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her's day'에 생각하는 '마더'의 의미
"자, 그럼 주문하시죠~"
언제 만들었는지 메뉴판까지 들고 온 딸아이 콩이가 볼펜과 주문 노트를 펼치고 상냥하게 묻는다.
메뉴판을 펼치자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름 섬세하게 메뉴를 나누고, 취향에 맞게 굽기까지 고려한 아침식사와 그림이 곁들여진 것이 꽤 그럴싸했다. 섬이의 그림과 콩이의 센스가 이루어낸 환상의 조화였다.
"토스트 두 장에 버터와 딸기잼 발라 주시고요. 와플도 한 장, 그리고 삶은 달걀과 토마토케첩 부탁해요. 음료는 끓이기 위험하니까 물로 주세요."
아빠까지 덩달아 침대에서 주문을 하는 동안 심각하게 받아 적은 새초롬한 꼬마 웨이트리스는 다 되면 부르겠다며 주방으로 총총 걸어간다.
잠이 덜 깬 일요일 아침. 오늘은 'Mother's day'다.
한국이나 미국은 주로 5월에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날을 기념하지만, 영국과 아일랜드는 부활절이 되기 3주 전 일요일이 어머니의 날이다. 지난해에는 남편이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모아 함께 국화꽃 한 다발을 사다 주었는데, 올해는 확실히 서비스가 한결 업그레이드된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되어 주방으로 가보니 버터와 딸기잼을 발라놓은 토스트 옆에 오밀조밀 까놓은 삶은 계란, 그리고 언젠가 버거킹에서 챙겨 온 1회용 케첩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기뻐하기엔 아직 일렀다. 녀석들이 학교에서 만들었다는 손편지를 펼치자, 마침내 제일 큰 감동의 물결이 가슴 한편을 철썩 건드리고 지나간다. 한글은 서툴지만 또박또박 글씨체가 예쁜 콩이와 엄마의 영어 이름으로 6 행시를 지은 섬이의 글짓기 편지까지. '어머니의 날'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롯이 혼자 이런 고마움을 누려도 되는지 조금 얼떨떨했다.
아직도 내겐 낯선 이름, 엄마
첫아이 섬이가 처음 어린이집에서 가져온 종이 카네이션을 받았던 수년 전의 어버이날처럼 여전히 나는 '엄마’라는 큰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민망하고 머쓱하다. 첫 카네이션을 달고 찍었던 사진 속 그때의 나와 이따금씩 거울 앞에서 마주하는 지금의 나나 설익은 모습은 그대로인데, 매번 무슨 날이 돌아올 때마다 감사와 축하를 받으려니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마냥 어색하다.
“자기 배로 애를 낳아야만 엄마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여자가 엄마가 된다는 건 다른 작은 존재한테 자기를 다 내어줄 때예요.”
“엄마가 되는 건 중병을 앓는 것과 같아. 모든 사람이 그 병을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아주 아주 힘든 일이야. 하지만 넌 잘 해낼 거야”
요즘 푹 빠져 보고 있는 드라마 <마더>는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문득문득 엄마에 대한 이런 의미심장한 명제를 던지곤 한다. 눈물을 훔치며 멍하니 보고 있다가도 그 '엄마’라는 단어가 울릴 때마다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극 중 등장하는 여러 명의 엄마에게서 내 모습이 자꾸만 보이기 때문이다. <마더>라는 제목처럼 모성이 과잉 응축된 이 드라마는 저마다 다른 환경에 처한 엄마들의 삶과 캐릭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그럼에도 그들 중 단 한 명도 완벽한 엄마는 없다.
자신의 아이를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육원에 버린 친엄마.
그 아이를 입양하여 친자식처럼 키운 엄마.
그 두 엄마 중 누구에게도 온전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 채 성장한 강수진이라는 여성은 자신이 임시 담임을 맡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혜나라는 아이를 만난다. 그리고 혜나가 친엄마와 그녀의 동거남에게 학대를 당하고 버려진 모습을 발견하고는 아이의 엄마가 되기 위해 함께 도망친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들여다보면 저마다 치명적인 약점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이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애를 쓴다. 때로는 그것이 자신을 망가뜨리고 극단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멈추지 못한다. 그것이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모성애라 믿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결핍으로 점철된 그들의 모습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엄마’들의 삶과 겹쳐진다. 정답은 모르지만 저마다 최선의 '엄마’가 되기 위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많이들 닮아있다. 그래서일까, 마치 결핍은 결핍을 알아보듯 깊은 공감에 마음이 저릿저릿하다.
결국 아이를 유괴한 죄로 법정에 선 강수진은 마지막 변론에서 말한다.
“친엄마와 동거남에게 학대당하고 쓰레기 봉지에 버려진 혜나는 바로 나 자신이었어요.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그 애의 손을 잡고 도망칠 것 같습니다.”
절대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던 강수진이 혜나에게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발견한 순간, 이미 그녀는 엄마가 될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만난 어린 시절의 나, 너
아이를 키우다 보면 마치 어릴적 나를 다시 보는 듯한 묘한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섬이는 달리기를 못하고, 겁이 많고, 매사에 굼뜨고, 길눈이 어둡다. 반면에 읽은 책이나 본 영화의 줄거리를 정리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감성적이고, 욕심이 지나치지 않다.
모두 나를 닮은 것들이다. 아이에게서 내 모습이 보일 때 엄마의 이성과 객관성은 흐려진다. 이미 나는 그 아이의 일부가 되고 아이는 나의 일부가 되어 아이가 느끼는 상실과 고통, 기쁨과 행복이 어느덧 나의 감정이 되어버린다. 날 닮아서 너무 예쁘면서도, 날 닮아 못난 그 모습이 자꾸 아프게 눈에 밟히는 것이다.
유전, 선천성, 후천적 영향.
이런 단어들이 엄마를 종종 아프게 한다는 것을 세상은 잘 모른다. 아이가 이미 가지고 태어난 것도 속에 품고 있던 엄마와 가장 긴밀한 연관이 있고, 자라면서 갖추어가는 다양한 모습 또한 엄마의 영향과 책임이 크기에, 아이의 일거수일투족 안에서 엄마는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다.
“엄마, 왜 나는 맨날 술래만 해야 해?”
섬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하교 후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잡기 놀이를 하다가 내게 달려와 눈물을 쏟는 일이 종종 있었다. 섬이가 힘들게 쫒아가 누군가를 잡고 나면 5초도 되지 않아 아이들은 다시 섬이를 치고 재빨리 달아났다. 가장 느린 섬이는 놀려먹기에 가장 만만했다.
운동장 한 귀퉁이에 서서 종종 그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나는 아이의 손을 낚아채 집으로 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감정적으로 나서서 개입하게 되면 다른 비슷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섬이는 스스로 견뎌내지 못하고 내게 달려오게 될까봐 묵묵히 녀석을 지켜보곤 했다.
대신 늦은 밤 이불속에서 아이에게 고해성사하듯 고백을 했다. “솔직히 엄마도 항상 달리기는 꼴찌였어. 키가 커서 다들 운동을 잘 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제일 늦게 들어가서 모두 실망했지. 그래서 지금도 뛰는 게 참 싫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누구나 잘 하는 거랑 못하는 게 다 다른 법이거든. 대신 너는 너처럼 달리기를 못하는 친구들의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잖아. 그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은 아니야. 그러니까 술래를 너무 속상해하지 마.”
3학년 운동회 날, 섬이는 네 명이 뛰는 달리기에서 4등을 했다. 하지만 녀석은 내 앞에서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분해하지도 않았다. 괜찮다며 쓰윽 브이까지 보였다.
더블린에서 새 학교에 다니게 된 후에도 술래잡기 놀이는 피할 수 없었다.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 사이에서도 녀석이 여전히 술래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 이상 내게 달려와 울지 않는다는 것. 그 속은 알 수 없지만 오히려 히죽 웃으며 술래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섬이가 겨우 잡아낸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20까지 셀 동안 빨리 달아나. 그때까지는 널 잡지 않을게!”
비로소 술래를 면한 섬이는 있는 힘껏 숲 속으로 뛰어갔다.
아이는 친구의 배려에 힘입어 잠시나마 만년 술래의 속상함으로부터, 엄마라는 작은 테두리로부터 조금씩 벗어나 세상을 향해 그렇게 달음질해갔다.
“엄마, 나 태어나고 아빠가 탯줄 자를 때 아팠어?”
여자인지라, 아이 낳는 것에 관심이 많은 콩이는 아이를 낳던 순간에 대해 세세한 것까지 묻곤 한다.
“솔직히 그때 기억은 잘 안나. 너희를 무사히 낳은 게 너무 기뻐서 아픈지도 몰랐던 것 같아.”
어쩌면 탯줄을 자른 그 순간, 아이와 나는 이미 분리됐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아이로 연결됐지만, 한 사람과 한 사람으로 각자의 삶을 부여받았는데도 이따금씩 나는 아이들을 심적 테두리 안에 가두려고만 한다.
혹시 나의 못난 모습을 닮아서 힘들까 봐, 크면서 나처럼 좌충우돌의 삶을 살까 봐 조바심이 나서 아이를 놓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생각과 시야 너머로 훌쩍 뛰어가는 녀석들이 보일 때면 가슴이 짠하다.
싹둑 잘린 탯줄이 이제야 실감이 나는 듯 찌릿한 통증이 뒤늦게야 밀려오는 것이다.
엄마와 아이의 적당한 거리
어떻게 하면 엄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여전히 모르겠다. 매년 ‘Mother’s day’를 맞이하는 사이사이에도 아이는 계속해서 성장통을 겪을 테고, 그것을 지켜보면서 마치 중병을 앓듯 아프기도 할 것이다. 아픈 만큼 녀석들은 또 훌쩍 클 테고, 어느 순간부터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특별히 엄마를 찾는 일도 점점 뜸해질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듯 말이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내 아이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엄마로 가는 길이라면, 나는 아직 엄마가 되는 과정의 초반도 달리지 못한 것 같다. 아니 영원히 그 코스를 완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던지는 숱한 엄마의 명제 안에 갇혀 굳이 자책하는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부족함과 결핍이 엄마로서 나를 더 애쓰게 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그저 날 닮은 주니어가 아니라, 나와 같은 세상의 한 일원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멀리 있어도 어디서든 보이는 저 큰 산처럼 적당한 거리에서 묵묵히 바라봐줄 수 있는 사람.
그래도 살다가 힘들어서 어디론가 손을 뻗고 싶을 때, 언제든 나 여기 있다고 반갑게 손 흔들어 줄 수 있는 사람.
”열심히 살고 있지? 나도 열심히 살고 있어!”
목청껏 외치며 마지막까지 같은 편에서 응원해주는 그 사람. 그 이름이 바로 엄마여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