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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Jun 25. 2018

와줘서 고마워 나의 소공녀들

우리가 더블린에서 다시 만나다니!


서울에서 더블린은 그다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물리적 거리로 치면, 직항이 없어서 비행기를 한 번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경유를 위해 대기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족히 20시간은 가까이 걸린다.

심리적 거리도 만만치 않다. 유럽의 매력적인 관광지로 알려진 런던이나 파리만큼 더블린이 유명한 도시는 아니기에 비슷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다면 다른 도시에 더욱 마음이 기울기가 쉽다.

최근 한국의 몇몇 예능 프로에서 소개된 후 영화 <원스>의 나라이자 버스킹의 도시로 조금씩 인지도를 높이고는 있지만, 2년 전 더블린행을 준비하면서 나 역시 세계지도 속의 낯선 아일랜드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이름도, 역사와 문화도 그저 생소한 나라. 솔직히 살면서 한 번쯤 가볼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곳이었기에 아이들과 도서관에서 아일랜드에 관한 만화책을 빌려 부랴부랴 함께 읽어본 것이 준비의 전부였다.

 

"나 있는 동안 꼭 한번 놀러 와!"

더블린으로 떠나기 전, 가족과 친구, 지인들에게 반은 농담, 반은 바람을 담아 메시지를 전하기는 했지만 막상 비행기를 타고 그 먼 시간을 돌아 지구 반대편에 와보니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5년 정도 섬처럼 고립되어 종종 카톡이나 영상통화나 하면서 그림움을 달래야 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일밖에 모르던 친구의 탈출

처음으로 더블린에 날아와준 친구는 대학 동기 E였다. 대학시절, 또래 친구들처럼 명랑하기보다는 조금 음울한 아웃사이더였던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풍물패에서 장구와 북을 치던 사이였다. 졸업 후 잠시 서로 뜸하다가 같은 업계에서 한동안 일하면서 좀 더 내밀한 사이가 되었지만 각자의 삶이 바빠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서울로 이사를 간 후 차로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인근에 서로 살게 되었으면서도 E는 드라마를 쓰느라 몇 년 동안 집필실에서 거의 두문불출 중이었고, 나 역시 두 아이의 육아로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간혹 몇 달에 한 번 서로 숨통이 트이는 날이 오면 내가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사들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한참 동안 묵혀둔 얘기들을 숨 가쁘게 쏟아내고, 인근 맛집을 찾아 점심을 먹고 아쉽게 서로의 일터로 돌아가기 바빴다.


"지금 확 비행기표를 끊을까?"

더블린에 온 지 3개월이 막 되어가던 무렵, 종종 문자와 사진으로 내 소식을 전해 듣던 그녀가 갑자기 예상외의 대사를 던졌다. 그래도 유럽행인데 적어도 몇 달 전에는 비행기 티켓을 미리 구입하고 차근차근 계획을 짜야한다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달리, E는 말이 나오자마자 바로 몇 주 후면 날아올 수 있는 티켓을 덜컥 사버리고 말았다. 유럽은 물론, 혼자서의 해외여행은 해본 적이 없는 그녀가 더블린행을 결심한 첫 주자가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더블린에서 서툰 새내기로 겨우 정착을 시도 중이었던 나나, 그저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 더블린행 티켓을 사버린 그녀나 아무런 현실감각이 없었다. 마침내 시간이 다가와 집 앞에서 트렁크를 들고 서 있는 E와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정말 네가 여기에 왔구나!"

하며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리고 서울에서처럼 다시 우리는 두문불출하며 2주 간의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2016년 10월 21일 ·                     

친구가 돌아갔다.
유럽은 한 번 와본 적도 없고 아일랜드라는 나라엔 어쩌면 평생 올 계획도 없었던 그녀가, 그저 내가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갑자기 이곳으로 훌쩍 날아왔다가 짧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있을 때 사실 그리 먼 곳에 살지도 않았는데 나는 애들 따라다니느라, 친구는 몇 년간 작업실에 갇혀 드라마 쓰는데 몰두하느라 바빠, 잠깐씩 점심시간에 수다를 나누던 것이 전부였다.

오랜만에 만나 그동안 묵혀 둔 얘기들을 두고두고 풀어내다 보니, 나중에는 흐르는 구름을 보며 나누는 침묵도 정겹고 비바람 맞으며 하루에 만보씩 더블린을 걸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사람이 참 어려워서 시무룩해질 때가 종종 있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이래서 네가 좋아"보다
"이래도 네가 좋아"가 진짜라는 걸 느낀다.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본 우리는 음악, 영화, 드라마, 책, 음식 등등 저마다의 취향이 조금씩은 달랐다. 그래도 이십여 년 간 인연을 놓지 않고, 이 먼 거리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눌 수 있음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친구가 이곳에 온 다음날, 이모의 여행가방 옆에 자기의 겨울왕국 여행가방을 나란히 갖다 놓고
"이모 한국 갈 때 나도 같이 데려가!"
하는 콩이를 보며 한참을 웃었는데...
5년 동안은 한국에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던 나도 이렇게 누군가 고향바람을 전해주고 갈 때마다 마음이 일렁일 것 같아 걱정이다.      

그래도 눈부신 아일랜드의 첫가을을 함께 누릴 수 있어서 좋았다 친구!        
다시 서울로 돌아가던 날 E는 트렁크를 세워두고 우리 동네의 하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E의 말에 의하면, 낯설던 더블린 중심가가 이제 혜화동 어느 거리처럼 익숙해질 무렵 그녀는 다시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친구가 떠나고 슬슬 나도 더블린 생활에 정착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하자, 휴일이 오면 더블린을 벗어나 가족들과 아일랜드의 동서남북 지역을 여행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인근의 유럽 도시도 둘러볼 수 있었다.

조금씩 여행에 탄력이 붙자, 문득 E에게 미안해졌다. 제법 긴 시간을 함께했는데 더블린을 벗어난 멋진 여행지도 제대로 소개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그때부터 마치 호객행위라도 하듯 친구들에게 가끔씩 더블린의 하늘과 나무와 바다의 사진을 찍어 보내기 시작했다. 설마 친구들이 이 먼 곳까지 시간을 맞춰 올 수 있을까 싶다가도 E가 훌쩍 왔다 간 것처럼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들이 왔다!


더블린에서 뭉친 30년 지기 친구들

더블린에서 초등학교 2학년 새 학기의 첫 등교를 하던 날, 딸내미 콩이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엄마는 2학년 때 어땠어? 나처럼 떨렸어?"

모처럼 오래전 그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아! 엄마도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때 전학을 갔어. 지금 콩이랑 아주 비슷했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까지 가장 친하게 지내는 평생 친구 세 명을 만났어."

그랬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작은 내가 콩이만 할 무렵이었다. 낯선 새 학교와 교실에 들어서자 50명은 돼 보이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고, 그 틈에서 어리둥절해하는 멀대처럼 큰 나에게 그녀들은 다가와주었다. 이후 중,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우리는 인연을 놓지 않았다. 매년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고 결혼식에서 부케를 주고받고 가족의 장례식에서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그중 H가 7년 전에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정기적인 모임도 쉽지 않았다. 그녀가 잠시 한국에 들어왔던 5년 전이 우리 넷이 온전히 얼굴을 마주한 마지막 모임이었다. 이후 나까지 아일랜드로 오면서 가끔씩 열어보는 대화방이 우리가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미국에서 모일래, 아일랜드에서 모일래?"

농담처럼 모임 장소가 언급될 때만 해도 가능할까 싶었다. 두 딸의 엄마이면서 오카리나 연주자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Y가 적극적으로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고, 공무원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K도 언제든 휴가를 잡아보겠다며 나서자 뭔가 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LA에서 하던 일을 채 정리하지 못한 H는 마음은 굴뚝이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시차를 뛰어넘어 이따금씩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누며 어디가 아프다, 가족 중 누가 수술했다는 등 건강에 대한 소식들이 자주 오고 가자 어느덧 병원에 가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하는 중년이 되어버린 현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러다 우리 나중에 병원에서 만나는 거 아냐?"

이 말이 결정타가 된 듯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한국에 있는 Y와 K는 서둘러 뭔가에 홀리듯 비행기를 예약했고, 미처 일을 다 정리하지도 못한 H는 일단 부랴부랴 시간을 맞춰 합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떠나기 하루 전날까지도 올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았던 H로부터 마침내 LA에서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더블린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문자가 도착하자 조금씩 실감이 났다. 한국에서 오는 두 친구보다 하루 먼저 도착하는 그날은 때마침 H의 생일이었다.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친 나는 비몽사몽 그녀를 맞았고 긴 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한껏 시달린 그녀는 잔뜩 부은 얼굴의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그날 저녁, 아이들과 작은 케이크를 고르고 미역국과 불고기로 조촐한 저녁식사를 마련하여 아주 오랜만에 소박한 생일 파티를 가졌다.


5년 만에 모인 완전체

다음날, 한국에서 출발한 Y와 그녀의 두 딸, 그리고 K가 드디어 더블린 땅을 밟았다. 아홉 살 때 서울 변두리 초등학교에서 처음 만났던 우리 넷은, ’Dublin 18’이라는 세계 지도의 낯선 좌표에서 그렇게 다시 징하게 만났다. 신기하고도 반가운 마음이 쉬이 가시지 않아 도착한 첫날밤부터 끝없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너희 엄마가 엄청 노래를 잘했거든. 그래서 중학교 때 교실에서 노래를 부르면 옆반 애들까지 다 와서 들을 정도였어. 그런데 꼭 노래를 다 부르면 다음 사람으로 나를 지목해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아니?"

음악적 재능이 가득한 Y의 딸들은 자신들 엄마의 어릴 적 얘기에 신기한 듯 눈이 동그래졌다.

"너희 엄마는 어릴 때 화도 잘 안 내고 항상 친구들한테 친절했어."

그런가 하면 콩이와 섬이는 H가 전해주는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너 6학년 때 나 왕따 시킨 거 기억나냐?"

"K는 고3 때 도서관에서 덥다고 대하에 물까지 받아서 발 담그고 공부했잖아. 그때 우리 다 너 서울대 갈 줄 알았잖아."

"나 수능 망치고 복도에서 너 만나서 안겨서 엉엉 울었던 거 생각나? 그때 진짜 죽고 싶었는데."


며칠을 함께 지내다 보니 잊은듯했던 지난 에피소드가 하나둘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어릴 적 모습, 익숙하게 놀러 가던 집들, 쏘다니던 동네 어귀의 골목들과 끝없이 나누던 얘기들까지. 마치 잠자던 기억 세포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살아나는 건 추억만이 아니었다. 이래서 좋아했고, 저래서 다투곤 했던 서로의 장단점까지 다시금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서로 부대끼며 찰지게 지내던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사소한 것에 예민해지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밤이면 각자 털어내는 살아온 얘기에 귀 기울여주고, 눈물이 나면 토닥토닥 위로해주며 그동안 만나지 못해 헛헛했던 서로의 속내를 달래주느라 밤이 짧기만 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살림에 서툴기만 한 내가 어떻게 여러 손님을 대접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누구보다 허술한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멀리까지 날아와서도 그 빈틈을 메워주느라 분주했다.

어떤 재료든 뚝딱 멋진 요리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H는 어느새 주방을 장악하여 스테이크, 닭볶음탕, 잡채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음식들을 푸짐하게 만들어 우리를 계속 배불리 먹였고, 뭐든 똑 부러지게 해내는 K는 엉망인 나의 수납장들을 우렁각시처럼 말끔히 정리해 놓고는 매끼마다 설거지를 놓지 않았다. 한창 예민한 시기의 중2와 사춘기 5학년 두 딸을 힘들게 데려온 덕분에 섬이와 콩이를 기쁘게 해 준 Y는 친정엄마처럼 마치 트렁크 가득 한국 음식과 화장품, 아이들 옷을 잔뜩 챙겨 왔는가 하면, 지내는 동안 온 집안에 청소기를 끌고 다니느라 바빴다.


호스(Howth)의 언덕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우리들
북 아일랜드 끝자락에 위치한 Dunluce Castle
좀처럼 사진에서 그 예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던 Y의 사춘기 딸내미

덕분에 그녀들이 있는 내내 나는 오히려 친정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몸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때마침 날씨도 좋아서 함께 호스(Howth)의 바닷가를 산책하고, 벨파스트와 골웨이, 클리프 오브 모허 등의 명소를 돌며 자연을 만끽했다.


우리는 마치 빨래 같았다. 그동안 나름 힘들었던 일들로 범벅된 몸과 마음을 깨끗이 빨아 홀가분하게 빨랫줄에 턱 널어놓고는 아일랜드의 따뜻한 여름 햇살과 변덕스러운 비바람에 그저 몸을 맡겼다. 그렇게 젖고 마르고를 반복하며 조금씩 깨끗하고 빳빳해지는 사이 어느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길 것만 같았던 일주일도 금세였다.


"다음엔 LA에서 만나는 거야. 다들 준비하자고!"

헤어짐이 못내 아쉬운지 이별 전부터 쏜살같이 다음 모임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어딘가 달려갈 곳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다시 예전처럼 맘이 구겨질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마지막 날, 아쉬운 마음에 집 앞마당에서 옛날 우리네 엄마들처럼 비스듬히 몸을 포갠 채 촌스런 단체사진을 찍은 후 서서히 헤어짐을 받아들였다.

풀어놨던 짐들을 하나둘 말아서 트렁크에 넣고 비행기 안에서 신을 편한 신발을 꺼내 신고는 친구들은 다시 더블린 공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프랑스를 경유하여 한국으로, 그렇게 각자의 삶터로 돌아갔다.

일주일간 풀어 놓았다가 다시 싸놓은 친구들의 짐가방들


친구들이 돌아간 후 본격적으로 여름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민박집주인처럼 이불보와 베갯잇을 하나둘 벗겨 세탁기에 돌린 후 햇살 아래 널고 나니 갑자기 몸이 으스스 아파오기 시작했다. 몸살인지, 뒤늦은 향수병인이 알 수 없는 통증으로 며칠을 끙끙 앓고 나자 다시 누군가를 맞이할 기운이 조금씩 생겨났다.


골방을 탈출한 집순이들의 재회

이번에는 암울했던 고3의 늪을 함께 지나온 S가 오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정해진 일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S야말로 더블린에 올 거라고 예상하기 힘들었던 친구 중 하나였다. 고 2 때부터 3학년까지 2년간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키가 비슷하게 커서 맨 뒷자리에서 주기적으로 짝꿍이 되곤 했다. 반장과 부반장을 연달아했던 그녀는 일탈하는 모습을 거의 보여준 적이 었는 모범적이고 반듯한 성격이었다면, 나는 선도부면서도 지각을 일삼는 게으름뱅이였다. 타고난 집순이라는 공통점이 우리를 자연스레 엮어주었다. 대학생이 된 후에도 주로 내가 그녀의 집에 찾아가곤 했는데, 주말이면 함께 배를 깔고 누워 음악을 들으며 만화책을 보거나 이 얘기 저 얘기를 떠들며 밤을 새우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서로 사는 곳이 멀어지고 삶의 패턴이 달라진 후 가끔씩 시내에서 점심을 후딱 먹으며 얼굴을 마주했지만 뭔가에 쫓기듯 헤어지고 나면 불안하고 아쉬웠다. 시간이 멈춘 듯 아늑했던 그녀의 방이 우리 둘 다 그리웠던 것이다. 그런 S가 이번에는 내가 머물고 있는 집을 찾아 '이역만리(그녀의 표현에 의하면)'의 땅 아일랜드로 날아왔다. 눈 앞에 선 그녀는 자글자글 아줌마가 된 나와 달리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말끔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꼬박 하루를 걸려 이곳에 날아왔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집이 가장 좋았다. S는 단 하루만 북아일랜드의 자이언츠 코즈웨이 1일 투어를 다녀온 후 모든 스케줄을 마다하고 나의 일상을 공유하기를 원했다. 아침 일찍 아이들을 스쿨버스에 태워 학교에 보낸 후 창가 앞에 앉아 나란히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때운 후 집안을 대강 정리하고 가까운 쇼핑타운에 나가 소소하게 장을 보았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아이들을 다시 픽업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지루하고도 평범한 주부의 반나절을 함께 보냈다.

다음날에는 남편에게 아이들을 일임하고 바다가 있는 브레이로 산책을 나섰다. 더블린에 온 후 친구와 단둘이 기차에 앉아서 햇살이 반짝이는 바다를 한가로이 바라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한국에서도 바다에 갈 일이 자주 없었던 S는 탁 트인 바다를 앞에 두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

"이렇게 왔으니 다음에 언제든 또 올 수 있겠지?"

나의 농담 섞인 진담에 S는 사뭇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어릴 적 소녀들만의 비밀스러운 작은 방문을 열고 나온 우리는 어느덧 세상 밖에 담담히 서 있었다.

S와 함께 산책하며 바라보던 브레이의 바다
브레이에서는 아일랜드의 대표 음식인 피시 앤 칩스를 맛보아야 한다.


마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그리웠던 친구들이 왔다 떠나고 나니 뭔가에 홀린 듯 정신 또한 쏙 빠졌다. 다만 물기 어린 마음 한 복판은 여전히 소금기가 남은 것처럼 이따금씩 따갑고 아려왔다. 친구들이 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던 시간이 어쩌면 가장 행복하고 들뜨던 시간이었다. 막상 정신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속상하게도 잘 못해준 점이나 아쉬움 같은 것들만 마음에 쓰라리게 남았다.


영화 <소공녀>

며칠 후 조금 울적한 마음을 달래며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소공녀>라는, 어릴 적 TV에서 보았던 만화와 똑같은 제목의 한국 영화였다.


주인공인 '미소'는 청소일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듯 독특한 캐릭터의 여성이다. 어느 날, 월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말에 계산기를 두드려 보던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고민한다. 당연히 집이 가장 중요하다는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위스키와 담배, 남자 친구면 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미소는 방을 빼고 짐을 꾸려 거리로 나온다. 그리고 한창때 함께 밴드 생활을 하며 청춘을 보냈던 멤버들의 집을 하나씩 찾아간다. 한 손에는 트렁크, 한 손에는 계란 한 판을 사들고 오랜만에 방문한 그녀를 맞이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저마다 다양하다.

시부모님을 모시며 가사에 찌들어 사느라 제대로 친구를 환대를 여유가 없는데도 기꺼이 비좁은 창고 같은 방을 미소에게 내어주고 그녀와 한 방에서 밴드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아내를 위해 큰 아파트를 장만했지만 정작 아내가 떠나버린 후 골방문을 잠그고 밤마다 술로 보내는 암울한 후배도 있었다.

방이 수없이 많은 넓은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부족함 없이 사는 선배 언니가 턱 내어준 좋은 방에서 한동안 지내게 된 미소가 마치 자신의 것 같지 않은 여유로움에 어색해할 때쯤, 남자 친구는 돈을 벌기 위해 중동으로 떠난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미소에게 흔쾌히 방을 내어줬던 선배는 자신의 남편 앞에서 "언니는 기타를 사랑하는 뜨거운 여자였다"라고 말하는 미소를 불편해한다. 보통의 상식처럼 살지 않는 미소를 철없고 염치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선배의 집에서 다시 나온 후 미소는 어느새 올라버린 위스키 한 잔 값에 쓸쓸해하며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소공녀>라는 한글 제목과 달리,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Microhabitat'였다. 미생물이나 곤충들이 살아가는 작은 서식지를 의미하는 이 단어를 곰곰이 들여다보며,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작고 왜소한 그녀가 편히 두 다리를 뻗을 공간 하나가 이 넓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무척 서글펐다. 단 하룻밤을 지내더라도 친구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말끔하게 청소를 해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의 빈 곳을 채워주는 미소가 마치 현실에는 없는 판타지 속 존재처럼 느껴지면서도, 불과 얼마 전 내게도 그런 친구들이 왔다 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더블린의 우리 집 안에는 거미가 많다. 단 며칠만 집안 천장 구석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어느새 자리를 잡고 거미줄로 집을 만들고는 오르락내리락 자기만의 삶에 안주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거미와의 동거가 낯설고 생경해서 부리나케 거미줄을 부수며 청소하곤 했지만 언제부턴가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내가 사는 이 넓은 공간 중 아주 미세한 부분을 나눠 사용해도 그다지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오히려 거미는 종종 다른 해충을 잡아주는 방식으로 내게 도움을 주는가 하면, 그 외에는 그저 자기의 예쁜 집을 만드는데 열중할 뿐이었다.


고인 물 밑

해금 속에

꼬물거리는 빨간

실낱 같은 벌레를 들여다보며

머리 위

등 뒤의

나를 바라보는 어떤 큰 눈을 생각하다가

나는 그만

그 실날 같은 빨간 벌레가 된다.


문득 김달진 님의 '벌레'라는 시를 떠올리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거미보다 조금 더 크다고, 좀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일까. 내 머리 위에서 바라보는 나보다 더 큰 누군가의 눈으로 본다면, 이 작은 방을 벗어나, 집, 나라, 지구, 우주라는 끝없는 공간으로 시야를 넓혀본다면 그야말로 벌레와 별 차이가 없는 먼지 같은 작은 존재가 바로 나였다.


서서히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과 어린 시절을 추억하다 보니 그때는 죽고 못 살 것처럼 힘들고 대단했던 일들도 이제는 하하 호호, 웃으며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꼬물거리는 작은 벌레를 멀찌감치서 바라보듯 어느새 우리는 어린 나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가끔은 적당한 거리에서, 또 가끔은 아주 가까이 밀착해서 들여다봐 줄 수 있을 만큼 자라 있었다.


지구 반대편의 아일랜드라는 낯선 곳을 마치 옆집처럼 기꺼이 달려와 주고,

미소처럼 따뜻한 음식과 깨끗한 청소, 정겨운 위로와 살가운 말들로 나의 허한 곳들을 고루고루 채워준 나의 소공녀들!

평범하고 별 것 아닌 더블린에서의 일상을 함께 공유해 줘서 정말 정말 고마웠어!

너희와 함께 바라본 푸른 하늘과 바다, 초록의 산과 나무. 함께 맞은 비바람과 눈부신 햇살.

그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이 그저 좋았어.

이 넓은 우주에서 거리와 공간은 중요하지 않아.

만나고 싶다는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든 만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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