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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Feb 23. 2022

작아서 희망이었던 겁니다.

유대칠의 함석헌 읽기 2022년 2월 23일

오래전입니다. 당시 여자 친구 집을 찾아가는 길, 헌책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헌책방에서 몇백 원을 주고 책을 하나 샀습니다. 바로 『죽어도 죽지 않는다』라는 함석헌의 책입니다. 평당 서당이란 곳에서 나온 그런 책이었습니다. 『뜻으로 보는 한국 역사』만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그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일하던 곳 의자에 앉아 읽었습니다.      


“씨알은 하나의 알입니다... [그] 생명 안에는 잘못하지 않은 뜻, 곧 의지가 들어있다 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첫 장의 글귀가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글귀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동그랗기 때문에 씨알은 한 점으로 섭니다. 보통은 넓적하고 땅에 닿는 면적이 넓어야 안정할 것 같은데, 씨알은 넓은 대지 위에 설 자리가 오직 한 점, 엄정한 의미에서 기하학적으로 한 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씨알은 사실은 어디 가도 설 곳이 있습니다. ‘불안정’이 ‘안정’이 됐고 가난함이 도리어 넉넉함이 됐습니다. 한 점으로 서는 씨알은 간 곳마다 설 자리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 가도 제 자리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정말 복이 있습니다.”     


씨알은 아주 작습니다. 정말 아주 작습니다. 입김으로 ‘후’ 불면 힘없이 날아갑니다. 자기 자리 지킬 힘도 없이 그렇게 무력해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날아가야 자기 자리를 찾게 되는 게 또 씨알입니다. 그렇게 ‘후’ 불어 날려가 땅에 떨어져야 싹을 내는 게 씨알입니다. 그 작음이 ‘힘’인 것이 씨알이란 말입니다.      


그 작음이 그렇게 보면 복입니다. 복이란 바로 그런 겁니다. 길을 걷다 보도블록 사이 틈에 사는 풀을 봅니다. 저 작은 틈에 들어가 싹을 내는 것이 작은 씨알의 힘이고 복입니다. 작아서 보기에 너무 ‘불안’합니다. 크지 않은 작은 입김에서 그만 날아가 버리니 참 힘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그 작음의 ‘불안’이 가장 넉넉한 ‘안정’이 되는 게 바로 그 작음의 힘이고 복입니다. 작지만 큰 복입니다.      


이 땅 민중을 떠올립니다. 이 땅의 기적은 가진 자들의 욕심으로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수많은 이 땅 노동자의 힘겨운 애씀이 이룬 겁니다. 그런데 그 애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면 아쉽습니다. 수많은 이를 죽이고 수많은 이를 괴롭히며 자기 가진 것을 위해 살던 이는 그렇게 대단하다며 기억하지만 자기 온 존재를 내어놓으며 억울함 없는 세상을 위해 순교한 ‘전태일’을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는지 돌아보세요. 그가 어디 많이 배운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부잣집 아들인가? 아닙니다. 그는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이 나라 역사의 씨알입니다. 그러나 그 ‘작음’으로 그 힘들고 어려운 곳으로 내려가 올바름을 향한 역사의 길을 여는 것을 보세요. 자기를 내어놓으며 올바른 역사를 향한 싹을 내어놓는 그 힘을 보세요. 그 힘은 대학에서 배운 이론의 탓도 아니고 가진 집안에서 누린 부유함 탓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로 그 영혼이 가득 차면 그 욕심의 무게감에 자기 자리를 절대 내어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씨알은 다릅니다. 너무 가벼워서 역사가 부른 바람에 날려가 그 자리에서 치열하게 싹을 냅니다. 욕심 없이 자기와 더불어 있는 그 모든 벗과 더불어 말입니다. 전태일에게 더불어 있던 여공의 눈물은 남의 눈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눈물이었습니다. 더불어 있다는 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비어 있으니 자기 아집 없으니 더불어 있는 이의 눈물이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 눈물이 됩니다. 그 자기 눈물이 자기 온 존재가 될 때, 자기를 내어놓고 새 생명을 부르게 됩니다. 씨알이 자기를 가르고 싹을 내듯이 말입니다. 작은 씨알을 보세요. 힘없이 날려가 지구의 어느 곳에 떨어져 그곳에서 자기에게 품어진 ‘뜻’을 자기 살을 가르고 새싹으로 냅니다. 전태일도 그렇게 자기 존재를 가르고 그 안에 품은 ‘뜻’을 새싹으로 냅니다. 대단하지요. 사회에 대한 온갖 이론이 책 속 글귀로 머물고, 학자의 관념으로 머물 때, 그는 삶으로 싹을 드러냅니다. 스스로 씨알이 되어서 말입니다.      


지금 우린 작음의 복보다 크고 큰 복을 기대하며 삽니다. ‘더불어’ 살기보다 ‘홀로’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삽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기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봅니다. 그리고 당연하다 여깁니다. 이렇게 많은 노동자가 죽어가고 있지만, 전태일과 같이 더불어 울지 않습니다. 우린 이제 씨알이기보다 거대한 무엇이 되고 싶어 합니다. 욕심으로 가득 찬 그 무엇 말입니다. 그 욕심을 돈이니 권력이니 듣기 좋은 말로 치장하며 말입니다.      


“지구와 겨자 씨알이 한 점에서 입을 맞추는 순간 새 생명이 일어나듯이 씨알이 나라와 한 점에서 만나는 자리에서 역사적 창조가 생겨납니다.”     


지구의 그 거대한 대지(大地)와 작디작은 겨자 씨알이 만나 귀한 새 생명을 이루듯 우리 민중이란 씨알이 이 나라와 제대로 한 점에서 만날 때, 서로 욕심 없이 제대로 더불어 있을 때, 분명히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겁니다.      


자, 이제 새로운 역사가 우리의 살을 가르고 새 생명의 싹이 되어 나도록 우리를 비웁시다. ‘뜻’이 가득 찰 수 있도록.     


2022년 2월 23일 오캄연구소 도내암에서 

유대칠 씀


[현재 토마스철학학교 오캄연구소는 다양한 철학 강좌를 줌으로 하고 있습니다. 철학사 강좌와 고전 읽기 등 다양합니다. 유대칠의 철학 강좌에 함꼐 하고 싶은 분은 summalogicae@kakao.com으로 신청해주세요. 약간의 수강료로 소중한 시간 더불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유대칠의 글을 주간 유지승으로 받아 보실 수도 있습니다. 그 역시 신청해주시면 됩니다. 주간 유지승은 구독료가 한달 1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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