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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Oct 13. 2019

아프지 말자, 낯선 나라에서는

아일랜드에서 병원 다니기


세상 어디에 살아도 제일 가고 싶지 않은 곳, 병원

예약해 놓은 치료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친절하게도 치과에서 메일과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제법 힘든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요 며칠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치료를 연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연락을 했더니 두 달 후에나 시간이 빈다며 그때 다시 예약을 잡아도 좋겠냐고 묻는다. 두 주도 아니고 두 달이라니! 한국이라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이곳 더블린에서는 일반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다행히 촌각을 다투는 치료는 아니어서 어쩔 수 없이 예약을 미루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하다. 벌써 몇 번이나 다녀온 곳인데도 치과는 정말이지 무섭다. 치과뿐 아니라 모든 병원이라는 곳이 유쾌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일랜드에 온 이후로 병원이라는 곳은 내게 더 두렵고 부담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더블린에서 지낸 지 어느덧 3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 이젠 조금 적응했나 싶다가도 대화 중에 잠깐만 정신을 놓으면 따라잡기 힘든 아이리시들의 빠른 영어가 그렇고, 9월부터 슬슬 시작되는 을씨년스러운 추위와 변덕스러운 비바람은 매년 월동 준비하듯 맘을 단단히 먹어도 당해내기가 만만치 않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것은 병원에 가는 일이다.

더블린에 오기 전부터 외국에서 병원에 다니는 일이 쉽지 않다는 얘기를 경험자들을 통해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미리부터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지만 어떻게 해서든 아플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서울을 떠나기 전에 건강검진도 열심히 받았고, 두 아이를 끌고 치과도 수없이 드나들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상비약들을 챙겨 트렁크에 한가득 넣고 나서도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막상 이곳에 와보니 아일랜드에서 지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1~2년에 한 번씩은 가족들도 만나고 필요한 건강 체크도 하기 위해 한국에 다녀오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5년 동안은 한국을 방문할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다. 네 명의 가족이 한국에 한 번 다녀오려면 더블린에서 두세 달은 지낼 수 있는 생활비가 필요했다. 차라리 그 돈을 아껴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하는 것이 더욱 경제적이라는 쪽으로 남편과 나는 생각을 모았다. 행여 5년 동안 무슨 큰 병에 걸리거나 아플 일이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결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을 무작정 밀어붙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바람은 생각보다 금세 흔들렸다. 더블린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겨울에 남편은 태어나서 처음 대상포진에 걸렸다. 오른쪽 머리 위로 뭔가 이상한 부스럼과 찌릿한 통증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평소 같으면 그냥 한국에서 가져온 연고를 바르고 지나쳤을 남편은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GP(General practitioner)'에 연락해 운이 좋게도 다음날 저녁으로 예약을 잡았다. 남편을 본 의사는 바로 대상포진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약을 처방해주었다.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대상포진은 발병 후 72시간 이내에 치료를 시작해야 효과적이라는데, 때마침 다음 날은 휴일이었기 때문에 하루 이틀만 병원에 늦게 갔더라면 더욱 고생할 뻔했다.



더블린에서 병원에 가려면 일단은 가까운 GP를 예약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일단 이곳에서 의사의 진료를 거쳐야 그다음 더욱 정밀한 검사나 치료가 필요한 전문병원으로 이동할 수 있다. 동네마다 이런 병원들이 곳곳에 있지만 대부분은 예약을 해야 하고 당일에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아주 잠깐 의사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기본 60유로(한화로 약 8만 원)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친한 아이리시에게 한국에서는 적어도 3~5 유로면 동네 병원에 갈 수 있다고 말했더니, 자기는 노후를 한국에서 보내고 싶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몇 달 전 두 아이가 수족구에 걸린 적이 있었다. 엄마인 내가 봐도 당연히 수족구가 확실했지만 전염이 되는 질환인만큼 학교에 확실한 결석 사유를 밝혀야 할 것 같아 아침 일찍 무작정 GP를 찾아갔다. 한참을 기다린 후 의사는 아이를 본지 5분도 되지 않아 역시나 수족구라는 진단을 내렸고, 60유로를 내고 진단서를 받아 든 나는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5천 원 이내로 끝낼 일인데 아무런 치료 방법도 없이 그저 시간이 해결해줘야 할 병을 진단받기 위해 8만 원이라는 돈을 써야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GP에서 치료가 마무리되는 가벼운 질환이면 다행이겠지만 만일 의사가 더 전문적인 병원을 추천한다면 그때부터는 얼마가 필요할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기약할 수 없다. 친한 아이리시 엄마에게 아랫배가 가끔 아픈데 잘하는 GP나 초음파 검사를 하는 병원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일단 GP의 의사를 하나 추천해주면서도, 그다음 초음파 검사를 하려면 얼마나 기다리고 돈이 더 들지는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인 친구 하나가 오랜 시간 지속되던 설사와 복통을 못 견디고 병원에 갔는데, 그곳에서 추천해준 전문 병원에서 3개월은 지나야 장내시경을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은 경우도 있다. 그러고 보면 아일랜드 사람들은 참 인내심도 강한 것 같다.

언제부턴가 우리 가족은 가벼운 감기나 심하지 않은 이런저런 증상은 상비약이나 민간요법으로 살살 달래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아이가 열이 아주 펄펄 끓어서 병원에 가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기침 콧물 같은 경우에는 병원에서 해주는 것이 별로 없다. 항생제는 아이들에게 거의 처방해주는 일이 없고, 감기도 물을 많이 마시고 푹 쉬라는 조언이 전부다.


길고 지난했던 나의 치과 순례기

그럼에도 이곳에서 살면서 병원을 결코 피할 수는 없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치과에 처음 가게 된 과정은 그야말로 미련하고도 서글프다. 더블린에 정착한 후 3개월쯤 지났을 무렵이었나, 처음 겪어보는 으슬으슬한 추위와 비바람에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물론 온도로 치면 한국이 이곳보다 훨씬 더 낮지만, 실내 온도를 비교하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밖이 아무리 추워도 한국에서는 일단 집 안에 들어서면 훈훈한 공기가 코끝을 감싸고, 언제든 누우면 몸을 덥혀줄 따뜻한 방바닥이 기다리고 있지만, 꽤 오래된 더블린의 우리 집은 어느 공간이든 찬 공기가 가득하다. 특히나 해가 들지 않는 우리 부부의 침실에 누워 있으면 가끔 입김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겨울이 오자 이따금씩 왼쪽 턱 아래가 욱신욱신 아프기 시작했는데 딱히 치아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 치과 진료를 여러 번 받은 후였기 때문에 임파선에 무슨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에 일단 진통제 몇 알로 통증을 달랬다. 한국이었다면 치과든 동네 내과든 바로 뛰어갔겠지만 더블린에서는 어디를 가도 돈만 많이 들고 명쾌하게 해결해줄 것 같지 않은 묘한 불신이 있었다. 몇 달 후 왼쪽 턱 아래에 작은 물집 같은 것이 잡히자 슬슬 겁이 났다. 며칠 버티다가 혹이 조금 작아졌을 때쯤 큰 맘을 먹고 GP에 갔는데 의사는 별 것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내 귓속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너무 건조하다며 어떤 연고를 처방해주고는 걱정되면 혈액 검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남편과 나는 그 참에 큰 맘을 먹고 혈액검사를 받았고, 며칠 후 결과를 프린터물로 받고 싶으면 오라는 연락에 찾아가니 뭐가 좋은지, 나쁜지 특별한 얘기가 없이 숫자가 가득한 여러 장의 종이를 전해주었다. 이 경우에도 의사를 따로 만나 설명을 들으려면 둘 다 진료비를 내야 했기 때문에, 일단은 서류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평균을 조금씩 벗어나는 수치와 정상 범주 안에 자리한 숫자들이 정신없이 섞인 항목들을 인터넷을 뒤지며 이리저리 살펴본 우리 부부는 "특별히 의사를 만나라는 얘기가 없었으니 괜찮다는 거겠지?" 하고 씁쓰레 웃으며 서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턱의 통증은 잊을만하면 나를 찾아왔고, 갈수록  강도는 심해졌다. 마침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덜컥 겁이 난 나는, 그제야 사랑니가 분명하다는 혼자만의 진단을 내리고 얼마 전 치과에서 사랑니를 뺐다는 친한 엄마의 추천을 받아 병원을 예약했다. 그나마도 사나흘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참고 찾아간 의사는 치아의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를 살펴보더니 사랑니가 아니라 그 앞의 어금니의 신경치료를 해야 한다며 다음 주에 다시 다른 의사를 만나라고 말했다. 신경 치료를 하는 의사는 따로 있는데 그는 외부에서 오기 때문에 100유로(한화로 약 13만 원 이상)의 보증금을 내면 예약을 해주겠다고 했다. 당장 아파 죽겠는 나는 일단 엑스레이 비용으로 50유로를 내고, 그들이 처방해준 비싼 진통제들을 싸들고 돌아와 시간을 견뎌야 했다.

신경치료는 과연 얼마일까, 치과 홈페이지에 치료 항목별로 적힌 비용들은 정말이지 사악했다. 게다가 신경치료는 500~700유로 정도를 육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더 저렴하거나 빨리 치료해줄 수 있는 치과를 찾아 나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인생 최악의 통증을 견디며 예약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들 섬이가 학교에서 그린 ‘scream’이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마치 나의 속내를 표현해준 것만 같다.

드디어 예약한 날짜가 되었고, 나는 그 어떤 아픔과 그 어떤 비용이 들어도 다 견디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다. 정말이지 지난 일주일 동안 경험한 혹독한 통증을 멈추게만 해준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살면서 치과에서 길고 고통스러운 신경치료를 받을 때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긴 시간의 아픔을 견뎌내는 나만의 방법은 단 하나였다.

'나는 두 아이를 낳았어. 무통주사도 없이 그 고통을 오롯이 견뎠어.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히 견딜 수 있어. 모든 것은 다 지나가!'

낯선 나라에서 다른 피부색의 치과의사에게 몹쓸 치아를 맡긴 나는 여태껏 정신을 무장해온 주문을 다시 외우며 두 시간 넘게 입을 벌리고 누워있었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치아를 치료하던 덩치 큰 의사는 시간이 갈수록 지치는지 가끔씩 가뿐 숨을 몰아 쉬었다. 때때로 내게 괜찮냐고 묻던 친절한 말투는 조금씩 사라지고 자꾸만 입을 더 크게 벌리라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옆에서 도와주는 간호사에게 제대로 하라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영어가 짧아도 그 정도의 상황 파악은 가능했던 나는 순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세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의사는 치료를 마무리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도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의 탈진할 상태로 다 끝났냐고 묻는 나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내 치아의 뿌리 상태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끝낼 수 없었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황망해하는 내게 그는 더 어려운 숙제를 던져주었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임시방편으로 응급치료만 해놓은 상황이니 다른 병원의 의사를 찾아가 봐라. 원하면 내가 추천해줄 수도 있지만 그가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너는 치아를 뽑고 임플란트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의사에게 가서 어떤 치료를 할지는 네가 결정해라."

한국에서는 일단 그 치과에 갔으면 어떤 상황이든 그곳에서 결론을 보기 마련인데, 아일랜드는 뭐가 이리도 복잡한 건지 도통 이 시스템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황에서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당장 그날의 치료비였다. 원래 700유로라고 말했던 의사는 치료를 완수하지 못한 것이 미안했는지 200유로만 내라고 했다. 그것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건 나는 상황을 설명하고 내가 들은 것이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 의사를 바꿔줬다. 역시나 나처럼 황당했던 남편이 의사에게 뭐라고 쏘아붙였는지 결국 의사는 100유로만 내라며 나를 보냈다.

통증이 가라앉은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었다. 다른 의사에게 가서 확실하지도 않은 신경치료를 받느라 또다시 시간과 돈을 써야 할지, 아예 그보다 더 큰돈과 시간이 필요한 임플란트 전문 병원을 알아보는 것이 나을지를 나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아예 한국에 다녀올까 고민도 했지만 이것저것 상황을 알아보니 시간과 돈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치료라 그 역시 크나큰 모험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자주 만나는 아이들 친구의 엄마들에게 어떤 치과가 좋은지 추천을 부탁했다. 대답은 천차만별이었다. 자신은 아예 고국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오는 게 더 저렴했다는 폴란드인 엄마가 있는가 하면, 차라리 기차를 타고 북아일랜드(영국 땅)에 다녀오는 것이 훨씬 낫다는 체코인 엄마도 있었다. 친한 아이리시 할머니는 자신이 임플란트를 했던 치과는 매우 좋은 의사지만 너에겐 너무 멀고 비싸기 때문에 추천해주고 싶지 않다고 했고, 한 아이리시 엄마는 어딜 가도 가격이 그다지 다르지 않을 테니 그냥 의사가 추천해주는 사람을 찾아가는 게 나을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것은 속시원히 나의 상태를 의논할 수 있는 의사를 만나는 것이었다. 다행히 지인에게 물어물어 아일랜드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치과의사 한 분을 겨우 찾아냈다. 치과는 우리 집에서 루아스와 버스를 타고도 두 시간이 걸리는 곳에 있었지만, 허심탄회하게 말과 문화가 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한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만으로도 오랜만에 '병원'이라는 곳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일하는 병원에서는 임플란트 치료를 하지 않아서, 그가 추천하는 다른 의사를 찾아 전화를 했더니 석 달 후에나 예약할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쨌거나 바쁜 만큼 실력이 있는 의사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예약을 하고 기다렸고, 그것이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마침내 나의 가련한 어금니를 맡게 된 아이리시 의사는 다행히도 굉장히 친절했고, 병원은 쾌적하고 따뜻했다. 아내와 함께 넷플렉스로 <슬기로운 감방생활>과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 <힐러> 등의 한국 드라마를 종종 즐겨본다는 그는 가끔씩 서툰 한국말로 긴장도 풀어주고 나의 남편이 아일랜드에서 공부 중이라는 이유로 학생 할인의 선의도 베풀었다. 물론 그럼에도 만만치 않은 가격임은 분명했지만, 나는 그간의 기나긴 치과 순례를 마치게 된 것만으로도 그저 안도했다.


삶은, 병원에 자주 가거나 덜 가거나

왜 한국에 있을 때 좀 더 꼼꼼하게 체크하지 못했을까. 중간에 한 번쯤은 만사를 제쳐두고 한국에 다녀오는 것이 나았을까. 도움도 안 되는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아일랜드에서는 더 이상 병원에 다닐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여전히 다짐하곤 한다.

하지만 모든 병원의 시스템이 불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위한 복지에는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홉 살인 딸아이가 친구 집에서 놀다가 엄지손가락이 골절된 적이 있었는데, GP에 예약하고 다음 날 찾아갔지만 불행히도 그곳에는 엑스레이 시설이 없었다. 병원에서 소개해준 다른 어린이 전문 병원으로 찾아가 두 시간을 가까이 기다려 엑스레이를 찍고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어린이 전문병원은 퍼블릭이어서 치료비가 무료였고, GP 진료비는 상해보험을 통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안도했다. 며칠이 지나자 어린이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전문센터에서 부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의사는 앞으로 6주 정도는 심한 스포츠를 하지 말아야 하고 평소에 어떤 식으로 관리를 해야 하는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큰 아이가 한동안 학교에 잘 적응을 못하고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선생님과 상담을 하던 중 좀 더 자세하게 아이의 상황을 전해 듣게 된 우리 부부는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무료로 아이가 상담을 받을 수 있는 멘털 헬스 클리닉을 찾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아일랜드의 여느 상황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꽤 긴 시간 꼼꼼하게 아이와 부모를 번갈아 상담하고 검사했다. 전문 분야인만큼 우리가 필요로 할 때면 한국어를 통역해주는 인력을 투입해 주기도 하였다.

갑자기 환경과 언어의 변화를 겪는다는 것이 아이에게도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나와 남편은 어렴풋하게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였고 현재도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고 있는지, 긴 상담 과정을 거친 후에야 더욱 세밀하게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클리닉의 전문가들은 아이의 학교 선생님들과도 꾸준히 소통하며 학교 생활을 체크했고, 선생님들 역시 아이가 더욱 편안한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도와주었다. 마치 부모와 학교, 클리닉이 삼각형처럼 하나가 되어 아이를 위해 서로 공조하고 도와가는 모습은 이방인인 우리에게 너무나 감사하고도 감동스럽게 다가왔다.


더블린에서 지내는 3년 동안 병원에서 겪은 여러 일들을 돌아보면 한국이라면 겪지 않았을 불편함도 적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큰 사고나 심각한 질병 없이 지내고 있는 것에 감사할 때가 더 많다.

앞으로도 될 수 있으면 병원에 갈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성장기의 아이들은 꾸준히 시력도 체크해야 하고, 전염이 되는 이런저런 질환에 걸릴 수도 있고, 치아가 빠지고 새로 나고 상하는 일들이 일상이다 보니 엄마인 내가 챙기고 살펴야 할 책임감의 무게가 점점 늘어만 간다.

신기하게도 아이가 아프고 병원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는 일은, 내가 아픈 것보다 더 괴롭고 피하고만 싶다.치과에 가기 전부터 세상이 다 끝난 듯 울상을 하고, 병원 의자에 앉아서는 오들오들 온몸을 떨어대는 딸아이를 볼 때마다 내 몸에 더 힘이 들어가고 긴장이 된다. 의사는 과장된 칭찬과 달콤한 설득을 뒤섞어 아이를 겨우겨우 진정시키려 애를 쓰고, 아이의 두 발을 붙잡고 한국말로 "괜찮아! 잘했어! 대단해!" 하며 달래는 나 역시 매번 진땀을 흘린다.

30분이 3시간처럼 길게만 느껴졌던 아이의 치과 치료를 끝내고 돌아오던 날, 그제야 긴장이 풀린 아이에게 뒤늦은 후회와 고백을 늘어놓았다.


"엄마도 어렸을 때 치과에 참 자주 갔지. 너처럼 겁이 많아서 너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의사 선생님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진저리를 쳤어. 병원에 가는 게 너무 싫어서 외할머니한테 아파도 말 안 하고 도망도 치고 숨기고 그랬는데, 그러고 나서 뒤늦게야 병원에 가면 더 아프고 더 무서운 치료를 받아야 하더라고. 귀찮더라도 열심히 양치하고, 미리미리 병원에 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그 와중에도 도통 희망을 건네지 않는 엄마를 아이는 원망의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어른이 되어도 아픈 건 싫고 병원이 무서운 곳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 굳이 센 척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따끔한 예방주사가 나은 법이다.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네 인생. 어쩌면 산다는 건, 병원에 자주 가거나 조금 덜 가거나 그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저 낯선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만이라도 되도록 아프지 않은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오늘도 우리가족은 서로를 다독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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