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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Nov 15. 2019

가을 속 더블린을 걷는다

차가 없어야만 얻을 수 있는 행복

요즘 더블린의 날씨는, 아무리 좋게, 최대한 순화된 표현을 생각해내려 해도 정말이지 '그지'같다. 원래부터 변덕스럽고 축축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산을 모조리 꺾어버리는 성난 바람과 더욱 굵어진 빗줄기, 그리고 제법 낮아진 기온이 삼단콤보로 힘을 합쳐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게다가 아침 8시는 지나야 뜨고 오후 4시 반이면 지는 짧아진 해 덕분에 하루 내내 할로윈처럼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아이들의 학교에서 집으로 향하는 트램을 타러 가는 길

어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하굣길에도 어찌나 비가 쏟아지던지, 들고 있던 우산이 무색하게 재킷과 가방들은 모조리 젖어버렸고 신발 안까지 척척해졌다. 아이들이 일어날 시간에 맞춰 타이머를 지정해놓은 라디에이터 위에 밤마다 신발과 재킷, 가방, 필통 등을 나란히 올려놓아야 그나마 아침에 조금 뽀송해진 그것들을 다시 장착하고 학교에 갈 수 있다. 하지만 현관문을 나서면 기다렸다는 듯 널뛰는 바람과 빗방울의 세상에 몸을 맡겨야 한다.

날씨가 그러거나 말거나 우산을 거부하고 여느 아이리쉬처럼 묵묵히 빗속을 걸어가는 아들 녀석이 기특할 지경이다. 그 와중에도 아직 해가 채 잠이 깨지 않은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로 일제히 손을 흔들고 있는 노랗고 빨개진 가을 잎들이 눈에 들어온다. 절반 이상은 젖은 낙엽이 되어 바닥에 착 달라붙어 있지만 아무도 굳이 쓸어내지 않는 그 자연스러운 모습이 이제는 정겨우면서도, 이렇게 또 가을이 빗물이 쓸려간다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올 가을은 비바람에 놀아나느라 따뜻한 가을볕 아래에서 훈풍을 만끽할 겨를이 없었다.


더블린에서 지내며 가장 불편한 것과 좋은 것을 꼽으라면 동시에 한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많이 걸어야 하고, 많이 걸을 수 있다는 것'

우리는 차가 없다. 넓은 주차장에 저마다 차를 두 대씩은 주차해놓은 동네의 여러 집들 사이로 우리 네 식구는 늘 뚜벅뚜벅 걸어 다닌다. 처음 더블린에 왔을 때 차가 없이 산다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심각한 우려를 표했지만 1년만 살아보고 고민하겠다는 생각이 벌써 3년을 넘어서고 있는 중이다.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1시간에 한 대씩 오는 버스 시간을 체크해야 하고, 15분을 꼬박 걸어야 탈 수 있는 트램이 그나마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한동안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덕분에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는 법을 배웠고, 걸으면서 주변의 나무들과 우리 동네를 둘러싼 나지막한 산, 시시각각 안색이 바뀌는 하늘과 구름을 살필 줄 아는 여유를 얻었다.

이따금씩 이곳에 오기 전 서울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다 보면 괜스레 겸연쩍어진다. 차 한 대, 오토바이 한 대가 쌩쌩 오고 가기에도 위험천만했던 좁은 골목들을 지나 아이들과 어린이집, 학교, 병원, 학원 등을 다니면서 힘들 때면 언제든 택시를 잡아타거나 자동차를 이용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지하철 역들은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나마 가끔 걸었던 기억은 운동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남산 산책로를 오고 가던 것이 전부다. 한 달에 몇 번 겨우 시간을 내어 한두 시간 남산을 걸어야 그나마 계절이 바뀌는 것을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서울살이에서의 '걷기'는 일부러 시간을 내고 장소를 정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색잎으로 날 반기던 남산 산책로의 아름다운 가을 나무들.

몇 주 전, 하교하는 아이들을 데리러 나선 길에 오랜만에 책을 읽어주는 팟 캐스트를 들었다. 소설가 김영하가 읽어주는 책의 구절이 마침 내가 걷고 있는 풍경과 마술처럼 어우러졌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에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숲이나 길, 혹은 오솔길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걷는다고 해서 무질서한 세상이 지워주는 늘어만가는 의무들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숨을 가다듬고 전신의 감각들을 예리하게 갈고 호기심을 새로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걷는다는 것은 대개 자신을 한곳에 집중하기 위하여 에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계를 이해하고 남들과 나눔으로써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고유한 자질은 수백만 년 전 인간이 직립하게 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과연 인간은 직립하여 두발로 걷게 되면서부터 손과 얼굴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수천 가지 운동이 가능해짐으로써 의사소통의 능력과 주변 환경을 조종할 수 있는 여지가 무한히 확장되었고, 그와 더불어 두뇌가 발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인간이라는 종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르루와 구랑'은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인류가 아득한 옛날부터 자동차를 타고 와서 땅 위에 내려서는 중이라고 믿고 있다.
아이들을 스쿨버스에 태워 보낸 후 가끔 혼자서 이 길을 산책하곤 한다.

'다비르 르 브르통'이 쓴 <걷기 예찬>이라는 책의 일부였다. 걸으면서 책의 여러 구절을 듣다 보니, 내가 움직이고 걷는 이 행위가 무척이나 유의미하다는 생각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자동차가 없어야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과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더블린에 살면서 아이들이야 말로 서울에서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걷게 되었다. 학교를 오고 가거나 친구네 집이나 학원을 갈 때도 다른 친구들과 달리 한참을 걸어 버스나 트램을 타다 보니 하루에 만보 이상씩은 늘상 걷게 된다. 덕분에 길을 걸으며 아이들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주로 하굣길에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쫑알쫑알 늘어놓기 바쁜 딸아이가 며칠 전에는 이런 얘기를 해줬다.

"오늘 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언제인지 투표를 했어. 무슨 계절이 가장 많았는지 알아?"

"그야 여름이지!"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나 역시도 더블린과 첫사랑에 빠진 것이 처음 더블린에 도착했던 환한 여름의 어느 날이었고,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을 만끽하고, 다시 여름을 떠나보내며 한 해를 보낸다 해도 과언이 않을 만큼 여름에 목을 매며 살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맞았어! 나도 여름이 제일 좋다고 했어. 그다음으로는 가을! 그리고 신기하게 겨울을 좋아하는 애들도 몇 명 있었어. 아마도 걔네들은 몇 년 전처럼 쏟아졌던 눈을 기다리는 것 같아."

몇 해의 가을을 보내면서 걸음을 멈추고 찍었던 우리 동네의 풍경들

그러고 보니 요즘 나는 여름과 이별한 지 꽤 되고도 못내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다가오고 있는 겨울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솔직히 더블린의 가을도 꽤 근사하다. 우리 동네를 비롯해 어느 곳을 둘러봐도 커다란 나무들과 사시사철 푸른 잔디가 즐비하고 그 뒷 배경으로 탁 트인 하늘이 자리하고 있으니, 고엽들이 휘날리는 가을길을 걸을 때마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누비고 있는 듯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귀에 이어폰까지 꽂고 가을에 어울리는 음악들까지 OST로 깔아놓으면 감정은 절정에 달한다.

올해는 이상하게도 유난히 비바람이 잦고 날씨가 좋았던 날의 기억이 많지 않아 앞으로 올 겨울에 더욱 겁을 먹고 말았다. 그 탓에 가을까지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조금 억울해졌다.

 

오늘은 볼륨을 크게 키우고 얼마 남지 않은 이 계절을 모든 감각으로 느끼며 걸어야겠다. 째지(Jazzy)한 'Autumn leaves' 연주곡도 좋고, '가을 아침' 같은 청명한 가을 노래도 좋지만, 어쩌면, 내 인생도 가을이라는 이 계절의 어디쯤 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겸허해지는 지금, 이 노래가 내 마음을 다정하게 보듬어줄 것 같다.


가을 시선

한영애 작사, 이병우 작곡


이제는 모두 돌아가
제자리에 앉는다
불타는 열정에
가리어졌던 고운 얼굴들이
미소를 보내는 시간

떠나간 착한 연인들
서로 안부를 묻고
다락방 전설이
끝나기 전에 그리운 손을 잡고
고맙다 인사를 하네

해는 유리 거울로
달은 그림자 너머
별은 벌거벗는 이 가슴에
깊어지라고 더 깊어지라고
평화롭게 반짝이면서
안으로 뜨네
사랑...
아름다운 길 용서를 만드네
드높은 하늘
모든 것 이해하며 감싸 안아주는
투명한 가을날 오후

모든 것 이해하며 감싸 안아주는
투명한 가을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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