 탄성을 지르며 신기하게 바라보자 가던 길을 멈추고 이리 와서 만져보라고 손짓을 해주었다. 우리 가족은 어느새 개를 쓰다듬으며 진짜 개가 맞는지, 이름은 뭔지, 암컷인지 수컷인지 물어보았다.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던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사진 한 장 찍고 싶어?" 하고 묻는데 나도 모르게 "Oh No!"를 외치며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진짜 호의를 베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가방의 도난 사건 이후 우리 가족 모두 노이로제 비슷한 것에 걸린 듯했다. 아이들이 여행에 트라우마라도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 가방을 가져간 그 누군가에게도 가족이 있을 것이다.

폴 오스터의 소설 속 도둑처럼 그도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돈을 훔쳐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왜 도둑질을 하는지 묻는 아이들에게 쉽게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분명 남의 물건을 가져가는 일은 나쁜 일이고, 아마도 그들은 돈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을 거야."라고 교과서적인 대답을 하자, "그럼 부자들은 도둑질 안 해?"하고 아이가 다시 되물었다.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아니 더 큰돈을 더 쉽게 훔치는 부자들도 엄청 많지. 그리고 사실은 그들이 더 나쁘지.' 마음속의 대답을 삼키며 어떻게 설명해야 아이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10년 전 첫 아이를 낳았던 여름, 산후조리원에서 아이와 둘이 지내는 동안 남편이 직장일로 사흘 정도 집을 비우고 지방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조리원으로 달려와 아들 녀석을 만난 남편이 집으로 돌아가 열쇠로 문을 열었을 때 2층 아파트였던 우리 집 문에 걸개가 안에서 걸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들어가 안에서 잠근 것이다. 경찰을 불러 겨우 집에 들어갔을 때는 안이 완전 쑥대밭이 된 후였다. 가난한 신혼집인지라 훔쳐갈 것이 마땅치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와중에도 패물만 쏙 잘도 가지고 갔다. 때마침 임신 중이라 손이 부어서 빼놓았던 결혼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등 결혼 때 받았던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사라진 것이다. 속상해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아들을 보며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자기는 아이가 생겨서 기쁜데, 누군가는 가난한 집에 힘들게 들어와 그깟 패물 몇 개 훔치고 2층 베란다에 대롱대롱 매달려 도망갔을 것을 생각하니 그저 안타깝다고 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 지하철 역에서 헤어질뻔한 딸아이를 겨우 되찾았을 때 남편은 10년 전 그 일이 떠올랐다고 했다. 비록 물건은 잃어버렸지만 내 아이들은 무사하니 다 괜찮다고. 더 중요한 것이 내 곁에 있으니 다행이라고. 그렇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고 했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웨인 왕 감독의 영화 <스모크>의 한 장면

담배가게에서 물건을 도둑맞은 대신 도둑의 할머니와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낸 오기 렌처럼, 도둑에게서 훔쳐온 카메라로 4천 여장의 풍경과 추억을 만들 수 있었던 소박한 이야기처럼, 우리 가족도 비록 바르셀로나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그 경험을 통해 더 귀한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때마침 크리스마스이고, 낯선 나라의 정취에 들떠있는 터라 감상에 사로잡힌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스페인을 떠나올 때쯤 우리 가족은 설명할 수 없는 감사로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먹을 음식이 있다는 것이, 아일랜드에서 보낸 올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건강하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모든 것이 그저 다 감사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은 여행의 일정을 모두 잘 마치고 무사히 더블린 공항에 내리자 스페인과는 다른 익숙한 찬 공기와 빗방울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마지막 관문인 입국 수속. 새로 만든 여권과 경찰서에서 작성한 서류를 내밀며 사정을 얘기하자, 심사관은 "나도 스페인에서 당한 적이 있지, 워낙 유명하잖아!" 하고 씨익 웃으며 도장을 꽝꽝 찍어준다. 그 어느 때보다 빨리 통과한 것에 감사하며 짐가방을 찾으러 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톡톡 치며 장갑 하나를 내민다. "혹시 당신이 떨어트렸나요?"

"아뇨, 하지만 고마워요!"

따뜻한 아이리시의 호의에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이, 역시나 더블린에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오기 렌이 찍은 4천 여장의 사진들은 대충 보면 다 똑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매일 같은 시간과 장소이지만 한 장 한 장이 각각의 스토리를 가진 전혀 다른 풍경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건  그런 별 것 아닌 사진들 사이에 특별한 사진 한 두장이 섞인 사진첩 같은 것이거나, 그 모든 것을 함께 엮어야만 의미가 있는 스토리 인지도 모른다.

간혹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훅 가슴을 후려치고 지나가기도 하지만, 그 뒤에 다독다독 쓰다듬어주는 손길도 다가오듯 인생이 무어라고 딱히 정의 내리기엔 나는 아직 그 사진들을 다 모으지도,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스페인이 무섭다고 고개를 저을 지라도 몇 년이 지나면 스페인 어느 거리에서 플라멩코에 흠뻑 빠져있을지도 모를 아이들에게 무언가에 대해 대답하는 것이 더욱 쉽지가 않다.

신혼집 창가에서 매일 보던 하늘
더블린에 온 후 찍었던 뒷뜰 풍경

지난 사진첩들을 뒤적이다 보니, 언제부턴가 오기 렌처럼 똑같은 풍경을 찍는 취미가 생긴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는 그곳이 그곳같이 비슷해 보이는 좁은 골목들만 찍어대고 있었다.

한 해가 끝나고 다시 한 해가 시작되는데 평소와 똑같이 고작 단 하루가 걸린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쉬운 마음에 어느 시인의 슬픈 시를 읊조리다가 다시 나의 사진들을 펼쳐본다.

그리고 끝난 듯 하지만 다시 어딘가로 이어져 있을 그 길들이 마치 지금 내가 서 있는 인생 어디쯤인 것만 같아 그저 가만히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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