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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Feb 23. 2022

하늘 홀로 하늘일 수 없습니다.

유지승의 주역 읽기 2022년 2월 22일

02_곤위지(坤爲地)     


땅은 크고 형통하고 이롭고 암말의 바름과 같습니다. 

坤 元亨利 牝馬之貞

(곤 원형리 빈마지정)      


생각: ‘땅’이란 어떤 것일까요? ‘땅’이란 말로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땅’은 그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리적 ‘땅’이 아닙니다. 물론 처음엔 눈에 보이는 물리적 ‘땅’의 거대함에서 시작하였겠지요. 하지만 곧 ‘땅’은 ‘하늘’과 함께 동아시아 형이상학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물리적(physica) 땅을 넘어서 초-물리적(meta-physica) 땅으로 넘어갔다고 할까요. 자연학(physica)에서 형이상학(mataphysica)으로 넘어갔다고 할까요. 어느 순간 하늘과 땅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땅은 어떤 존재일까요? 하늘에서 비가 내립니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붑니다. 땅은 비와 눈 그리고 바람에 맞서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땅은 그저 무력한 존재일 뿐일까요? 땅도 하늘처럼 처음엔 큽니다. 아무것도 없는 땅을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그 큰 땅에서 온갖 생명의 싹이 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형통합니까. 당연히 이롭지요. 그 형통함과 이로움으로 지구의 이 많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땅은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암말’과 같아야 합니다. ‘암말’, 즉 ‘빈마(牝馬)’의 ‘빈(牝)’은 ‘음(陰)’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암말은 ‘음의 기운’을 나타냅니다. 그 기운의 핵심은 ‘받아들임’입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고 눈을 내리고 바람을 일으키면, 땅은 그 하늘로부터 비를 받고 눈을 받고 바람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싹 하나도 땅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크기만 크고 어떤 싹도 품지 못한다면 땅은 형통하고 이로운 곳일까요? 아닙니다. 그저 비워진 곳, 쓸데없는 곳일 뿐입니다. 황무지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땅을 그저 귀(貴)함과 천(賤)함에서 천한 것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말 잘 들어야 하는 존재만은 아닙니다. 땅 없는 하늘을 생각해 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작은 싹 하나 내지 못합니다. 하늘이 제대로 ‘양(陽)의 기운’으로 행하기 위해 자신의 ‘행함’을 받아주는 ‘머묾’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엔 이를 남성과 여성이란 생물학적 성별에 적용하여 이해하였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것 없이 우리 삶 전반에 적용하여 생각해 봅니다. 모든 사람이 정치와 행정 그리고 경제 공부를 많이 하고 모든 사람이 다양하고 좋은 기술을 가지는 건 아닙니다. 이 둘이 만나야 합니다. 이 둘이 더불어 있어야 합니다. 이 둘이 제대로 만나야 제대로 된 결실을 일굽니다. 좋은 정치인이 있지만, 그 정치인의 강건한 양심과 이론을 이해하고 수긍하며 실행할 기술과 부지런함을 가진 이들이 없다면 그 정치인은 그곳에서 그리 큰 쓸모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을 많이 받아 자신의 자리에서 충분히 대단한 기술자이고 숙련공인데 이들을 모두를 강건한 양심과 단단한 논리로 설득하지 못하고 그들 각자의 자리에 조화롭게 배치하지 못하며 이로 인하여 이들이 가진 것을 제대로 드러나게 하지 못한다면, 그곳의 기술자와 숙련공도 사실 그리 큰 쓸모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땅의 크고 형통하고 이로움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암말, 즉 음의 기운이 양(陽)의 기운을 제대로 품었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더불어 있어 하나를 이루었기에 이 둘 모두 형통하고 이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더 큰 원인은 아닙니다.     

 

요즘 암말은 그저 말 잘 듣는 존재가 아닙니다. 한때 잔인하게 학대당하며 사육되던 동물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잔인하게 학대당하며 손님을 태운 말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말이 ‘음’의 기운이고 잔인한 말 주인이 ‘양’의 기운인가요? 아닙니다. 그런 착각을 하면 됩니다. 양의 기운인 ‘건(乾)’이 하늘이라면 음의 기운인 ‘곤(坤)’은 땅입니다. 하늘이 ‘행함’이라면 땅은 ‘머묾’입니다. 하늘의 강인한 행함이 땅의 기운을 무시하고 일어난다면 하늘에도 땅에도, 말 그대로 천지가 모두 혼란뿐 입니다. 자라던 생명의 싹도 죽입니다. 하늘의 기운, 즉 양의 기운은 독재자의 폭력이 아닙니다. 그 강인함은 땅의 부드러움에 녹아들 강인하고 단단한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땅의 부드러움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끄러움 가득한 악덕(惡德)과 거칠고 힘든 논리라면 그것은 제대로 된 강인함과 단단함도 아닙니다. 그것은 있던 생명도 죽이는 폭력일 뿐입니다. 암말을 수긍하게 하는 그런 제대로 된 강인함이 필요합니다. 그때 하늘은 땅과 더불어 싹을 내겠지요. 하늘뿐인 땅도 없고 땅뿐인 하늘도 없습니다. 높고 낮다고 말해도 사실 서로에게 서로는 자기 본질의 이유입니다.      


2022년 2월 22일     

유지승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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