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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콩 Feb 04. 2019

나한테 실망했어?

가끔씩 물어볼 걸 그랬어


"실망했어?"

한동안 이 말은 남편과 나 사이의 유행어였다.

사실 저작권(?)은 열두 살 아들 녀석인 섬이에게 있다. 섬이는 두세 가지 사이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을 무척 어려워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기까지 남들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고, 뭔가를 결정한 후에도 후회하며 전전긍긍하는 때가 많은데, 그런 성격 때문인지 가족들에게 매번 "나 때문에 실망했어?"하고 묻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녀석이 고민하는 일들은 그리 거창하기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가령

 "오늘 누가 아빠 따라 나가서 장 보고, 누가 엄마랑 집에서 청소할래?"

하고 물으면 여동생 콩이는 거침없이

"내가 아빠 따라 나갈 거야!"

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재빨리 낚아채는데, 뒤늦게 집에 남는 것을 고르게 된 섬이는

"아빠, 내가 같이 안 가서 실망했어? 엄마, 내가 남게 돼서 실망한 거 아냐?"

하며 엄마와 아빠의 안색을 살피기 바쁘다.

밥을 먹다가 배가 불러서 조금 남기게 되어도

"엄마 내가 다 안 먹어서 실망했어?"

하고 묻기도 하고, 냉장고에 한 개밖에 남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자신이 먹게 될 때면

"진짜 내가 먹어도 돼? 다들 괜찮아?"

하며 머뭇거리곤 한다.

나와 남편은 그런 녀석이 안쓰럽기도 하고, 어떨 때는 궁상맞기도 해서 최대한 밝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냐, 괜찮아! 실망 안 했어!"

하고 아이를 안심시키고 다독이지만, 우리의 대답에도 늘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짓는 그 모습에 괜스레 무거워지는 맘을 조금 풀어보려고 언제부턴가 우리끼리 서로 눈이 마주치면 실망했어? 하며 우스갯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일에든 자기주장과 욕구가 분명한 딸아이와 자신의 욕구를 잘 모르는 아들 녀석 때문에 한동안 엄마인 나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혹시나 섬이가 여렸을 때 내가 아이를 너무 다그치면서 키운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 아이의 결정에 부정적인 반응을 많이 드러냈던 것은 아닌지 지난 일들을 곱씹어도 보았다. 물론 항상 아이를 격려하고 칭찬하고 긍정해주지만은 못했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심하게 몰아붙인 것 같진 않은데, 도대체 왜 그렇게 섬이는 남을 실망시킬까 봐 걱정만 하는 걸까 궁금했다.


정 반대의 성격을 지닌 두 아이의 성향은 어렸을 때부터 확연히 드러났다. 막대 사탕을 주면서

"이빨이 상할 수도 있으니까 억지로 깨물지 말고 되도록 빨아서 먹어."

하고 말하면, 동생 콩이는 엄마가 뭐라 하든 말든 받자마자 오도독 오도독 깨물기 바쁜데, 섬이는 한참 동안 쪽쪽 빨다가 사탕이 콩알만큼 작아졌을 때 내게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엄마, 이제 깨물어도 돼요?"

처음에는 말 잘 듣는 순둥이 녀석이 참 기특했는데, 여섯, 일곱, 여덟 살이 되어서도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물어보는 것이 신기하다 못해 이따금씩 짜증이 났다.

"이제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해도 될 것 같은데!"

어느새 나는 아이에게 이 말을 가장 자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매번 결정의 기로에서 나나 남편의 눈치를 살핀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행여 엄마나 아빠를 실망시킬까 봐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참 복잡하다.


"섬이가 그래서 엄마는 속상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오래전 내가 아이에게 했던 이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육아책인지 어떤 방송인지에서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안돼. 하지 마!"라는 말을 쓰는 것보다 네가 그러면 엄마가 속상하다는 완곡한 표현을 쓰는 것이 낫다는 내용을 본 이후부터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종종 이 말을 했던 것 같았다. 혹시나 그 말이 아이의 가슴에 박혔던 것은 아닐까. 자신이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으면 엄마가 속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예민하고 소심한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엄마인 내가 한 말과 행동이 아이에게 뭔가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고민하는 일이 많아진다. 두 아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대해도 신기하게 전혀 다른 성격으로 자라는 모습이, 모든 것의 원인이 엄마인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묘한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똑같은 말을 해도 한 녀석은 아이들이 던진 짱돌에 맞은 개구리처럼 큰 상처를 입는가 하면, 한 녀석은 기억에도 없다는 듯 씩씩하게 잘도 넘길 때면, 아이의 성향을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 또 부모의 몫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고민이 깊어진 것은, 내가 속상했다고 말했던 것들이 아이의 여린 맘을 아프게 했을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에 비해 나는 아이들에게 더 직접적이고 감정적인 말을 자주 쏟아부을 때가 많았다. 가까운 친구나 직장 동료나 아이의 친구라면 잘하지 않는 말들을 내 아이들에게는 여과 없이 던지기도 한다.

물론 내 아이들인 만큼 제대로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더 단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살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하지 않았던 감정 소모를 나의 아이들과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당신 때문에 속상해요

당신에게 실망했어요

당신이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지금까지 타인에게 이런 말을 얼마나 해보았을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에게 이런 부정적인 얘기를 꺼내기란 쉽지 않다. 어떻게든 에둘러 다른 표현을 하거나 그냥 조금씩 피하거나 거리를 두는 방법으로 나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더 편했다. 속상하고 실망했다고 말하는 내가 쪼잔해 보일까 봐, 혹은 내게 그런 말을 들은 상대가 나에게 오히려 실망해서 서로의 관계가 불편해질까 봐 미리 겁을 먹기도 했다.


"당신은 어느 누구와도 잘 지내는 것 같아요."

한때는 이 말이 칭찬인 줄만 알았다. 나이가 들고 보니 그 말속에 비겁하고 겁 많고 우유부단한 내가 보였다. 누구와도 잘 지내는 것은 단지 두루뭉술한 나의 겉모습일 뿐, 실은 상대에게 말하지 못한 실망이 쌓이고 쌓여서 감당하기 어려운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직속 상사에게 너무 실망한 나머지 눈도 마주치지 못할 만큼 힘들어서 그냥 조용히 회사에 사표를 내고 도망친 적도 있었다. 어떻게든 나쁜 사람으로 남는 것은 싫어서 내 속마음을 이리저리 숨기는 기술만 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너무 쉽게도 나의 속내를 쏟아붓는다. 언제나 내 편인 친정엄마에게, 만만했던 언니와 남동생에게, 내게 항상 져주는 남편과 한 몸처럼 붙어 다니게 된 두 아이들에게 내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적이 적지 않았다.


자녀들을 귀한 손님처럼 대하세요

어디선가 들었던 이 말이 그래서 가슴에 더 콕 박혔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매너와 예의를 갖췄어야 했는데, 싫으면 싫다, 그건 하지 마라, 그러면 정말 화 낼 거다, 등등의 직접적인 부정과 협박(?)의 표현들을 참 많이도 쏟아냈다.

싫어도 싫다고 시원하게 속내를 내뱉지 못하고 가족들이 행여 자신에게 실망하고 마음 상할까 봐 맘을 졸여온 아들 녀석은 그동안 나에게 얼마나 실망한 일이 많았을까. 다른 사람이 실망할까 봐 걱정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느낀 실망이 버겁고 힘들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정작 자신의 속은 끌어안고 눈치만 보는 녀석을 생각하니 답답했던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더욱 짠했다. 아이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실망을 삼키고 쌓아온 걸까.

누군가에게 실망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서로 기대감을 갖는 사이는 또 그만큼 특별한 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냥 적당히 알고 지내는 타인에게는 굳이 기대할 것도 실망할 것도 없다. 그래서 늘 살을 부비며 사는 가족은 특별히 가까운만큼 한편으로는 너무 당연한 존재여서 알게 모르게 실망감을 안겨줄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실망했다 해도 서로 끊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 쉽게 함부로 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는 입으로는 애써 괜찮아, 이해해,라고 웃어주고 있지만 사실은 쓴 약을 삼키듯 후딱 넘겨버리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서로 맘이 상하고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 겁이 나서 깊이 담아두지 않는 요령을 자꾸만 터득해간다.


나한테 그렇게 실망했는지 미처 몰랐어

더블린으로 떠나오기 전 아주 가까웠던 친구 하나와 관계가 끝나버린 일이 있었다. 성인이 되고 직장 생활하면서 마음이 맞는 좋은 친구를 얻기란 참 쉽지 않은데 각박한 사회생활 속에서 얻은 귀한 친구였다. '허물없다'는 말이 실감이 날만큼 막역하게 잘 지내오던 우리의 관계는 한순간에 틀어졌다. 그 전날까지도 웃으며 만나고 헤어졌는데, 다음날 갑자기 그는 감당할 수 없는 비난을 내게 쏟아냈다. 멱살을 잡을 만큼 심각한 싸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평소에 뭔가 눈치를 준 일도 없었기에 처음엔 무척 그 충격에 당황스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그의 비난을 곱씹으며 조금씩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애를 썼다.

'나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구나. 내가 네 눈에는 그렇게 보였구나.'

하지만 아무리 나의 허물을 인정한다 해도, 마치 쌓고 있던 탑을 갑자기 발로 차 버리듯 돌변한 친구의 모습이 너무 큰 상처로 남아버렸다. 평소에 조금씩 얘기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앞에서는 하하 호호 웃다가 등 뒤에서 칼을 꽂았을까. 아니면 눈치 없는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결국 친구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나는 그가 나에 대한 실망을 남모르게 쌓아오다가 어느 날 터져버린 것이라고, 나를 배려하느라 나름 참고 참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이제 와서 누가 더 큰 잘못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가 소중하고 좋을 때 더 세심하게 마음을 살피지 못한 어리석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매번 실망했냐고 되물어주는 섬이는 나보다도 훨씬 나았다. 자꾸만 상대의 감정을 살피고 속내를 확인하는 아이의 물음은, 우리의 관계를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서로 미워하지 않기 위해, 혹여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치고 달라지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상대가 실망했다고 말하기 전에, 섬이처럼 내가 먼저 나 때문에 속상하고 실망하진 않았냐고 가끔씩만 물어만 줬어도 서로의 마음을 살피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나를 사랑하는 만큼 당연히 이해하고 넘어가 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가깝다고 느끼는 사이일수록 더 자주 세심하게 속내를 물어봐 줄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등을 기대고 조금씩 가까워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뭔가를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서로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적어도 실망시키지 않는 일이 더 힘든 것 같다. 모두를 만족시키며 사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나이가 들수록 이러저러한 갈등이 생기는 것이 두려워 애초에 거리를 두는 때도 많아졌지만, 가족이든 친구나 이웃이든, 맘의 조각을 조금씩 나눠가질 수 있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What do you think?

Are you ok?

Does that sound good?

Is it right?

아일랜드에서 친해진 이들과 문자를 나누면서 서로 빈번하게 쓰는 말들이다. 언어가 서툴고 서로의 문화가 다르다 보니 뭔가를 부탁하거나 의견을 나누다가도 말미에는 꼭 서로 괜찮은지,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을 하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

한국말로 문자를 나눌 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는 마음에 생략하게 되는 이 작은 물음들이 마지막 잠금장치처럼 맘을 든든하게 할 때가 있다. 서로 부담은 주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확실히 상대가 괜찮은지 확인을 하는 것이 그다지 구차한 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요즘은 섬이가 실망했냐고 물어봐주지 않으면 오히려 뭔가 허전하다. 녀석도 이제 모든 것이 슬슬 귀찮아지는 사춘기에 접어든 걸까, 아니면 무심한 가족들에게 지친 걸까.

아이가 어른이 되고 내가 더 늙게 되더라도 부디 잊지 않고 가끔씩 확인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잊지 않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도 상대의 마음을 조금 더 알기 위해, 행여 나중에라도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어 와르르 마음이 무너지는 일을 막기 위해.


“괜찮아? 혹시 실망했다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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