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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Mar 09. 2022

도사란 누구일까요?

유대칠의 도덕경 읽기 2022년 3월 9일

15장 

예부터 도를 잘 행한 도사는 미묘하고 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기에 굳이 표현해 보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머뭇거리는 것이 겨울 얼음이 살짝 얼은 내를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또 조심하는 것이 원숭이가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엄숙한 모습은 마치 손님과 같습니다. 또 흩어지는 것이 마치 얼음이 녹아 흩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질박한 모습은 마치 손대지 않은 통나무와 같고, 

그 텅 비어 있는 모습은 계곡과 같습니다. 또 뒤섞인 모습은 온갖 것으로 혼탁한 물과 같습니다. 혼탁한 곳에서도 고요하게 있으니 점점 맑아집니다. 또 고요하게 행함으로 점점 생하게 합니다. 이러한 도를 가진 도사는 쉼 없이 무엇인가를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가득히 채우지 않으면서도 덜해 저도 새로운 것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 


十五.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儼兮, 其若客. 渙兮, 若冰之將釋. 敦兮, 其若樸. 曠兮, 其若谷. 混兮, 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 動之徐生? 保此道者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십오. 고지선위사자, 미묘현통, 심불가식. 부유불가식, 고강위지용. 예언, 약동섭천. 유혜, 약외사린. 엄혜, 기약객. 환혜, 약빙지장석. 돈혜, 기약박. 광혜, 기약곡. 혼혜, 기약탁. 숙능탁이정지서청 숙능안이구, 동지서생 보차도자불욕영. 부유불영, 고능폐불신성.


풀이: ‘위(爲)’란은 한자를 살펴봅니다. 이 글자는 코끼리 상()과 손 수()를 조합한 모양입니다. 동요도 있지만 코끼리 코가 코끼리 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손은 우리 몸에 달린 손이 아니라, 코끼리에게 일을 시킨다는 맥락에서 읽을 수 있을 듯합니다. 코끼리에서 사람은 일을 시킵니다. 그냥 코끼리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에 따라서 그 뜻과 하나 되어 일을 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도사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도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우주의 도가 그와 둘이 아닌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마치 코끼리가 코끼리에게 일을 시킨 이의 뜻과 하나를 이루어 내듯이 도사는 우주의 도, 우주의 뜻과 그 자신의 뜻이 하나가 된 사람이란 말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도사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진짜 도사는 누군가의 미래를 예언하거나 굿을 하거나 불안한 사람의 그 불안감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우주의 뜻과 하나 되어 무엇을 행하지 않으나 모든 것을 행하는 우주와 같은 그런 존재입니다. 혼탁한 세상에 내려와 자신이 대단하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물을 더 더럽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즉 이 세상의 오물과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혼탁한 물에 고요하게 내려와 더 고요하게 함으로 다시 맑아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더 욕심을 부리라고 더 더럽게 하라고 선동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도사란 고요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더 더럽게 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미묘현통(微妙玄通)이란 말, 미묘하고 현통하다라고 번역했지만 사실 참 어려운 말입니다. 미(微)는 미세하다고 할 때 그 말입니다.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묘(妙)는 묘하다는 바로 그 말입니다. 뭔가 있긴 있는데 없는 것 같아서 도무지 정체 파악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현(玄)은 끝이 안 보이도록 가물가물하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통(通)은 그냥 사방으로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도사란 이런 존재란 말이다. 미(微)하고 묘(妙)하고 현(玄)하고 통(通)해서 도대체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는 그런 존재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도사라면 미묘하지도 않고 현통하지도 않습니다. 자칭 많은 도사란 이들이 사람의 운명을 말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심지어 복을 이야기하며 말입니다. 굿이나 부적으로 개인적인 복을 부른다면 그 도사도 그저 이 세상 욕망의 한 조각일 뿐인 듯합니다. 도사는 욕망을 더하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진정한 깨우침, 도, 즉 우주를 뜻있는 공간으로 있게 하는 그 도와 하나를 이루는 이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비우고 비워도 채우려 하지 존재, 채우려 하지 않으니 계속 새롭고자 하지 않는 존재, 그런 존재입니다. 채우고 채우며 남보다 더 새로운 것으로 변하려 노력하는 존재가 아니라, 비우고 비우며 우주의 도로부터 떨어져 멀어져 버린 자신을 우주의 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그런 자본주의의 삶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린 채우고 또 채우는 것에 익숙하니까 말입니다. 남보다 더 채우고 남보다 더 새롭게 무장하고 말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니 남보다 더 앞서고 더 새롭게 되기 위해 쉼 없이 싸우고 말이죠. 그러니 더욱더 흐린 물은 더 흐려지고 말입니다. 


스스로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면 남에게 함부로 조언이라며 충고라며 상처를 주기도 하고 말이죠. 응원보다 은근한 폭력이 가득하니 홀로 있는 편이 더 편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도사, 그런데 도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매사 조심하며 자신의 욕심으로 남에게 상처가 될까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 조차도 고요히 말이죠.


2022년 3월 9일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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