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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Oct 28. 2019

나의 안식처 화장실

'나만의 방’을 찾아서


"똑똑똑, 저기 엄마 나 할 말 있는데..."

윙윙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에 섞여 화장실 문 너머로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깐만 기다려 줄래."

조금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가라 앉히며 아이에게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려 애를 쓴다. 이런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쫑알쫑알 문 밖에서 잘 들리지도 않는 얘기를 계속 늘어놓는다.

"엄마가 기다리라고 했지! 제발 나 좀 방해하지 말아 줘!"

"치, 알았어."

볼멘 목소리로 대답한 아이가 후다닥 도망가는 소리가 들리면 기분은 싸해지고, 엉거주춤 변기에 앉아 파르르 화를 내버린 내 모습에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또 참지 못하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화장실 문 밖에서 아이들이 말을 걸거나 무언가를 요구하면 유독 분노가 치민다. 도대체 나는 이곳에서조차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과, 가장 신성한 나만의 공간을 침범당했다는 요상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언제부터 화장실은 나에게 가장 안락한 공간이 되었을까..

"엄마는 화장실을 제일 좋아해"

"엄마는 심한 변비인가 봐"

"화장실은 엄마의 방이야"

내가 생각해도 약간 병적일만큼 나는 화장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다. 그만큼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으니 이이들이 놀리는 소리에도 그저 웃을 뿐이다.


첫 아이를 낳은 후부터 내가 가고 싶을 때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고 화장실을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이와 거의 한 몸처럼 붙어있다 보니 아이가 잠시 잠이 들거나 누군가 대신 봐줄 때가 아니면 맘 편히 화장실에 갈 수 없었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엄마들은 변비를 시작으로 심하면 치질이라는 정말 불편한 지병을 얻게 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두 번의 출산 이후 그것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다 보니 원치 않아도 화장실에 머무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아이가 이리저리 기어 다니고 움직임이 커질수록 불안함도 더욱 커졌다. 둘만 집에 있을 때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나는 일단 아이를 쏘서(보행기처럼 생겼지만 이동은 할 수 없고 한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기구)에 앉혔다.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쏘서를 문 앞까지 쭈욱 끌고 와서는 아이와 대화도 하고 웃기도 하며 그렇게 볼일(?)을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엉거주춤 앉아있는 엄마와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맞추며 까르르 웃던 아이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아이와 나는 민망한 시간들을 참 많이도 공유했다.


두 아이가 더 자라서 어린이집에도 가고 집에서도 의젓하게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자 이제 다시 예전처럼 문을 닫고 혼자 화장실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너무나 당연한 시간과 공간이었지만,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되니 그것은 당연함이 아니라 감사고 희열이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화장실에 앉으면 더없는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끼게 된 것이.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한 뒤로는 나가서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싸이월드나 페이스북, 카카오 스토리와 같은 sns로 세상과 소통하는 일이 더 잦아졌다. 여느 엄마들처럼 모든 사진첩과 이야기는 아이들의 육아로 채워지고 점점 나의 이야기와 모습은 줄어들고 있었다. 이따금씩 누군가의 사진첩이나 거울 속에서 퉁퉁 부은 내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흠칫 놀랐던지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느 것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저 무시하거나 잊고 싶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하루하루 말 한마디 더 늘고 웃음 하나 더 보태는 아이들의 영롱함 뒤에 숨어서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멍하니 기다리곤 했다.


그러다가도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나면 이상하게도 다른 세상에 들어선 듯 그렇게 호젓할 수가 없었다. 그 안에서는 눈 앞에 보이는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더 또렷이 오랫동안 바라볼 용기도 생기고, 수건걸이에 하루 이틀이 지나도록 축축하게 걸려있는 젖은 수건이 마치 처량한 내 모습 같아 쓸쓸하기도 했다.

그곳에 들어서면 나 자신에 대한 묘한 연민과 혼자 있다는 홀가분함, 그리고 그동안 어딘가에 밀어놓고 있었던 자존감과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일제히 몰려왔다.

언제부턴가 화장실은 마치 나 자신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는 유일한 공간이 되고 있었다.


하루는 오랜만에 바깥에서 만난 친구가 그런 얘기를 했다.

"너 지내는 모습은 sns로 너무 잘 보고 있어. 그런데 애 키우면서 그렇게 긴 글들은 또 언제 쓰고 올리는 거야?"

"아 그거? 화장실에서!"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는 종이나 원고지에 글을 썼고, 대학교에서 이제 막 컴퓨터로 과제를 작성하기 시작한 세대이다. 처음에는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아 종이에 먼저 쓴 글을 독수리 타법으로 하나하나 옮겨서 타이핑하기도 하고, 그나마도 문서를 저장할 때 '덮어쓸까요?'라는 질문에 '아니오' 버튼을 잘못 눌러서 과제들을 다 날려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보다도 키보드 자판 사용이 서툴었던 같은 과 언니 한 명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손가락의 속도가  따라주지 않아 미칠 것 같다고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상으로 건너가는 사이 어디쯤에서 버벅대느라 답답하고도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종이와 원고지를 버리고 컴퓨터와 하나가 되어 손가락은 자판 위를 날아다녔다. 기자로 일을 하는 동안에는 마감 때마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키보드만 두드리느라 목디스크, 허리디스크로 드러누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느라 잠시 남들의 보폭에 뒤쳐지다 보니 어느새 또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스마트한 모바일폰과 태블릿 PC로 뉴스와 책도 읽고, 직접 사진을 찍고 글을 써서 sns에 올리는가 하면, 간단한 문자나 메일로도 사람들과 바로바로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나는 그러한 변화를 따라가는 데 심한 버퍼링을 앓았다. 머릿속에 아무리 쓰고 싶은 글과 얘기가 있어도 핸드폰 자판으로는 도무지 써지지가 않았다. 손가락에 착착 감기던 나만의 자판과 커다란 모니터가 아니면 내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모바일폰 안에 나만의 둥지를 주섬주섬 다시 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화장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뒤섞이고 엉켜버렸던 생각들이 신기하게도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실타래 풀리듯 한 가닥씩 뽑히는가 하면, 이유 없이 끓어오르는 짜증과 분노도 그곳에서는 말이 아닌 글로 차분히 정리가 되었다.

더 이상 기자도 아니고, 특별한 글을 쓰는 작가도 아니었지만 속에 있는 무언가를 글자로 끄집어내지 못하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청소기를 밀고, 설거지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들과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누군가 읽고 공감해준다면 더욱 기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내가 또 다른 나에게, 혹은 미래의 나의 아이들에게 지금의 내 얘기를 남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감정들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또 화장실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은 가끔씩 나를 놀리려고 말을 걸거나 문을 불시에 열기도 하고, 그때마다 내가 버럭 화를 내거나 혹은 무대응으로 일관하면 쪽지에 "미안해요"라고 써서는 화장실 문 밑으로 쓰윽 내밀며 대화를 시도했다. 어떤 때는 마치 들으라는 듯이 화장실 문 앞에서 두 녀석이 대놓고 투닥투닥 싸워서 안에 갇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필요할 때마다 엄마를 찾고, 언제든 소통하고 싶은 그 맘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침실과 거실, 주방 등 집안의 모든 공간을 맘대로 휘젓는 것도 모자라 화장실까지 점령하려 하는 녀석들이 야속했다.

아이들이 방해하기 전에 뭔가를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초조함, 언제 또 침범당할까 싶어 곤두서는 신경은 나를 점점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 예민함은 더 지독한 변비로 이어졌고 그만큼 또 앉아있는 시간은 길어져, 어느새 나는 진짜 배설을 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내 속에서 처리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와 짜증들을 배설하러 화장실을 찾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안식처였던 화장실마저 그렇게 더 이상 안전하지만은 않은 공간이 되어버리자 갈 곳을 잃은 아이처럼 처량해졌다.




둘째를 낳고 한동안 미술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어느 날 상담 선생님은 내게 가장 아늑한 공간을 떠올려보라고 말했다. 눈을 감은 채 태어나서 그때까지 내가 머물고 거쳐갔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샅샅이 훑다가 겨우 찾아낸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우리 집도 시대에 맞춰 연탄보일러에서 가스보일러로 난방 시설을 바꾸게 되었는데, 그 덕에 한동안 연탄을 쌓아두었던 자그마한 연탄광이 텅텅 비게 되었다. 벽면 가득 시커먼 연탄 자욱이 드리워지고 창문도 없이 그저 자그마한 문 하나가 전부인 ㄴ자 모양의 그 방을 보는 순간 반드시 내가 차지해야겠다는 이상한 욕심이 생겼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들과 함께 북적북적 대가족으로 살았던 터라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도 혼자만의 방을 갖는다는 것은 가당치 않았다. 나 역시도 고모와, 혹은 언니와 늘 짝꿍이 되어 방을 썼기 때문에 나만의 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연탄광이었던 공간은 대각선으로 누워도 몸을 제대로 펼 수 없는 기이한 구조라 그곳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에게 도배를 부탁하고 작은 책상과 책들, 그리고 무엇보다 아끼는 만화책들과 음반들을 쪼르륵 옮겨놓기 시작했다.

방이 완성된 후에는 학교에 다녀오고 나면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혼자 그곳에 들어가 나만의 힐링과 휴식을 만끽했다. 방학 때 친구들이 놀러 오면 제각각의 모양으로 방 안에 몸을 구겨 넣고 누워 만화책을 보거나 음악을 쩌렁쩌렁 틀어놓았고, 대학생이 된 해에는 밤늦게 친구를 불러 몰래 술잔을 기울였다. 방 가운데에 켜놓은 촛불 하나가 기괴한 음악소리에 맞춰 춤을 추던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던 그 밤들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시간이 흘러도 쉽게 사라지지 않던 큼큼한 연탄 냄새와 서서히 침투하던 푸르스름한 곰팡이들이 방구석구석을 갉아먹고 있었지만 젖어버린 책들과 음반을 울며불며 버리면서도 이사하기 전까지는 그 방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내게 그 방은 무엇이었을까. 상담 선생님이 묻기 전까지 20년 가까이 잊혔던 그 공간이 머릿속에서 다시 살아났을 때 나는 귀한 친구를 되찾은 것처럼 기뻤다. 그리고 다시는 그 추억의 공간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이후로 나는 무의식 속에서 연탄광을 대신할 아지트를 내내 찾아 헤매다 마침내 화장실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마치 도피하듯 화장실로 숨어 들어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그 시간만은 가족 중 아무도 나의 존재를 찾지 않기를 바랐다. 그곳도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는 초조와 불안의 공간이 되어버린 후에야 서서히 깨달았다. 나만의 화장실에서 내가 자처하고 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고립이라는 것을. 스스로를 풀어주기보다는 더 단단히 가두고 싶고 숨기고만 싶어 지는 그런 철저한 고립이었다.

열일곱 살의 내가 직접 선택하고 꾸몄던 그 작은 연탄 광은 그 시절 내가 원했던 소박한 즐거움을 전부 누릴 수 있었던 자유의 세상이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런 시간과 공간을 찾아 빙빙 돌게 되리라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책 서두에 강렬하고도 심플한 문장을 남겼다.

여성이 남성들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받거나 번듯한 직업을 갖는 것이 힘들었던 19세기 말에 태어난 그녀가 이토록 쿨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제로 그녀 자신이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받은 유산과 혼자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비극으로 가득했으니, 그것들마저 없던 여성들의 삶은 얼마나 더 팍팍했을까 싶다.

그렇다고 버지니아 울프 같은 희대의 작가도 아니면서, 내가 맘 편히 쓰고 싶은 글을 못쓰는 핑계를 환경이나 경제적 여건에서 찾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나보다 200년 전에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어떤가. 가난한 목사의 딸이었던 그녀는 자기만의 방은커녕 제대로 된 테이블도 없어서 가족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응접실의 작은 책상에서 글을 썼다. 그나마도 가족 이외에는 자신이 글을 쓴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 손님이 오면 재빨리 원고를 숨기고, 누군가 오면 미리 알아차리기 위해 문에 삐걱 소리가 나도 일부러 기름칠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만과 편견>, <엠마>와 같은 작품들이 그런 비밀스러운 순간의 틈에서 탄생되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제인 오스틴이 실제 사용했다는 자그마한 호두나무 탁자


생각해보니 더블린에 온 후, 태어나서 살아본 집 중에 가장 넓은 집에 살고 있다. 물론 내 집이 아니라 빌린 공간이지만, 무엇보다도 커다란 창문이 놓인 넓은 주방이 무척 맘에 드는 그런 곳이다. 창문 앞에는 우리가 이사 오기 전부터 자리했던 커다란 6인용 식탁이 놓여 있는데, 더블린에 5년 정도 머물다 다시 떠날 생각에 책상도, 테이블도 장만하지 않은 우리 가족은 집안에 딱 하나 있는 그 식탁 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평일에는 주로 남편이 책들을 잔뜩 쌓아두고 노트북 앞에 앉아 논문을 쓰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자연스레 책을 꺼내 숙제를 하거나, 친구들이 놀러 와서 같이 만들기나 그림 그리기를 하는 것도 이 식탁이다. 손님이 오면 잠깐 차를 마시는 응접실 테이블이 되기도 하고, 한국 친구들과 보드게임이나 카드게임을 즐기기에도 최적화된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평소 식탁 위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숟가락이나 냅킨, 과일 그릇과 연필깎이, 펜, 이면지 뭉치 등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때가 많다.

매일 저녁 네 식구가 다 함께 식사를 나누기 위해 쌓여있던 책들과 잡동사니들을 한쪽 끝으로 밀어 두고 음식을 차리다 보면 식탁은 그제야 본연의 기능으로 돌아간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자신만의 책상을 갖지 못했지만, 어쩌면 속으로는 커다랗고 하얀 이 식탁을 저마다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도 나는 이곳을 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새벽 도시락을 시작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여기서 종종거리며 보내는데도 굳이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안주해버리면 주방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할 것 같고, 바닥과 창문을 더 반짝반짝 빛이 나게 해야 할 것 같고 남편처럼 식탁에서 더 많은 의미 있는 일들을 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중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으니 그저 내 것이 아닌 양, 이방인처럼 서성이다가 무심히 쓰윽 지나가고만 싶었다.


오늘처럼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 남편이 침실에서 쉬고 있는 밤이면, 늦은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가끔씩 나는 이 식탁 앞에 앉는다. 아이들이 늘어놓은 색연필과 지우개 가루 사이로 작은 노트북을 펼치고 뭔가를 끄적여볼까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자정은 금방이다. 오늘 하루 우리 가족이 먹고 나눈 음식들의 잔향들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주방 한가운데에 작은 향초들을 켜놓고 촛불이 알아차릴까, 숨소리마저 가만가만 삼키다 보면 어떤 때는 사뭇 경건해지기까지 한다.

종잡을 수 없던 이런 글들이 좌충우돌 끝에 마침표를 향해 갈 때면 가끔은 이 주방도 마술처럼 나만의 방이 되어주는 것 같다. 실은 그동안 종종 이 식탁에 의지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의자에 등 한 번 편히 기대지 않은 채 머물다 일어나곤 했다. 화장실보다 더 편안한 의자와 넓은 창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락함을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다.

늦은 밤 제일 마지막으로 주방을 둘러보고 딸깍 스위치를 내릴 때면, 마치 야근을 끝내고 퇴근하는 기분이 드는 것처럼 이곳은 가정주부인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의 일터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비단 주방뿐이 아니라, 집안 어디에서도 맘을 제대로 풀어놓지 못했었던 건, 나만의 방 같은 작업실이 없어서도 아니고, 집안일에 치어 시간이 부족해서만도 아니었다. 매일 아침 식탁에 앉아 넋을 놓고 바라보던 흘러가는 저 구름처럼, 그저 이도 저도 아닌 어떤 것에도 마음과 열정을 쏟아붓지 못했던 뜨뜻미지근함과 게으름이 어느새 내 속에 둥둥 차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했을 뿐이다.

무얼 듣고, 보고, 하고 싶은지,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 모른 채, 그저 모든 것으로부터 방해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쌓일 때마다 오히려 나 자신을 화장실의 고립으로 몰고 가는 편이 쉬웠으니까.

솔직히 나는 만끽할 공간이 아니라, 만끽하고 싶은 그 무엇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똑똑똑”

아이가 다시 노크를 한다.

“엄마, 언제 나와? 아직도 멀었어?”

신기하게도 오늘은 화가 나는 대신 조금 짠한 마음이 든다. 자꾸 나가달라고, 비켜달라고 징징대는 나를 문밖에서 기다려준 가족들에게, 마음 둘 곳 없이 헤매다 이곳에 오래 눌러 앉게 한 나 자신에게 괜스레 미안해진다.


두렵더라도 이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와야 겠다.

더이상 열일곱의 소녀는 아니지만 다시 신나게 나만의 방을 만들어야 겠다. 홀로 갇혀 문고리를 잡고 숨는 곳이 아닌, 잔잔한 음악에 따뜻한 차 한잔 나누며 누군가와 호흡을 나눌 수 있는 그런 환한 방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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