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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Jul 11. 2018

Where is the rain?

비와 함께  반가운 이들을 기다리며.

"나는 솔직히 비가 그리워요."

내가 보낸 메시지에 어이없이 웃고 있을 헬렌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헬렌은 일주일에 한 번씩 나와 만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마음 좋은 아이리시 할머니이다.

"지난겨울과 봄을 떠올려봐. 그때만 해도 여름에 이런 말을 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절대 아니죠."


한 달 넘게 비가 내리지 않는다. 더블린에, 비의 나라 아일랜드에 말이다. 지난 1년 간 이곳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궂은 날씨와 변덕스러운 바람에 대해 떠들어대고, 여행 오는 친구들에게 방수 옷을 준비하라고 침이 마르도록 얘기하던 나는 요즘 거짓말쟁이가 된 것만 같다.


지난달에 이곳에 와서 머물렀던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짐을 싸며 말했다.

"네가 준비하라고 한 방수 바지랑 비옷이랑 한 번도 못 입고 가네. 진짜 더블린에 비 오는 거 맞아? 솔직히 한 번이라도 그 으스스한 기운을 느껴보고 싶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렇게 좋은 날씨운을 맛보고 가는 럭키한 녀석이 무슨 배부른 소리를 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아침 아홉 시가 다 되어서야 해가 뜨고 오후 네 시면 해가 스멀스멀 지기 시작하고 그 사이에는 부슬부슬 찬비만 내리는 우울한 겨울에 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불과 2~3주 전만 해도 공원에서 만난 아이들 학교의 엄마들과도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날씨를 봤나!"

하면서 기쁨에 들뜨곤 했다. 역시나 내가 사랑하는 더블린의 여름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한 엄마는 "쉿!"하고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했다. 행여나 하늘이 엿듣고 심술이라도 부리면 어떡하냐는 농담 섞인 제스처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몇 주간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여름만 되면 햇빛 알레르기로 고생을 했던 나는 외출할 때마다 선크림을 찾느라 바빴다. 분명 지난해와 비교해봤을 때 이런 햇빛 쨍한 날은 여름 동안에도 길어야 닷새 정도였다. 나머지는 적당히 시원하고 우중충한 더블린스러운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일요일, 오랜만에 가봤던 던니어리의 피플스 파크에서 열린 선데이 마켓에는 잔디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몇 걸음만 나가면 보이는 바닷가에는 근 2년 동안 본 적이 없는 인파들이 바다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굳이 다른 더운 나라로 바캉스를 갈 필요가 없이 그저 이곳이 여름 휴양지나 다름없었다.

신이 난 나는 아침마다 이불과 소파 커버들을 걷어 세탁기에 돌리고는 햇볕에 널기 바빴다. 오후면 따끈따끈하고 빳빳하게 마른빨래들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햇볕은 쨍쨍하니 날씨는 좋은데 뭔가 불안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그 불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온통 그린으로 둘러싸인 우리 동네부터 뭔가 달라져 있었다.

더블린에서 지내는 2년 동안 나는 나무는 저절로 키와 잎이 자라고, 꽃은 알아서 향기를 내뿜고 잔디는 당연히 짙은 초록빛으로 푸르른지 알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장 시간 비를 만나지 못한 잔디가 누런 빛으로 색이 바래고 있었다. 꽃들도 시들시들 고개를 숙인 채 향기를 잃어가고 나무들도 그 짙었던 여름의 진한 초록빛과 견고한 생기를 잃어갔다.

그동안 한 번도 일부러 뒷마당에 물을 뿌려준 적은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매일 아침 남편은 커다란 통에 물을 담아 화분과 나무에 물을 주고 잔디마다 물을 적셔주기 바쁘다.

잔디는 조금씩 누렇게 변해가고 하루만 물을 주는 것을 잊어도 꽃잎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무와 잔디가 채 목이 마르기도 전에 차고 넘치도록 비가 내려와 갈증을 풀어주고, 너무 심하다 싶으면 가끔씩 환한 햇빛이 쨍하니 웃으며 나무들마다 충분히 광합성을 시켜주고 때마다 살랑살랑 혹은 휘청휘청 바람이 다가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잎들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이토록 여러 손길이 나도 몰래 저 자연들을 돌보고 있었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이상기온이었다. 이곳 사람들 표현에 의하면 분명 뷰티풀 하고 러블리하고 원더풀 한 날씨이긴 했지만 이렇게 시위라도 하듯 비가 멈춘 것은 몇십 년 만의 처음이라 했다. 남편이 공부하고 있는 트리니티 컬리지에서는 물 사용에 대한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아일랜드 수도에서 건조한 날씨 때문에 호스 파이프 사용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캠퍼스에서도 물 소비를 줄이기 위해 협조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청소는 미루도록 하고, 기숙사에 거주하는 경우 너무 자주 샤워를 하지 말고, 물이 새는 곳이 있으면 위치를 알려달라는 등의 공지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집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 샤워를 할 때도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폭설에 대비하지 못해 일주일간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비의 나라 아일랜드라면 가뭄에도 대비가 부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단수와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겨울에는 거의 30년 만에 내린 엄청난 폭설을 경험하고, 이번 여름에는 지중해성 기후의 따땃한 여름을 즐기고 있으니, 어찌 보면 아일랜드에서 지내는 동안 이곳에서 살았던 이들도 경험하지 못했던 특별한 기후의 행운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둑어둑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과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 그리고 밤새 잠 못 들게 맘을 휘젓곤 했던 거친 바람이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것을 보니 조금씩 아일랜드에 적응이 되어가는지, 아니면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인지 나조차도 내 맘을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제 내일이면 이곳에 도착하는 엄마와 언니에게 물기 가득 품은 싱그러운 녹색의 대자연과 리얼 아일랜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해 주고픈 마음이 큰 것 같다. 푹푹 찌는 무더위와 폭염 때문에 밤낮으로 힘들다는 한국의 여름 소식을 들을 때마다 시원한 바람과 맑은 공기 속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 죄송하기만 했는데, 오랜 시간 떨어졌던 가족과 잠시나마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와 비를 맞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한동안 해 그림만 가득하던 날씨 어플에 드디어 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일 낮, 엄마와 언니가 더블린 공항에 도착하는 그 순간에 맞춰 기다렸다는 듯 비가 대기하고 있을 거라는 예보였다. 지난번 해만 실컷 보고 갔던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어딜 여행 가든 해가 계속 쨍쨍했대. 아마 내가 엄마 닮았나 봐, 나도 이렇게 해를 데리고 다니니 말이야."

믿거나 말거나 그런가 보다, 하며 피식 웃어넘겼는데 문득 돌아가신 친정 아빠 생각이 났다. 결혼식이나 중요한 날만 되면 어김없이 비를 몰고 다니셨다는 아빠. 결국 장례식 때도 비가 내려서 "그럼 그렇지"하며  가족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아빠가 내가 비를 그리워하는 걸 알고 계신 걸까. 아니면 아빠를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를 똑 닮은 언니가 아빠처럼 비를 몰고 오는 걸까.


반가운 손님맞이에 새벽까지 잠 못 이루며 끄적끄적하는 오늘 밤도 더블린에서의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 같다. 다만, 한국의 긴 장마를 겨우 보내고 돌아오는 이들이 지칠 만큼 큰 비는 오지 았았으면, 하는 간사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엄마, 언니, 조카들 빨리 와요!


그리고 비야, 너도 이제 그만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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