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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May 20. 2018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아

서로의 캐릭터를 사랑해줘


“엄마, 우리 동네에서 주인공이 누구야?”

섬이가 예닐곱 살이었을 무렵, 쪼르르 내게 달려와 물었다. 결코 쉽지 않은 질문에 머릿속은 잠시 멍해졌다.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질문이 나온 이유를 생각해야 했다. 당시 녀석은 TV에서 방영하는 애니메이션에 한창 빠져 있을 무렵이었다. 나쁜 녀석들과 싸워 이기고 새로운 모험을 향해 주저 없이 떠나는 만화 속 주인공들을 보며 아마도 내가 사는 이 세상과 이 동네에도 누군가가 주인공으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리라. 그리고 이내   "그게 어쩌면 내가 아닐까?"하는 궁금증으로 이어지자 결국 참지 못하고 내게 달려온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녀석에게 "그건 너!"라고 대답해줘야 했다. 너처럼 멋진 애가 주인공이 아니면 누구겠냐며 용기와 희망을 북돋으며 녀석의 어깨가 들썩이게 만들어주어야 옳았다.

하지만 쓸데없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이 엄마는 그러지 못했다.

"응.. 그건 말이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지만, 이 마을에는 딱히 주인공은 없는 것 같거든... 어쩌면 우리 모두 다 주인공이기도 하고..."

말하는 나도, 듣는 아이도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대답에 아이는 김 빠진 사이다처럼 피이~ 하며 다시 TV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구나

태어나고 몇 년 후 자아가 차츰 발달하면서 한번쯤 아이들은 모든 것이 자기 위주로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시기를 거친다. 엄마도 아빠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직성이 풀리고, 장난감도 내 것이고 먹을 것도 모두 내 것이어야만 하는 그런 시기. 그런 때 동생이 생기기라도 하면 아이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세 살 터울로 태어난 동생 콩이가 한참 아가였을 때, 곁에서 꼬물꼬물 놀고 있는 콩이를 빤히 들여다보던 섬이는 또 뜬금포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엄마, 콩이 엄마는 누구예요?"

"콩이 엄마랑 섬이 엄마는 똑같잖아. 병원에서 엄마가 콩이 낳아서 너도 함께 인사했잖아. 그리고 같이 집에 온 것 기억 안 나?"

녀석이 장난을 치는 것인지 아니면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온전히 내 것이었던 나의 엄마를 난데없이 나타난 저 꼬맹이와 나눠야 한다니, 그 현실을 받아들이느라 속이 꽤 부대끼는 것 같았다.

순하고 예민하고 속에 쌓아두는 것이 많은 성격의 섬이는 부산스러운 콩이가 자신의 공간을 휘젓기 시작하자 종종 서럽게 울곤 했다.

"콩이 때문에 아무것도 내 맘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 마음에는 슬픔이 많아요."

엄마와 자신이 이제는 서로에게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눈물을 쏟았던 섬이는 다행히 의연하게 오빠가 되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TV 속의 강하고 멋진 캐릭터들을 보며 다시 주인공 본능이 꿈틀대기 시작했는데, 냉정한 엄마는 다시 한번 그 희망을 외면한 것이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학교에 입학한 후로 섬이는 더 이상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에 다녀오면 자신보다 다른 아이의 이름을 들먹이는 때가 많았다.

"선생님이 OO가 제일 잘 했다고 했어요. OO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요. OO가 그림 그리기에서 상을 받았어요."

숱한 비교와 경쟁 속에서 나보다 더 주목받고, 잘하고, 칭찬받는 아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주변부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녀석의 어깨가 움츠러들 때마다 나는 오히려 가슴에 담아둔 아이의 오래전 물음을 꺼내곤 했다.

'왜 너는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어느 누구나 집안에서는 귀하고 예쁜 자녀이자 손자 손녀이고, 소중한 엄마 아빠지만 막상 세상에 나와보면 어떤가. 내가 누군가에게 쉽게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별 것 아닌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모두가 나를 좋아해 주지는 않는다는 그 쓸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아이는 학교에서 이미 고된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있었다.  


불우하고 불운해도 주인공일 수 있어

2학년 봄방학이던 어느 날, 섬이 콩이 두 녀석과 나란히 앉아 내리 두 편의 애니메이션을 감상한 적이 있다. 첫 작품은 <빨강머리 앤>, 그다음은 <찰리 브라운>. 때마침 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두 편이 극장판으로 개봉하자 엄마의 사심 가득한 취향을 아이들에게 밀어붙였다.

아직 어린 콩이는 스토리를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오래 집중하지 못했지만 섬이는 꽤 큰 인상을 받은 듯했다. 아주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이 집 저 집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던 앤이 결국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 댁에 머물 수 있게 되자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저렇게 힘든데도 친구 다애나에게 쫑알쫑알 쉼 없이 떠들어대는 앤을 마냥 신기해했다.


<찰리 브라운>을 보면서는 좀 더 깊은 감정이입의 세계로 들어갔다. 늘 어깨를 구긴 채 힘없이 걸어가는 찰리에게는 좋은 일이 항상 비껴간다. 야구 경기에서 이기려는 찰나에는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경기가 중단되고, 밤을 새워 힘들게 작성한 독후감 숙제는 몰아치는 바람에 모두 날아가버리는, 어찌 보면 불운을 몰고 다니는 듯한 찰리가 어떻게 주인공일 수 있을까, 의아해하면서도 욕심 많고 세상 물정에 빠른 찰리의 동생 샐리는 콩이를 꼭 닮았다며 재밌어했다.

피아노 밖에 모르는 쉬로우더와 항상 잘난 체 하며 지기 싫어하는 루시,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사는 쿨한 페퍼민트, 공부밖에 잘 하는 것이 없는 어리숙한 마씨, 늘 담요를 끌고 다니는 라이너스, 그리고 사고뭉치이자 해결사인 스누피까지.

"그들 중 누가 제일 좋아?"라는 질문에 섬이는 주저 없이 "라이너스!"라고 말했다. 언제나 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속 깊은 친구이기 때문이란다. 녀석 역시 라이너스와 같은 든든한 친구가 고프다는 얘기는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 섬이가 보곤 했던 히어로 중심의 애니메이션과 사뭇 다른,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한 캐릭터들이 가득한 영화를 본 후 섬이의 시야는 조금 더 넓어지는 듯했다. 특별한 주인공 하나를 그렇고 그런 조연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캐릭터들이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것을, 불우해도 불운해도 충분히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는 조금씩 알아가는 듯 했다.


'나'라는 자화상 들여다보기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소설이란 것을 써본 적이 있다. 등단이라도 하겠다는 거대한 포부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지 첫 과제였다. 탄탄한 스토리나 기발한 기획도 없이, 그저 어디선가 배웠던 것 같은 소설의 3요소인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을 어떻게 만들고 상상해서 버무려야 할지 허둥대고 있을 때 누군가 그런 얘기를 해줬다.

"인물의 프로필을 미리 만들어 놔!"

굳이 소설의 내용 속에서 인물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 인물이 어떤 천성을 가지고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온 사람인지 글을 쓰는 사람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특정 사건과 배경 속에 그 인물을 던져놓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써보라고. 그것이 바로 저마다의 캐릭터를 완성하는 과정임을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소설을 쓰기 위해 끙끙 그렸던 그때의 일들이 자주 떠올랐다. 한 배에서 나왔지만 너무나 다른, 아니 서로 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난관에 부딪치는 일이 많고 육아가 힘에 부칠수록 좌절과 우울감은 깊어졌다.

'나는 내 아이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에 왜 이렇게 쩔쩔매는 걸까?'

아이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말하는 '엄마의 조건’ 안에 나를 구겨 넣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알아야 했다. 나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태어나 자라왔고, 무엇을 가장 좋아하고 힘들어하는지, 마치 남을 보듯이 최대한 객관적이고 덤덤한 시선으로 나를 들여다봤다. 신기하게도 거리를 두면 둘수록 나를 더 꼭 껴안아주고 싶어서 마음이 울컥울컥 뜨거워졌다.  

'그때 정말 힘들었겠구나, 이래서 아프고 괴로운 거구나.'

다섯 살, 열 살의 어린아이, 갓 어른이 된 스무 살. 서른이 넘어 엄마가 된 나 자신이 점점 또렷이 보였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부어주기 위해서는 내 안에 누군가로부터 받은 사랑이 출렁여야 하고, 나에게 그 사랑을 가장 먼저 부어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나를 흠뻑 안아주고 나니, 그제야 아이들이 보였다. 이제는 섬이와 콩이가 스스로를 꼭 안아주고, 시선을 돌려 서로를 안아줄 차례였다. 그때부터 시간이 나면 마치 소설 속 인물의 프로필을 만들 듯이 아이들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전 얘기부터 소소한 에피소드까지.


섬이 이야기

섬이가 열 살 때 그린 자화상

처음 산부인과에 가서 초음파로 너를 봤을 때 마치 하나의 '섬' 같았어. 내 동그란 배 안에 까맣고 작은 섬 하나가 두둥 떠오른 거지. 그래서 그날부터 엄마는 아빠에게 너의 태명을 '섬'이로 정했다고 말했어. 엄마는 지금도 그 이름이 맘에 들지만, 가끔씩 네가 섬나라 아일랜드에 와서 외롭다고 할 때면 태명을 너무 외롭게 지어서 그런가 조금 맘에 걸리기도 해.

엄마는 국수와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너를 가진 이후로는 자주 잔치국수가 먹고 싶었어. 덕분에 아빠는 늦은 밤마다 맛있는 국숫집을 배회하기 바빴지. 지금 네가 이렇게 국수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해.

아주 무더웠던 한 여름의 토요일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네가 세상에 나왔는데, 너는 태어나자마자 의사 선생님 품 안에서 쪼르르 오줌을 쌌어. 그래서 분만실의 모든 사람들이 까르르 웃었지. 탯줄을 처음 잘라보는 아빠는 엄마보다 더 땀에 흠뻑 젖어 있었어.

너는 참 잘 웃었어. 마트에 가면 마주치는 아줌마 한 사람 한 사람과 웃으며 인사를 하느라 바빴지. 머리에 핀을 꽂아 놓으면 사람들이 여자아이인 줄 아는 때도 많았어. 밤에 잠자리에 뉘어 놓으면 네 손과 발을 치켜들고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놀다가 스르르 잠들곤 했어.

첫 돌이 될 때까지 걸을 줄 몰라서 돌잔치 때는 신발을 안 신기고 유모차에 너를 앉혀갔지. 그때 암 투병 중이시던 너의 친할머니는 편찮으신데도 한걸음에 달려와 너를 안아주시고 맛있게 식사를 하셨어. 친할머니는 정말 너를 예뻐하셨어. 가끔은 본인이 살면서 가장 사랑하고 의지했던 하나님보다 손주인 너를 더 사랑할까 봐 겁이 나신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지. 그렇게 너는 참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어.

어떨 때는 참 청개구리 같았어. 말을 막 배울 때는

"엄마 불을 꺼서 눈이 부셔요" 하기도 하고, 스스로 옷을 입기 시작할 때는 매번 거꾸로 뒤집어 입고 나와서 엄마를 어이없게 만들었지. 아가 적부터 너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 한 번 본 만화는 몇 번이고 꼭 그림을 그렸어. 아빠가 직장에서 가져온 이면지가 부족할 정도였어. 콩이가 아파서 밤새 울어대면 엄마가 힘들겠다며 어른스럽게 걱정해주기도 했지. 물론 엄마를 속상하게 한 적도 있어. 엄마 말 듣기 싫다고 몸부림치다가 갑자기 팔이 아프다고 울어서 앰뷸런스 타고 응급실까지 갔는데, 사실은 꾀병이어서 머쓱하게 돌아왔던 일 기억나니? 지금도 그렇지만 너는 참 예측불허였지.

섬이가 어릴적부터 그려온 캐릭터들

콩이 이야기 

섬이가 그린 동생 콩이의 모습

병원에서 본 초음파 사진 속의 너는 참 똘망하고 단단해 보이더라. 마치 작은 콩알처럼 옹골진 모습이 신기해서 '콩이'라고 즉석에서 태명을 지어버렸지. 너를 가졌을 때 엄마는 아빠를 데리고 샐러드 뷔페에 자주 갔어. 그렇게 과일과 샐러드를 자주 먹었는데, 지금은 네가 야채를 별로 안 좋아해서 엄마는 조금 속상해. 뱃속에 있을 때 너는 오빠보다도 발차기가 심했어. 분명 여자애라고 했는데 축구 선수를 하려나? 발레리나를 하려나 엄마는 별별 상상을 다 했었지.

다행히 오빠보다 아주 머리가 작아서 너는 진통 두 시간만에 세상에 나왔어. 처음 태어났을 때는 얼굴이 많이 부어있어서 못난이 그 자체였어. 아빠는 농담으로 공부를 열심히 시켜야겠다고 말하기도 했어. 산부인과에서 퇴원할 때 신생아실 간호사들이 너를 보며 모두 한 소리로 말했어. "아! 이 아이요! 신생아실에서 목소리가 제일 큰 1등이었어요!" 네가 얼마나 쩌렁쩌렁 크게 울었던지 너를 모르는 간호사가 없었지. 집에 돌아와서도 너는 가끔 이유 없이 큰 소리로 울곤 했는데, 그것 때문에 엄마 귀에 이상이 온 적도 있었어. 아빠는 이번에는 성악을 시켜야겠다고 농담으로 말하곤 했지.

너는 오빠처럼 잘 웃지는 않았어. 꼭 필요할 때만 웃고 어린 녀석이 좋고 싫은 것이 아주 분명했지. 밤에도 깊이 잠들지 않아서 엄마는 너를 낳은 후 한동안 세 시간 이상 이어서 자보질 못했어. 대신 10개월부터 걷기 시작했어. 뭐든지 날렵하고 빨라서 운동신경이 좋구나, 생각했지. 다섯 살 때였나. 어린이집 친구가 훌라후프를 하는 모습을 보고 너도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더니 마침내 한 번에 500개 이상을 돌리는 것을 보고 참 대단하다 여겼던 기억이 나.

'엄마, 아빠'라는 말 다음으로 네가 배운 말은 '까까'였어. 지금도 그렇지만 아가 적부터 어찌나 과자를 좋아했는지, 엄마가 자고 있으면 과자가 그려진 그림카드를 들고 와서 "까까, 까까" 하며 과자를 달라고 엄마를 깨우곤 했지. 어린 녀석이 손이 야무져서 두 살 때부터 삶은 달걀, 고구마, 귤까지 척척 껍질을 잘 벗겼어. 아직 덜 깬 아빠 머리맡에 아침 식사로 사과를 가만히 놓아두기도 하고, 양말을 신겨드린다고 다소곳이 발 밑에 앉은 적도 많았지. 이래서 딸을 낳는 거라며 그때부터 아빠는 중증 딸바보가 되어갔던 것 같아.

아빠의 양말을 신겨주던 콩이


아주 특별한 나만의 드라마

잠재된 능력을 모른 채 성장하는 히어로물의 주인공이나 떡잎부터 남다른 위인들의 어린 시절처럼 대단한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작고 소소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이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가끔씩 콩이는 자신의 얘기를 듣다가 훌쩍훌쩍 거리며 다시 아가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때가 그립다고 울먹이기도 했다. 내게는 그 말이 예전에도 행복했다는 위안으로 들렸다.

앞으로도 섬이와 콩이가 특별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쌓아가며 '나'라는 캐릭터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자신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을 마주할 때도 단순히 겉모습만 훑지 않고 좀 더 깊고 넓게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혹여 친구와 오해가 생기거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하고 한 번 더 생각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어쩌면 섬이는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환경도 친구도 언어도 바뀌어 버린 복잡한 환경 속에서 이제 막 사춘기 초입에 들어선 어리숙한 열두 살 소년의 방황을 그리는 성장 드라마에 자신이 한창 주인공으로 열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엄마 역을 맡은 내 입장에서는 유니크한 면들이 한껏 내재되어 있는 그가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로 보이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해주지 못해 이따금씩 안타까울 뿐이라는 것을.

어쩌면 콩이는 이미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어디서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콩이를 위해 적어도 우리 가족들은 기꺼이 단역과도 비슷한 조연으로 물러나 주고 있다는 것을. 오빠는 항상 많은 것을 참아주고, 아빠는 늘 우리 공주! 하면서 두둥실 비행기를 태워주고, 그나마 엄마는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갈등을 유발하는 악역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중년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남편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대하 서사물이다. 굴곡진 어린 시절과 질풍노도의 청년기를 잘 버티며 지금껏 걸어와보니  어느새 부모님들은 모두 곁을 떠났고 대신 자신을 '아빠'라고 애타게 부르는 두 아이가 함께하고 있다. 이제는 괜찮은 어른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곁에는 몇십 년째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소심한 방황을 하고 있는 중년의 아내가 있다. 14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다행히 두 사람은 식성도 취향도 잘 맞고 가끔은 아주 가까이서 서로를 들여다봐주고, 가끔은 한 걸음 떨어져서 기다려줄 줄 아는 지혜를 배웠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 꽤 괜찮은 상대역을 만난 것에 감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거 해피엔딩일까?"

드라마나 영화의 내용이 조금 어두워진다 싶으면 섬이는 불안한 기색으로 내게 묻곤 한다. 부디 모든 것이 행복하게 막을 내렸으면 하는 그 마음을 알기에 "그럴 거야"라고 힘주어 답해준다.

우리네 삶도 그렇다. 어차피 누구도 그 끝은 알 수 없으니 이왕이면 해피엔딩일 거라고 녀석이 생각했으면 좋겠다. 물론 살다보면 이기기보다 질 때가 많고, 가끔씩 지독히 외롭기도 하고, 뭔가 일이 잘 안 풀려서 속상하기도 하겠지만 그럴 땐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면 나를 알아봐 주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별 것 아닌 이야기에도 그저 묵묵히 귀 기울여주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라이너스와 같은

단 한 명의 친구만 곁에 있어도 삶이 그렇게 퍽퍽하진 않다는 것을 녀석들이 알아가기를, 또 누군가에게 꼭 그런 친구가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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