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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Jul 01. 2018

왜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아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그것

엄마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너를 사랑하는 거 알잖아?
근데 좋아하냐고?
난 네가 언제나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라면?
영화 <레이디 버드>에서 크리스틴의 핑크드레스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

영화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졸업 파티에 입고 갈 옷을 고르면서 엄마와 티격태격하다가 탈의실에서 불쑥 나와 자신을 좋아하냐고 묻는다. 오고 가는 모녀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엄마와 백화점에서 서로 맞지 않는 취향 때문에 긴 시간 동안 에너지를 허비했던 어릴 적의 '나'와 열두 살, 아홉 살인 두 아이와 시시때때로 언쟁하며 기운을 빼고 있는 엄마인 '내'가 마치 빙의하듯 동시에 겹쳐졌던 것이다.


"근데 좋아하냐고?"라고 크리스틴이 되물었을 때는 솔직히 뭔가에 푹 찔린 듯 가슴이 저려왔다. 어느새 딸에서 엄마의 자리로 돌아와서는 마치 내 아이로부터 질문은 받은 것처럼 곤혹스러웠다.

엄마가 된 이상,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늘 성인군자처럼 모든 것을 품을 수는 없다.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부터 던지는 "엄마 미워! 엄마는 나만 미워해!"하는 푸념을 종종 들으며 살 수밖에 없는 게 엄마의 숙명이다.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지금 너의 그 말과 행동이 예쁘지 않다고 말하는 거야."

아이를 이해시키려고 에둘러 변명 아닌 설명을 하고 나도 기분은 개운하지 않다. 아이에게 슬픔을 안겨줬다는 미안함과 때때로 내 아이가 예쁘게만 보이지 않는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오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발전하는 모습을 계속 계속 보고 싶은 엄마의 욕심은 서로를 끝없이 괴롭게 한다. 그 욕심을 품고 있는 이상 현재의 아이는 항상 부족한 미완성의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아이는 언제나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예전의 고집쟁이 딸이었던 과거의 나로 돌아가 본다. 머리가 커질수록 마치 세상을 다 아는 양, 엄마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인 듯 얼마나 핏대를 세웠던가.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나 자신을 스스로 너무 잘 아는데,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엄마, 아빠에게 죄송스러워 이따금씩 안 될 것을 붙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가. 하지만 그때의 나는 부족한 그 상태로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만 같다.


어른이 된 지금은, 내가 꿈꾸고 부모가 바랐던 최고의 모습이 되어 있을까. 차곡히 쌓여버린 나이가 떳떳할 만큼 무언가 채우고 완성되었을까. 자꾸만 고개가 저어진다. 그럼에도 지금 이대로의 모습을 누군가 좋아해 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린아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love'와 'like'의 차이

연애와 사랑이 최고의 관심사였던 젊은 시절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찌나 크고 대단해 보였던지. 그 단어를 입에 담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단한 확신이 필요하고, 내뱉은 후에는 어떤 결함이나 균열도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말이 주는 완성도에 압도되어 '좋아한다'는 말을 가볍게 여겼던 것 같다. 마치 '사랑'이라는 최상의 단어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단계이거나 '나쁘지 않다'는 속내를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해 종종 쓰는 말 정도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사랑의 결과인 아이들을 낳고,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키우다 보니 어느덧 '사랑'의 풍년 속에 살고 있다. 부모님을, 남편을,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성스레 진심을 미처 그 말에 꾹꾹 다 담아내기도 전에 더 많은 사랑을 남발할 때도 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사랑 자체보다 의무감이나 책임감, 혹은 죄책감과 미안함을 적당히 섞어 '사랑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섯 살이던 콩이가 어린이집에서 소풍을 가던 날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싸놓은 도시락을 매고, 출근하는 아빠의 손을 잡고 문밖을 나선 아이가 2층 빌라 계단을 종종 내려가다가 갑자가 후다닥 다시 현관 앞으로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철문을 사이에 두고 뜬금없이 내게 소리쳤다.

"엄마 사랑해!"

아직 문 안에서 서성이고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해 버벅대며 대답했다.

"어... 엄마도 사랑해"

어설픈 대답에 안심한 콩이가 다시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느꼈던 그 복잡한 감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즈음 즐겨 듣던 노래 가사가 문득 떠올랐다.


나는 가끔씩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나를 속이며 순간의 진심 같은 말로

사랑한다고, 다 사랑한다고...

음... 나는 너를...

-이영훈 <일종의 고백>


때 묻은 나, 어른은 가끔 버릇처럼 사랑을 내뱉을 때가 있지만 적어도 저 싱싱한 아이는 아니었다. 마알간 진심이 담긴 그 고백을 들은 후 나는 그동안 주문처럼 외워댔던 사랑이란 말과 진심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며 '모성애'라는 말에 짓눌린 나머지 마치 모든 사람을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휴머니스트라도 된 것처럼 버겁게 살고 있는 내가 보였다. 가끔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뒤죽박죽 된 감정들을 그저 '사랑한다'는 말로 뭉뚱그려 표현하다 보니, 되려 사랑은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좋아하기엔 조금 힘든 너의 취향

"저 만화가 그렇게 재밌어? 좀 유치하지 않아?”

"그 음악이 왜 그렇게 좋아?”

"이 옷은 좀 아닌 거 같은데”

"넌 왜 그 음식만 먹으려고 해?”

아이가 크면서 조금씩 자신의 '취향’이라는 걸 드러내기 시작하자 묘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적어도 배우자를 고를 때는 서로 취향이 맞는 상대를 선택할 수 있지만 아이는 다르다. 내 속에서 나왔으니 어딘가 나와 비슷하겠지, 하고 내심 기대하지만 그것이 묘하게 어긋나고 빗나가는 순간이 늘어날수록 크고 작은 충격을 받는다.

배우자나 친구들의 취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과 이해, 그리고 포기의 단계를 거치게 되지만 이상하게도 내 아이의 한해서는 쉽게 포기가 안된다. 고쳐주고 바꿔주고 이끌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동등하게 대하기보다 그야말로 '자식'취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는 조언이라 말하지만, 아이에게는 사사건건 트집과 잔소리로 들리는 대화가 진행될수록 아이의 내면에서는 영화 속 크리스틴처럼  '왜 엄마는 나를 좋아해 주지 않지?' 하는 물음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분명 좋아하는 것은 사랑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끊을 수 없는 단단한 테두리로 우리를 감싸 놓은 것이 사랑이라면, 좋아한다는 것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하지만 직접적인 부딪침과 갈등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랄까. 어쩌면 일상을 보내면서 더 세심하고 중요하게 와 닿는 것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느냐보다는 나를 좋아하느냐일지도 모른다.


"나는 너의 반듯한 글씨체가 참 맘에 들어"

"네 명랑한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막 좋아져"

"네가 알려준 노래랑 영화 찾아봤는데 정말 괜찮더라"

살다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런 사소한 한 마디로 온종일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가끔은 사랑이라는 널따란 울타리가 주는 안정감보다 먼저 다가와 톡톡 어깨를 두드려주는 따뜻한 관심이 더 큰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취향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서로 질릴 만도 한 크고 작은 단점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보이기 쉽지 않은 열등감. 이런 것들을 드러낼 용기가 있고, 서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좋아한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왜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아

지난 주말 오후, 섬이와 콩이는 저마다의 이유로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아이들이 풀이 죽으면 곁에 바라보는 나도 덩달아 마음이 무겁다. 섬이는 몇몇 친구들이 어울리는 곳에 미처 초대받지 못해서 속이 상했다. 더블린에서 아주 어릴 적부터 4~5년 이상 끈끈한 우정을 다져온 아이들 틈에 이방인인 섬이가 비집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섬이의 슬픔을 눈치챈 남편은 푹 가라앉을 틈을 주지 않고 다른 놀거리로 정신없이 녀석을 몰아붙였다. 어느새 우울을 잊은 섬이는 키득키득 웃으며 기분을 풀었다.


섬이보다 좀 더 외향적인 콩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의 부름을 받고 밖으로 뛰어나가 놀곤 하는데, 그날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라라 때문에 밖에서 놀기 싫어! 자꾸 나한테 기분 나쁜 말을 해”

이사 온 첫날부터 호의적이지 않았던 한 여자아이가 그날도 이런저런 말로 놀리며 콩이의 속을 뒤집었던 모양이다.

" 괜찮아,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콩이가 맘껏 울음을 풀어낼 수 있도록 잠시 팔을 열어 주었다.


내가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없듯이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어.
하지만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 그 아이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을 거야. 너도 누굴 미워하면 행복하진 않지?
사람을 좋아하는 건 억지로는 잘 안돼. 가끔은 서로 피하거나,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릴 필요도 있어. 처음 네가 학교에 갔을 때 너랑 짝꿍 하기 싫다고 얘기했던 소피를 봐. 지금은 너랑 친한 친구가 됐잖아.
시간이 흐르면 마법처럼 마음이 바뀌어서 서로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좀 더 내 마음이 자라면 날 싫어하는 그 친구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있는 힘도 생길 거야.
하지만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꼭 나한테 있는 것은 아냐. 가끔은 그 친구에게 원인이 있을 때도 있어. 그러니까 너는 너를 절대 미워하지 말고 계속 더 좋아해 줘.


아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계속 떠들다 보니, 어느새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상대를 좋아하기 힘들었던 건 내 안의 문제이기도 했다. 나의 취향, 나의 고집, 나의 좁은 편견과 지식. 그런 것들이 상대방의 좋은 점들을 더 발견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차단해버린 적도 있다.


신혼 초, 남편이 개어 놓은 양말을 보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동그랗게 돌돌 말아놓는 내 스타일과 달리 양말의 목 부분만 살짝 접어놓은 방식이 조금 신선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은 가끔 서로 다른 짝을 하나로 묶어 놓을 때도 있어서 짝을 잃은 양말 한 짝 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다.

짝짝이로 엮이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힌 양말은 마치 갓 결혼한 우리 부부 같았다. 서로 굉장히 비슷한 줄 알고 결혼했지만 하루하루 살아보니 서로가 얼마나 다르게 태어나 다르게 자란 존재들인지, 우리가 꼭 같은 모양, 똑같은 사이즈인 한 켤레의 양말이어서 부부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서로가 한 짝처럼 딱 맞을 것이라는 착각과 내 생각처럼 상대가 변해주리라는 바람이 얼마나 사소한 상처와 부대낌을 불러오는지는 서로 부비며 살아보아야만 깨달을 수 있다.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의 모든 점을 좋아할 수는 없다. 다만 상대에 대해 좋고 싫은 것을 인지하고 있는 나 자신과, 반대로 나에 대해 좋고 싫은 점을 느끼고 있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용기와 노력이 살아가는 내내 필요할 뿐이다.


딸이 언제나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는 마음에 자꾸만 잔소리 같은 조언을 건네는 크리스틴 엄마의 애정 어린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 그런 엄마에게 지금 내가 최고의 모습이라고 주저없이 말하는 당당한 딸의 모습도 내 눈에는 그저 사랑스럽다. 그들은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 좋아하기 힘든 부분들 때문에 때때로 부딪히고, 아파하고 참아주느라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 그 증거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고 좋아하지 않으면 작은 것에 상처받을 일도 없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아슬아슬 서로를 맞대고 있는 조각들이 모인 퍼즐 같다.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것은 모든 것에 별 감정 없이 등을 돌려버린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이만큼 살아보니 어른이 된다고 아이보다 더 발전했거나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그저 할 줄 아는 것들이 몇 가지 더 늘었을 뿐, 아이와 나는 꾸준히 함께 성장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강요할 수만은 없다. 한뼘씩 크다보면 아이들도 부딪치고 싸우며 타인과 나를 이해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하기 마련이다.

다만 내가 부어줄 것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영양분이다. 이를테면 어른인 나도 가끔씩 누군가에게 듣고 싶은 기분 좋은 얘기같은 것 말이다.


"이유는 없어. 그냥 너라서 좋아."

이따금씩 섬이와 콩이가 시무룩하거나 남편의 기운이 쭈욱 빠져 보일 때 토닥토닥 이 말로 안아줘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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