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뉴스 봤어? BTS가 미국, 영국, 프랑스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에서도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어."
"엄마, 얼마 전에는 <기생충>이 오스카 상도 받고, 여기서도 상영을 시작했잖아! 한국이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네!"
"그런데 요즘은 또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한국이 많이 힘든 상황이어서 걱정이야"
"아일랜드에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생겼대. 어쩌면 좋아!"
요즘따라 식탁에서 아이들과 한국에 대한 뉴스를 주고받는 횟수가 늘고 있다. 한국에 살 때는 신문이나 포털 사이트에서 따로 언급해주는 것 말고는 해외 뉴스를 일부러 찾아보는 일이 자주 없었지만, 아일랜드에서 지내게 된 후로는 이곳의 채널 중 하나인 RTE 뉴스도 종종 확인하고, 구글로 BBC나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들도 보게 된다. 아일랜드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이곳과 연관이 깊은 브랙 시트 소식도 읽어 보지만, 무엇보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외신에서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할 때도 찾곤 한다.
처음 아일랜드 왔을 때는 이곳 뉴스에 한국보다 북한 관련 얘기가 더 많고, 사람들도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North인지, South인지 묻는 경우가 꽤 많아서 신기하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 우리나라와 나 중심으로만 세상을 생각하고 바라보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시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안으로만 향해있던 눈과 귀가 점차 밖을 향해 열리고 조금씩 객관화되어가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아일랜드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생각보다 큰 관심이나 정보가 없다는 사실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어찌 보면 나 역시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아일랜드라는 나라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기생충>이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올해 아카데미에서 4관왕을 거머쥐었을 때,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곳의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때마침 시작된 선거 열기만 뜨거울 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자 친구인 헬렌은 축하의 메시지도 보내주고, 아일랜드 신문에 난 기사를 스크랩해서 전해주었지만, 아이들 학교의 엄마들이나 이웃들은 큰 반응이나 언급이 없었다.
시내의 극장에서는 <기생충>이 매진되기도 하고, 상영관과 시간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리 동네 멀티플렉스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갔을 때는 극장 안에 포스터 한 장 붙어 있지 않았고, 상영시간도 오후에 딱 두 타임뿐이었다. 평일 5시 30분이라서 그런지 관객석의 절반 정도가 채워졌는데,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조용하고 점잖게 영화를 관람하고 일어섰다.
문득 지난해 아들 녀석과 <어벤저스 앤드 게임>을 보기 위해 몇 날 며칠 열심히 예매를 하다 실패하고 결국 밤 9시가 넘는 타임에 딱 두 자리 남은 곳에서 겨우 보고 왔던 기억이 났다. 물론, 영어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친근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기생충>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단지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문화가 영국 건너 작은 섬나라인 아일랜드에서 여전히 생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을 새삼 인식할 수 있었다.
치과에서 내게 한국어로 인사를 하던 아이리시 의사가 넷플릭스로 <슬기로운 감방생활>과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 <힐러> 등을 재미있게 봤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얼마나 뿌듯했던가. 한류의 불모지처럼 느껴지는 이곳에도 이제 곧 한국 드라마, 영화, 음악의 바람이 불 거라는 기대에 내심 부풀었고, 결국 BTS가 아일랜드에서도 앨범 순위 1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은 더욱 짜릿할 수밖에 없었다.
"자막, 서브타이틀이라는 한 1인치 정도 되는 그 장벽을 뛰어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기생충>이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을 때 봉준호 감독은 골든글로브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 BTS는 미국의 TODAY SHOW의 생방송에서 "BTS가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무엇보다 우리의 음악이 언어, 국적, 인종을 초월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세상이 어찌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불과 10년, 2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마다 아날로그 시대를 거쳐온 옛 사람인 나는 가끔씩 어안이 벙벙하다.
"우리 어릴 적에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낮에는 TV가 방영되지 않았고, 음악은 라디오와 테이프와 LP, CD로만 들을 수 있었어"라는 얘기를 꺼내면, 2007년, 2010년에 태어난 두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원시인 보듯 우리를 바라본다.
인터넷만 켜면 전 세계 사람들이 뉴스와 동영상, 음악, 메일과 메신저 등을 통해 쉽게 만날 수 있고, 바로 옆집의 소식보다 다른 나라 정보를 더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이 시대에 엄마, 아빠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을 것이다. 번역기를 이용하면 대부분의 외국어도 거칠게나마 바로 번역이 가능하고, 유튜브에 올라오는 인기 높은 동영상이나 뉴스들은 금세 다른 유튜버를 통해 세계 각국의 언어로 재생산되다 보니 그야말로 전 세계의 ‘핫’한 소식을 앉은자리에서 언제든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나서 인터넷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전 세계를 직접 오가는 것 역시 예전보다 수월해졌다. 현실에서도 서로 언어와 국적, 인종이라는 장벽을 더 쉽게 넘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장벽을 뛰어넘는 것 중에 바이러스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전 세계가 쉽게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이 즐겁고 편리하면서도 그만큼 참 무섭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기쁘고 자랑스러운 소식에 이어서 코로나 19에 대한 뉴스가 들려오자, 처음에는 중국에 국한된 일인가, 했다가 점차 한국과 일본으로 퍼지면서 맘을 졸이기 시작했고,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국가에도 비상이 걸리자 만감이 교차했다.
단순히 전염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한국인 환자가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해외에 사는 아시아인들 사이에서는 미리부터 묘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처음에 중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으로 한국 뉴스가 떠들썩할 때 아홉 살 딸아이는 내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엄마! 학교에 가서 어떡해? 우리 학교에 중국 애들 몇 명 있는데, 걔네한테 옮는 거야?"
내 딸에게서 이런 물음이 나왔다는 것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마냥 웃음이 터졌다.
"아냐. 이 질환은 중국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게 아냐. 감기처럼 걸린 사람의 침이나 콧물이 상대방에게 묻거나 튀어서 내 입이나 콧 속으로 들어가야 옮을 수 있는 거야. 무조건 중국 사람이라도 의심하면 안 되지. 그 친구들은 아일랜드에서 가만히 생활하고 있을 뿐이잖아."
이렇게 말은 했지만, 초기에 중국이라면 모두 벌벌 떨며 막아야 한다 주장하고, 길에서 동양인을 보면 무조건 환자 보듯 피하거나 손가락질을 하던 세계 이곳저곳의 소식들이 떠올랐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홉 살 소녀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미성숙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한국의 확진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자, 이제는 중국인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람인 우리가 더 걱정이었다.
물론, 우리 가족은 아직까지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일이 없지만 한국어로만 화장실 금지를 공지했던 네덜란드의 항공사, 중국인을 비롯한 동양인들의 출석을 무조건 금지했다는 이탈리아 어느 학교의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고, 개인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사례들이 SNS나 유튜브에 종종 공개되면서 한국의 지인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안부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친한 한국인 친구가 런던의 어느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어떤 흑인이 자신을 보자마자 벌레 보듯 피하며 딸에게 코로나 어쩌고 저쩌고 하며 손을 계속 씻겼다는 이야기나, 더블린의 루아스에서 동양인의 가방이 닿기만 해도 물티슈로 연신 문질러대는 아주머니를 봤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그저 조금 씁쓸했다. 이곳의 한국인 지인들도 그냥 가벼운 감기로 기침이 나는데, 때가 때인지라 밖에 돌아다니기 무섭다 하고, 나 역시도 버스나 루아스에서 재채기라도 나면 괜스레 눈치를 보고 있었다.
헬렌 _ 한국에 있는 너희 가족들은 모두 별일 없이 건강하니?
나 _ 다행히 우리 가족은 무사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한국 정부는 적어도 중국과 일본보다 열심히 애쓰고 있는 건 분명해요.
헬렌 _ 맞아. 그리고 한국 정부는 더 정직한 것 같아. 한국은 좋은 의료 서비스를 갖췄잖아. 하지만 우리는....
나 _ 아일랜드에서는 제발 코로나가 발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와 같은 동양인은 밖을 다니기가 두려워질 것 같아요.
헬렌 _ 내 생각에 너는 안전해. 이탈리아를 여행한 이들로부터 감염되는 것이 더 위험해. 나는 아일랜드인들이 바보처럼 인종차별 같은 건 하진 않기를 바라. 하지만 어디나 몇몇의 바보는 있기 마련이지.
나 _ 맞아요. 그들이 대부분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도 알아요. 어쩌면 그것은 나의 자격지심이죠.
헬렌과 이런 대화를 나눈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일랜드에도 확진자가 생겼다는 뉴스가 떴다. 그리고 일주일 가량이 지난 현재는 19명의 감염자가 발생했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얼마 전 이탈리아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관계로 2주간 학교 문을 닫는다는 소식도 함께 들려왔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 중 누군가 한 명만 감염이 되었다면, 그 가족이 내가 엊그제 다녀온 쇼핑몰을 비롯하여 이미 이곳저곳을 쏘다녔다면 언제 어떻게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몇 달 전부터 이곳에는 지독한 독감이 돌고 있으니 특별히 검사를 해보지 않는 한 누가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이고 누가 독감 환자인지 구분할 방법을 없을 것이다.
나는 헬렌에게 한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드라이빙 스루 Drive-through' 검사에 대한 기사를 보내주었다.
"정말 대단해 보여! 아일랜드가 그것을 진행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 하지만 그러길 바라자고!"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아일랜드의 의료시스템은 조금 못 미더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비단 외국인인 나뿐만 아니라, 현지인인 그녀 역시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혹시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이곳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언어도 환경도 낯선 외국의 병원에 따로 격리되야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떡해야 할까,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확진자 뉴스가 발표된 다음 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픽업하기 위해 학교로 향했다. 마트의 손 세정제는 거의 다 팔렸고, 시내의 아시안 마켓들은 배달 주문이 폭주하는 대신 오히려 사람들이 발길이 한산해졌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듯 거리는 너무나 평화롭고, 루아스 안의 사람들도 예전과 달라 보이지 않아다. 그 심한 비바람이 부는 데도 평소에 마스크를 쓴 사람을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스크를 쓰거나 유난을 떠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비염 때문에 루아스에서 연신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훌쩍이는 내게도 사람들은 다행히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았다.
현재까지 아일랜드의 뉴스를 통해서는 감염자들의 성별과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 그리고 아일랜드의 동서남북 중 어느 지역에 살고 있다는 정보밖에는 알 수가 없다. 적어도 그들이 한국이나 중국을 거쳐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인종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참 다행이라고 여겨지면서도 이 시간에도 아픔을 당하는 이들을 걱정하기보다 내 안위를 생각하는 스스로가 참 못나 보였다.
솔직히 가장 무서운 것은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한국에 가만히 살고 있었다면 그다지 의식하지 못했을 '인종차별'과 마치 얇은 투명막으로 덮여 있어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언어, 인종, 문화의 장벽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것을 계기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 더욱 두려움이 느껴졌다.
더블린에서 외국인으로 살아오면서 다른 인종의 사람들에게 편견과 차별의 시선 대신 존중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힘은 '교육과 경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의 두 아이가 그런 교육과 경험을 얻고 있다는 현실에 참으로 감사한다. 처음 더블린에 왔을 때 나와 남편은 아이들의 학교조차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립학교에 보낼 형편은 도저히 되지 않았고 공립학교 가운데 마땅한 곳을 찾아야 했지만 대다수의 아이리시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가톨릭 학교의 문턱은 더욱 높게만 느껴졌다. 그때 지인이 소개해준 'Educate together'라는 이름의 학교를 알게 되었다. 기존의 국립학교와는 많은 것이 다른 이 학교는 마치 체인점처럼 더블린을 비롯하여 아일랜드 지역 여러 곳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이 학교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Educate together'는' 평등'과 '존중'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아이들에게 그 어떤 종교를 강요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으며 자유롭게 개인의 신앙을 인정하고, 교실에서는 서로 다른 국적과 인종, 성별을 가진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교육한다. 또한 선생의 무조건적인 권위를 강요하기보다는 아이들 중심의 독립적인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교였다.
실제로 학교에 가보니 우리와 같이 외국에서 지내다가 오게 된 가족들도 많았고, 외국인이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아이리시들이 섞여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교사와 학부모의 연대가 잘 되어 있어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 또한 유기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기존의 아일랜드 학교들은 가톨릭이나 성공회와 같은 종교색이 짙고 아일랜드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이곳에서는 당연한 현상이고 문화이지만, 나의 아이들이 좀 더 다양한 친구들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현재 아이들의 반을 둘러보면 아일랜드인을 비롯하여 한국, 브라질, 이집트, 체코, 러시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미국, 영국, 인도, 대만, 말레이시아 등 다양한 나라의 부모를 둔 아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가끔 새로운 아이가 전학을 오면 나와 남편은 "어느 나라에서 왔대?" 하고 제일 먼저 물어보지만 정작 아이들은 그런 것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고 잘 모를 때가 많다. 부모의 국적이 각각 다른 아이들도 있고 그 부모조차도 뿌리가 다양해서 굳이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그냥 또 하나의 피부색을 지닌 새로운 친구가 생긴 것일 뿐 편견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런가 하면 학교에서는 종종 서로의 뿌리와 국가를 알고 이해하기 위한 교육도 꾸준히 실시하고 있었다. 꼭 자신의 나라가 아니더라도 관심이 있는 국가에 대해 조사하여 발표를 하기도 하고, 선생님들은 때마다 각 나라의 명절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다.
언젠가 다시 한국에 돌아가게 되겠지만, 나의 아이들이 이곳의 환경을 통해 배우고 몸으로 익힌 소중한 것들이 앞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데 큰 바탕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일랜드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적이 있냐고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워낙 인간관계가 좁아서 많은 이들과 부딪힐 일은 없었지만 길을 걷다 보면 당연하다는 듯 중국말로 인사를 던지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처음에는 동양인은 모두 중국인이라 여기는 그들이 불편했지만 그중 누군가는 순수하게 내게 인사를 하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고, 중국인으로 여겨지는 것을 싫어하는 나 역시 중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때문은 아니었나 생각하곤 한다.
한 번은 정류장에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중국어와 일본어 번역기의 볼륨을 키우고 키득거리는 십 대 소년들을 만났는데, 오히려 내가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계속 바라보자 시선을 피하며 황급히 도망가버렸다. 당시에는 기분이 나빴지만 아마도 인종차별을 하려 했기보다는 호기심을 표현하는 데 서툴었던 어린아이들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해부터 일주일에 한 번 씩 영어를 배우기 위해 모이는 이민 여성들의 모임에 가끔 나가고 있다. 그곳에서는 한국과 중국을 비롯해, 이란, 러시아, 벨라루스, 이집트, 모로코, 인도 등 평소에는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낯선 나라의 여성들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영어를 배우는 것보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외국에서도 똑같이 경험하는 육아의 고충과 이민자들의 어려운 점을 나눌 수 있어서 더욱 값진 시간이기도 하다.
몇 주 전 그곳에 새로운 여성이 찾아왔다. 이집트 인근의 한 나라에서 왔다는 그녀는 아일랜드에 온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남자들과는 거의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영어를 잘 못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검은색 히잡을 쓴, 꽤나 보수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듯한 그녀는 내게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었다. ”한국”이라고 답하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중국과 같은 나라지?”하고 되물었다. 당황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는데도 "어차피 중국에서 시작된 나라잖아.”하며 아무리 내가 다르다고 설명을 해도 계속 고집을 부렸다.
결국 예멘 출신의 한 여성이 "너에게 이집트인과 똑같다고 말하면 인정할 수 없듯이, 한국과 중국은 엄연히 역사, 문화, 언어가 모두 다른 나라야.”하고 설명하며 중재에 나섰다.
막상 그 자리에서는 기분이 조금 나빴지만, 돌아온 후 곰곰 생각해보니 그것은 단순히 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교육과 정보가 부족했던 것 때문이라 여겨졌다. 그녀의 생소한 나라와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나 역시도 그녀를 직접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집트 인근의 나라들은 다들 비슷비슷하겠지, 하고 얼버무리며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내가 더욱 가까워지고 서로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면, 나라, 언어, 인종과 같은 서로를 구분 짓던 단어들은 의미가 없어지고 편견과 무지 또한 서서히 옅어질 것이다. 그저 우리는 또 하나의 '친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세상 속에 서서히 퍼지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앞으로 아일랜드에서도 얼마나 파장을 일으킬지, 그 여파로 서로서로의 간격이 더 멀어지고 내 앞의 사람들을 의심과 두려움의 존재로 보게 만들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온갖 힘을 내어 잘 이겨내고 있는 한국처럼, 전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 돕고 격려하며 이 시기를 잘 극복하기를 기도할 뿐이다. 같이 싸워서 이겨낼 적군이 생기면 한편이자, 친구가 될 수 있듯이, 힘든 이 시간 동안에는 네 탓도 내 탓도 말고 인종도 국적도 뛰어넘고 그저 서로의 안녕을 위해 한 마음으로 응원하는 데만 힘을 쏟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