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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May 17. 2022

견혹(見惑)

2022년 5월 17일

견혹(見惑)     


똑똑해도 삶은 쉽지 않다. 힘들다. 똑똑하다고 삶의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결국 슬기로워야 한다. 결국 ‘슬기’가 우린 행복하게 한다. 쓸모없는 욕망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 사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영원하게 하지 못하고 우리를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 바로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냥 아는 게 아니라 그 앎이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집착하지 않는다. 아집에서 멀어진다. 무엇이 되려는 마음도 사라지고 무엇을 가지려는 마음도 사라진다. 무엇을 죽이려는 마음도 사라지고 무엇을 품으려는 마음도 사라진다. 그냥 있을 뿐이다. 무엇이 되려는 욕심으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거로 그냥 있을 뿐이다. 그게 해탈이고 그로 인해 열반에 이른다.      


속세를 피해 산에 올라 도(道)를 구한다. 그러나 속세는 산 아래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산 아래에서도 도를 구할 수 있다. 슬기의 자리는 산 위가 아니다. 슬기의 자리는 바로 여기다. 바로 내가 사는 여기다. 여기에서 온갖 욕심이 지배하는 바로 여기에서 그 악업의 사슬을 벗어나는 거다. 그게 진짜 출가(出家)다. 나 아닌 누구를 나보다 더 높고 낮음으로 보지 않고 그냥 그로 보는 것, 나 자신을 누구보다 더 높고 낮은 것으로 보지 않고 그냥 나로 보는 것, 저기 저 꽃잎이 그저 꽃잎으로 자기 삶을 살듯이, 욕심 없이 집착 없이, 그냥 꽃잎이듯이, 저기 저 잡초가 그저 잡초로 자기 자신의 삶을 살듯이, 잡초라 아파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말이다.     


견혹(見惑)이란 말이 있다. 견도소단혹(見道所斷惑)의 줄임말이다. 도를 보던 삶에서 벗어나 버린 번뇌를 뜻한다. 슬기에서 벗어난 번뇌다. 괴로움이다. 다시 무엇을 더 가지고 무엇이 되고 싶은 속세의 삶으로 내려가 힘겨워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신이 견혹의 괴로움으로 아파한다는 것을 안다면 희망이 있는 거다. 그것을 안다면 그것을 벗어날 첫걸음은 한 것이니 말이다.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그 괴로움이 당연한 세상 삶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으니 말이다. 견도의 괴로움, 슬기를 상실하고 사라질 것에 집착하는 괴로움, 오늘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     


2022년 5월 17일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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