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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Nov 16. 2017

누군가의 햇살로 따뜻한 우리

지구 반대편에서의 겨울


무슨 계절을 가장 좋아해?

어릴 때는 별 고민 없이 "겨울!"이란 대답이 재빨리 튀어나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쉽사리 '겨'라는 첫 글자가 꺼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름"은 더더욱 아니고, 봄이나 가을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하며 현실 순응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선뜻 선택하기가 싫었다.

땀 흘리는 거 질색인 게으름뱅이인지라 여름이 오면 미리부터 마음은 가을을 기다렸다. 코끝 찡해지는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 알싸함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가을의 끝에 다다라 초겨울의 냉기가 얼굴을 감싸면 뭔가 짠했다. 추운 겨울 외갓집에서 날 낳느라 긴 시간 고생했다는 엄마와, 태어나자마자 감기를 호되게 앓았다는 나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가 그 짠함에 한몫을 했는지도 모른다.

지구온난화와 이상기온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날씨에 뭔가 변동이 생기면서 피부로 느끼는 계절도 여실히 달라졌다. 한국에서 보냈던 여름은 참 힘들었다. 언제부터 그리 여름이 길어졌는지, 모기는 또 왜 그렇게 많고, 에어컨을 틀어도 열대야에 도무지 밤잠을 이룰 수가 없는 데다가, 누진세가 더해진 전기요금에 경악하다 보면 긴긴 여름이 지겹다 못해 미워졌다.

여름 못지않게 길어진 겨울도 곤혹이었다. 추위를 피해 두 아이와 집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일도 하루 이틀 지나면 진력이 났고, 맘먹고 외출하여 며칠 돌아다니고 나면 아이들은 여지없이 감기를 달고 왔다. 보일러 돌리느라 겨울 가스비는 여름 전기세처럼 상승곡선을 그렸고 어느덧 나는 베란다 틈으로 삐죽 들어온 햇살을 어루만지며, 어릴 적 함께 살았던 할머니처럼 꽃 피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막 좋아지기 시작한 봄과 가을은 왔나 싶어 반기다 보면 어느새 떠났다. 계절 도둑. 마치 누군가 일부분을 훔쳐간 것처럼 싹둑 잘린 짧은 간절기로 꽃과 낙엽을 아쉽게 떠나보내야 했다.

언제부턴가 내게 계절은 때에 맞는 놀이를 즐기거나, 정취에 어울리는 시를 읽거나 음악을 듣고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기다리는 감성의 재료가 아니라, 가족에게 뭘 입히고 뭘 먹이고 뭘 줄이고 뭘 대비해야 하는지를 염려해야 하는 생존의 바탕, 현실 속 '환경'이 되어버렸다.


뜨거운 가을볕이 들 때면 서둘러 옥상에 빨간 고추를 널어 말리며 겨울 내내 먹을 김장을 미리부터 준비하던 할머니와 엄마. 김장에 사용하던 무의 청을 따로 매달아 말려 보글보글 구수한 시래깃국을 끓여내고, 찬바람 불면 이불 홑청부터 하나하나 다 뜯어서 깨끗이 빨아 그 안에 숨 막힐 만큼 두툼한 겨울 솜을 넣어 한 땀 한 땀 꿰매던 그 손길들이 떠오른다.

그녀들이라고 계절의 낭만을 모르고 아름다움을 몰랐을까.

장독 뚜껑을 열어 된장과 고추장을 푸다가도, 장독대 사이로 피어오르는 초여름의 장미 덩굴을 보며 웃으시던 할머니의 그 환한 주름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어디선가 색색가지 털실을 구해와서 너는 모자, 너는 스웨터, 너는 카디건을 짜주겠다며 해마다 쑥쑥 커가던 삼 남매의 옷 치수를 재던 엄마는, 그래도 백화점 상품 못지않게 맵시 나는 옷을 입히고 싶어서 촌스런 잡지 여기저기를 뒤져 그중에서 가장 예쁜 디자인을 고르고 골랐다. 작은 구슬이던 천 쪼가리든, 뭐든 그녀의 손을 거치고 나면 별것 아니던 잡동사니도 그럴듯한 소품이 되고 커튼이 되고 따뜻한 옷이 되었다.

그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더운밥의 온기로 배부르고, 따뜻한 옷과 두둑한 이불이 내 몸을 감싸는 것이, 누구나 거저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라 여겼었다. 게을러지는 겨울 해보다 더 일찍 일어나 자신들의 시간과 삶을 쪼개어 가족들을 위해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엄마, 아빠, 할머니의 분주함이 당연한 그들의 삶인 줄 알았다.


한국과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아일랜드에 와서 살아보니 이제껏 내가 알던 계절과 또 다른 계절의 모습이 있었다. 아프리카나 북극, 남극에 가게 된다면 더욱 극단의 기후를 경험할 수 있을 테지만, 한국보다 위도가 조금 더 높은 아일랜드만 해도 확실히 햇살과 바람의 느낌이 달랐다. 여름의 해는 가까운만큼 더 뜨거웠고, 찬 물기를 머금은 겨울바람은 더 매서웠다.  

그리하여 더블린에 온 후 나는 좋아하는 계절이 바뀌어버렸다.

"여름"

뜨거운 햇살 속에서도 상쾌함을 잃지 않은 그 시원한 바람. 주위를 둘러싼 초록나무들을 더 푸르게 해주는 싱싱한 빗줄기. 사계절의 순환을 겪고 나니, 이제 나는 여름을 기다리는 것이 한 해의 낙이 되어버렸다.


더블린으로 출발하던 2016년 6월. 새벽같이 인천 공항에 가서 우리를 배웅 나온 가족들과 함께 아침밥을 먹고 눈물의 이별을 한 후 비행기를 탄 것이 점심 즈음이었다. 이후 13시간 넘도록 파리까지 날아간 후, 다시 더블린으로 오는 두 시간까지 더해  그 긴 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보내는 동안 바깥세상은 내내 환한 낮이었다. 한국이었다면 벌써 밤이 되었을 시간인데, 우리는 해를 따라 시차를 넘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오느라 마치 백야와 같은 하루를 보낸 것이다. 때마침 더블린은 여름이 시작된지라 밤 10시가 되어서야 해가 지는 신기한 현상 때문에 창문을 커튼으로 가리고 잠자리에 들어야 시차 적응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일랜드에 첫발을 딛자마자 마주한 여름의 환한 미소에 나는 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반면, 더블린의 겨울 해는 너무 짧았다.

한국에서도 춘분과 추분을 기점으로 해의 길이가 길고 짧아지긴 했지만, 오후 4시부터 어둑어둑해지진 않았던 것 같다. 가뜩이나 비가 자주 와서 하루 내내 하늘빛이 우중충한 날이 많은데 저녁식사도 준비하기 전에 밤이 와버리면 하던 일도 모두 접고 그저 전기장판이 데워진 침대 속에 숨고만 싶어 졌다. 그런 긴 겨울이 4개월은 넘게 이어지다 보니, 첫 해는 그런가 보다 하며 모르고 지냈지만,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는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작년처럼 여기저기 아프지는 않을지, 비바람이 너무 심한 날이 오면 애들은 학교에 어찌 보내야 할지 미리부터 걱정이 앞섰다.

친한 언니가 영국에서 3개월 정도 지내는 동안에도 매일 계속되는 비에 우울증이 도져서 무작정 가족들과 해가 뜨는 이탈리아로 피난(?)을 갔었다는 경험담이 떠올랐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태교용으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지역의 사람들이 쓴 전래 기도문 모음집을 선물 받은 적이 있는데, 그들의 기도가 생각나기도 했다.


새로운 하루 열어주시고

부드러운 미풍과 빛나는 태양과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일할 기회와 쉴 기회를 주시고

또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의 대부분은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감사였다. 한국에서 읽을 때는 그저 작은 것에도 감사하라는 내용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아일랜드에 온 후 순간순간 그 기도문들이 떠오를 때가 많았다. 며칠간 계속되는 매서운 비바람 사이에도 잠깐씩 햇살이 얼굴을 내비쳐주고 거세던 바람이 잠시 잠잠해질 때, 이따금씩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새소리를 들으며 평온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나는 그들이 왜 매일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와 떠오르는 해에도 그리 감사했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햇살의 귀함은 내게도 피부 깊숙이 와 닿았다.



어느 어둑한 오후, 나는 이불속에서 날씨 어플을 뒤적이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친구는 아직 따뜻하겠구나, 얼마 전 더블린에 다녀간 친구가 사는 볼티모어는 완전 겨울이네. 엄마가 계신 한국은 기온은 낮아도 날씨는 내내 맑아서 다행이다. 베를린이나 런던은 더블린과 비슷하고, 지금쯤 이탈리아나 스페인에 가면 이곳보다 조금 더 따뜻하려나. 지인들이 머물고 있는 세계 곳곳의 날씨를 찾아보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아일랜드 안에서도 해가 긴 여름과 짧은 겨울이 있듯이, 이 지구 어딘가에도 내게 부족한 해를 대신 누리고 있는 다른 나라의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지구의 공전과 자전, 그리고 일정한 기울기와 위도에 따라 지구 곳곳의 계절과 해의 길이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 배운 기억은 나지만 과학에 전혀 문외한이라 이런 생각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항상 추운 남극과 북극이 있고, 항상 더운 아프리카가 있듯이, 한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호주가 있고, 한겨울에 맞이하는 한국이 있듯이, 동그란 지구 안에서 우리는 주어지는 햇살을 나눠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긴긴 여름의 해를 행복하게 즐기는 동안, 누군가는 기나긴 겨울밤을 견뎌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머리가 조금씩 커지면서 나 자신에게만 갇혀있던 시야도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내가 밥을 먹을 수 있고 학원에 다닐 수 있는지, 아빠는 왜 회사를 옮겨 다른 지방으로 떠나야 하고 엄마는 왜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한 마디로 집안이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온전한 그 틀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시스템으로 자전과 공전을 반복하고 있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 가족의 평온한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 갖춰져야 할 조건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것은 결코 쉬운 일도, 저절로 되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가족을 포함하여 사람이 모인 크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무언가를 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누군가의 '희생'도 공존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자 노동'

어느 언론에서 언급한 그 단어 안에는 햇살을 등진 채 애쓰고 수고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전부 담겨 있었다. 빛이 내리쬐는 곳에서 자식들이 따뜻한 옷 입고 맛있는 것 먹으며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의 부모님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감내했을까. 헤아릴 수 없는 그 헌신들이 상기되자 감사와 동시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복잡한 그 심정은 묘한 부담감으로 커져갔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어느 책 광고에서 들리던 딸의 외침처럼 '희생'으로 점철된 우리 부모님들의 삶이 내게 대물림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가족을 이룬다면 내 부모와 같은 그런 헌신으로 가족을 위하고 애쓸 자신이 없었기에 '희생'이라는 단어는 그저 무섭고 싫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돌아보니 누군가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으로 결혼과 출산의 강을 지나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두려움을 안고 엄마가 되어보니 모든 것에 서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완벽한 준비도 불가능했겠지만, 육아는 처음부터 하나씩 예측을 벗어났다. 만만한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 괜스레 모질게 아이들을 대하고 나면, 또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약해져서 이것저것 들어주는 일관성 없는 모습이 계속 반복되고, 그렇게 널뛰기처럼 하루를 보낸 후 비로소 잠든 아이들을 바라볼 때면 '내가 도대체 무슨 용기로 엄마와 아내의 삶을 택한 거지?' 한탄과 회의가 몰려오기도 했다.


손주들을 어루만지며 엄마는 종종 말씀하셨다.

사랑은 뭘 바라면 안 되는 거야.
그냥 내리사랑이야.
내가 너희에게 준 것들이
이제는 너희를 통해 이 아이들에게
그저 흘러가는 거지."

그 말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마치 이젠 자식들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씀 같아서 죄책감이 더욱 내 맘을 조여왔다. 하지만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일상 중에도 가끔씩 엄마의 말을 곰곰 곱씹다 보면 어렴풋 그 의미가 잡히는 순간이 있었다. 아주 작은 일에도 기쁘고 행복해서 방방 뛰며 까르르 웃는 아이를 볼 때, 아이의 별 것 아닌 행동과 말 한마디로 내 마음에 따사로운 햇살이 퍼져갈 때, 정말 현실과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충분하게 느껴지는 그런 찰나가 있었다.

어른이 되기까지 분명 이 아이들은 몇 겹의 허물을 벗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원치 않은 오해와 상처로 아프기도 할 테고, 누군가로부터 미움도 받고 사랑도 받겠지. 곁에서 지켜보니, 막상 부모라고 해도 그 세세한 것들을 컨트롤해 줄 수는 없었다. 겪고 이겨내고 성장하는 것은 온전히 아이들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엄마와 아빠는 우리에게 햇살이 비치는 작은 울타리라도 만들어주고 싶었던 거구나. 대신 아파줄 순 없어도 조금 더 환히 웃게 해주고 싶어서 그늘 속에서도 그리 바빴던 거구나. 그렇게 일궈낸 우리의 웃음이 그들에게는 한 조각 햇빛이었겠구나.  

아이들의 웃음을 만끽하는 찰나 속에서 나는 이따금씩 어릴 적 내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자라면서 얼마나 그들에게 웃음을 주었을까. 나는 왜 더 많이 웃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선택이 아니었다. 어쩌면 숙명 같은 것. 돌고도는 계절처럼, 거스를 수 없는 순환의 고리처럼 때때로 머무르는 빛과 어둠을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공동체였다.

아이를 바라볼수록 자꾸 욕심이 많아진다. 엄마가 내게 해 준 것처럼 헌신의 사랑을 부어주지도 못하면서 남들에게 더 사랑받았으면, 나보다 더 잘했으면, 누구보다 더 많이 가졌으면.... 그리고 더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끝없이 솟아난다.

더블린에 온 후, 우리 가족은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이다음에 이 아이들이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무색하게, 하루하루 도움의 손길에 힘입어 이국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어쩌면 아이들을 향한 나의 바람 속에는 좀 더 나은 위치에서 넉넉하게 가진 사람이 되길 바라는 욕심이 깃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녀석들이 항상 밝은 곳에서 티 없이 건강하게 빛을 움켜쥐고 자랐으면 하는 욕심이 삐죽 솟아날 때면 지구 어딘가의 누군가를 떠올려본다. 어둠 속에서 내내 빛을 기다리며 사는 아이들. 자신의 빛을 타인에게 기꺼이 나눠주는 사람들. 깜깜한 새벽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세상의 엄마들.


이불속에서 벗어나기 힘든 추운 밤이 올 때면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런 얘기를 나누어야겠다. 어둠이 너무 빨리 온다고 의기소침해지지 말자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빛을 빚지고 있는지, 살면서 그 빛을 열심히 갚아가기 위해선 무얼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자고.

그리고 우리에게 머물던 그 햇살을 굳이 잡아두려 하지 말자. 그 빛이 따사로운 온기가 되어 정말 필요한 누군가에게 흐르도록 그냥 놓아주자.

여름이 오면 누군가가 나눠준 햇살로 우리는 다시 따뜻해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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