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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Feb 02. 2022

법집(法執)

법집(法執)     

가문(家門)이니 혈통(血統)이란 것이 있을까? 과거 많은 사람은 성씨가 없었을 거다. 신분제 사회에서 천한 신분의 사람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모든 이들이 성씨를 가지고 있다. 아마 조선 후기 역사의 혼탁한 흐름 속에서 성씨 없던 이들도 성씨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자신의 성씨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도 생물학적으로 따지고 들면 혼탁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 원래 없던 성씨를 가지게 된 아무개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누구누구를 자신의 조상이라며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사실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조상이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한때 성씨를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주인집 성씨를 받은 노비들도 제법 많다. 그렇게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났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그것이 무엇인가 싶다. 설령 혈통이란 것이 있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같은 집 같은 형제자매라도 아주 많이 다른 경우를 많이 보았다. 굳이 교집합을 찾으려 애쓰는 그렇지 남이라면 아예 남이라 보아도 좋을 만큼 다른 경우도 아주 많다. 인류의 그 오랜 역사 속 우리가 혈통으로 누군가와 나를 나눈 지가 얼마인가? 그 긴 역사에서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찰나의 순간 만들어진 거로 우린 서로를 구분하고 그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죽어 큰 무덤을 만들고 많은 돈을 들여 가꾼다. 가문과 혈통의 명예를 위해 말이다. 자신이 양반이었다는 이야기를 자손에게 하며 말이다.      

종교는 어느 종교 이론가의 이론을 답이라며 무리를 지어 뭉친다. 그리고 그 뭉친 무리에 이름을 하나 붙이곤 그것으로 자기 정체성으로 삼아 그 이론의 틀 속에서 신을 향한다. 화려한 전례(典禮)와 의복으로 자기 교리의 정통성을 과시하기도 하고, 고집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우주란 거대한 전체에서 보면 하나의 작은 먼지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자기 아집 속에서 만들어진 그 작디작은 이론을 가지고 우주 보편의 법칙이라 고집한다. 신조차도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교만(驕慢)을 부리며 온갖 숭고한 언어로 자기 신앙을 치장하며 신앙의 삶을 살아간다.      

‘법집(法執)’이란 말이 있다. 있는 모든 것이 각기 자신의 실체적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집착하는 것을 두고 부르는 말이다. ‘아집(我執)’이란 말이다. 가문이란 것도 실체적 자아가 있다며 그것에 집착한다. 종교적 이론과 교파(敎派)도 그것에 실체적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그것에 집착한다. 그 집착 속에 아집이 생기고 그 아집 속에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아집에서 벗어나 참 세상을 보면 보시(普施) 해야 할 곳이 보인다. 더불어 아파해야 할 곳이 보인다. 나누어야 할 곳이 보인다. 죽은 이를 위한 비싼 장식보다 아파 힘겨운 이의 눈물이 보이고 자기 교파만이 답이라며 주장하는 그 주장 속에 자신의 아집과 이기심 그리고 잔인함이 보인다.      

해탈(解脫)이란 벗어남이다. 텅 빈 곳에 만든 실체적 자아의 허상에서 벗어나는 것, 그렇게 아집에서 벗어나는 것, 자기 자신을 온전히 모두를 위한 거름으로 내어놓는 것,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22년 2월 2일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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