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나눈 둘만의 비밀 얘기
그날은 남편의 생일이었다.
섬이와 콩이, 두 아이의 여름방학을 맞아 이곳저곳을 여행 중이던 우리 가족은 특별한 생일 선물이나 이벤트를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때마침 찾아온 아이들의 고모가 한국에서 이것저것 재료들을 가져온 덕분에 맑은 된장국과 포장김치, 장조림 캔, 김 등으로 차린 저녁 식탁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생일치고는 소박한 밥상이었지만 남편을 비롯해 우리 모두는 든든한 포만감에 젖어 몸도 마음도 마냥 행복했다.
오후 늦게까지 높이 떠 있는 여름 해도 고맙고 저녁 바람도 선선해서 묶고 있는 숙소의 근처를 산책 삼아 한번 돌아볼까 하고 일어서니, 때마침 심심해하던 딸아이 콩이가 저도 함께 가겠다고 촐랑거리며 나섰다.
저녁 8시가 조금 지난 낯선 동네는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모두들 단란하게 저녁 식탁을 나누고 있는지, 아니면 이른 취침을 준비 중인지 숙소 근처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짖어대는 어느 집의 개소리와 푸드덕 날아가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 시간 맞춰 은은하게 울리는 교회 종소리와 바람에 몸을 부비는 나뭇잎들이 조심스레 적막을 깨곤 하였다.
"이렇게 나오니까 엄마 어렸을 때 살았던 작은 동네가 생각난다."
"어땠는데? 여기랑 비슷했어?"
"아니, 동네 모습은 다르지만 이런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던 것 같아. 친구들이랑 정신없이 뛰어놀다가 모두들 저녁 먹자고 부르는 엄마 목소리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고, 나도 집에 가서 후다닥 저녁을 먹고 나서 혹시 누구 또 놀 사람 없나, 하고 밖에 나와보면 이렇게 온 동네가 고요했거든."
딸아이는 엄마도 자기처럼 밖에서 뛰어놀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신기했던지 친구가 얼마나 많았는지, 뭘 하면서 놀았는지 침묵을 뚫고 계속 엄마의 어린 시절을 캐물었다.
마을 입구에 자리한 자그마한 펍과 카페가 눈에 들어오자 이내 맥주 한 잔과 저녁을 즐기며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흥에 겨워 낯선 언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몇몇 사람들이 함께 따라 불렀다. 아마도 우리처럼 어디선가 날아온 여행객들인 것 같았다.
떠들썩한 노래를 뒤로하고 나와 콩이는 마을 전체를 감싸고 있는 산자락과 그 앞에 드넓게 펼쳐진 들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차를 타고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생경한 풍경이 뭔가 신비롭게 우리를 이끄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엄마의 아빠는 지금 어디에 있을 것 같아?"
아까부터 사뭇 진지하던 딸아이가 예고도 없이 질문을 툭 던졌다. 처음에는 그 내용이 제대로 인지되지 않아서 잠깐 머리가 멍하고 가슴이 턱 막혀왔다.
"아...."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이토록 당황하고 있는 이유는 아이의 물음이 너무 뜻밖이어서가 아니라 꽤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10년이 다 되었다. 이제 한국 나이로 열 살이 된 딸아이가 세상에 나오기 두 달 전에 가셨으니 매년 그 햇수를 세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내 생일을 이틀 앞두고 가셨기 때문에 생일이 다가올 때마다 아빠를 한 번씩 추억하며 떠올리곤 했지만 지금 그가 어디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지, 나를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을지에 대해 잊고 지내는 때가 많았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는 항상 타국에서 일하고 계시느라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고, 조금 자란 후 함께 살게 된지 몇 년 되지 않은 후부터는 오랫동안 편찮으셨던 나의 아빠는 살아계실 때에도 가깝지만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기에, 막상 떠나고 나서도 그의 부재가 크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 늘 딸로서 갖는 아픔이고 죄책감이었다.
"글쎄, 잘은 모르지만 아주 멀리 계실 수도 있고, 아주 가까이 계실 수도 있을 것 같아. 다만 어디에 계시든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엄마는 네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지 못해서 늘 죄송하고 미안해."
"신기하다. 고모도 친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면 엄마랑 똑같은 얘기를 했어."
촐랑거리며 따라나섰던 철없는 딸아이는 어디 가고, 어느새 콩이는 나보다 더 멀쩡하고 어른스럽게 우리의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나는 세 번의 가족 장례를 치렀다. 시어머니, 친아버지, 친할아버지까지. 그래서 남편은 농담 반 진담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뇌하는 철학자가 태어나는 건 아닐까, 하고 종종 말하곤 했다. 우려와는 달리 무척 쾌활하고 활동적인 소녀가 태어났지만, 그 말괄량이 소녀는 이따금씩 저보다 세 살 많은 오빠와는 달리 자신은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는 사실에 울적해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은 그렇게 다 나이를 먹고, 언젠가는 떠나. 그러니까 곁에 있을 때 소중히 생각하고 잘해야 하더라고. 엄마도 어릴 때는 그걸 몰랐어. 그래서 지금은 좀 후회가 되기도 해."
구태의연한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녀석은 어느새 목소리까지 착 가라앉아서는 속내를 터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엄마랑 아빠가 조금만 나를 더 일찍 낳았으면 우리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었잖아. 왜 둘이 늦게 결혼하고 오빠랑 나를 늦게 낳았어!"
갑작스러운 아이의 원망에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인지라 덜컹 마음이 내려앉았다.
"엄마가 미안해. 네가 그렇게 속상해하는 줄은 몰랐어. 대신에 엄마랑 아빠랑 오래오래 살도록 노력할게."
미안해진 마음에 애써 웃으며 뻔한 대답으로 아이를 달래려 노력했지만 이미 아이는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자꾸 여기저기 아프잖아. 오늘도 운전 오래 해서 허리가 자꾸 아프다고 하고...."
갑자기 딸아이는 아기처럼 훌쩍훌쩍 울며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아빠의 생신을 맞아 며칠 전부터 아빠에게는 무슨 선물을 갖고 싶냐고 집요하게 물어대고 엄마에게는 생일 케이크며, 카드며 준비하자고 졸라대기에 그저 녀석이 마냥 들떠서 신나는 생일 파티 생각만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생일'이라는 의미 속에 거스를 수 없는 세월과 나이가 쌓여가고, 언젠가는 다가올 우리의 헤어짐이 담겨있다는 것을 딸아이가 조금씩 알아차리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남편과 나는 우리가 이만큼 늙어서 기억도 잘 안 나고, 이것도 저것도 잘 못한다며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엄살을 부리는 것을 재미로 삼곤 했으니, 새삼 그동안의 철없었던 엄마 아빠의 행동과 말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남편과 내가 결혼할 때 가장 우려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할 수 있었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나의 아빠와 그의 어머니가 일찍부터 많이 편찮으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혼 후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도 이따금씩 두 분과 함께했던 시간을 더듬더듬 추억하고, 아팠던 상처를 나누는 것이 우리 부부의 일상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직 잘 못 알아듣겠지, 혹은 우리 얘기에 관심이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녀석들 옆에서 이렇게 저렇게 주고받던 얘기들이었는데, 곁에서 주워듣던 아이들이 어느새 엄마와 아빠의 속내를 알아차릴 만큼 커버렸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점점 나이 들어가는 엄마와 아빠가 반은 엄살, 반은 진심으로 '아구구구'하며 여기저기 아프다고 떠들 때마다 혹시 할머니와 외할아버지처럼 심각하게 아프면 어쩌지, 하며 마음 졸이고 걱정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어린 마음에 괜한 걱정과 짐을 준 것 같아 나이 든 엄마는 또다시 미안해졌다.
"여행 끝나고 돌아가면 엄마랑 아빠랑 운동 열심히 할 거야. 그래면 아빠 허리 아픈 것도 싹 나을 거고, 엄마도 더 건강해질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알았지?"
숙소에서 나올 때 딸아이가 지니고 있던 명랑함을 다시 되찾아주고 싶은 마음에 나는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저 산 좀 봐! 저기 참 예쁘다, 여기는 이런 길이 있었네."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찬 공기가 조금씩 몸을 감쌀 때쯤 다행히 아이의 옥타브도 이전처럼 상승한 듯 했다.
"우리 이제 슬슬 들어갈까?"
"응. 엄마 그런데 부탁이 있어. 내가 오늘 한 얘기랑 울었던 건 아빠한테 비밀로 해줘."
"그래 알았어."
피식 웃으며 나는 다음 말을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나도 부탁이 있어.
부디, 조금만 더 천천히 커주겠니.
엄마도 천천히 늙어갈게'
길었던 여름 해가 아이의 눈가처럼 붉게 하늘을 물들이며 산 뒤로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