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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29. 2022

통달(通達)

통달(通達)     

어린 시절 일이다. 아는 형님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같이 산을 걸으면 무엇이 먹을 것이고 무엇이 먹지 못할 것인지 바로 알았다. 어디 그뿐인가? 이것은 몸 어디에 좋고 저것은 먹으면 어디에 좋은데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저 산 그 자체가 재미나고 신난 나에게 형님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종종 형님을 따라 산속 같은 굴 같은 곳을 찾아가면 왠지 기분이 무척 좋았다. 마치 산속 깊숙이 들어가 산속 그 무엇이 된 것 같아서 말이다. 지금은 기억이 나지도 않는 이런저런 열매들도 참 맛있었다. 나에게 형님은 그 산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형님의 도시 생활은 참 슬펐다. 도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그 형님은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도시에서 만난 이런저런 사람들은 그 형님에겐 산속 고마운 풀보다 못한 독이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부터 산 아래 집에서 산을 놀이터로 일터로 삼은 형님에게 산 없는 도시는 참 힘들었다. 그 형에게 산은 등산하며 좋은 공기를 즐기고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 형님에게 산은 그냥 벗이었으니 말이다. 벗 없이 도시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서로의 욕심을 두고 서로 더 많이 가지려 따지는 도시 생활이 그 형님에겐 독초(毒草) 사이의 삶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통달(通達)’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의 뜻은 막힘 없이 통함이다. 거침없이 숙달해 버렸다는 말도 되겠다. 그 형님은 어쩌면 자신의 벗인 산을 통달했을지 모른다. 그 산 역시나 형님을 통달했을지 모른다. 서로를 구석구석 모르는 것이 없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산에 통달해도 아집 가득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통달하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집의 세상은 서로를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 더 많이 얻고 더 높이 올라가려는 것이 당연하다. 산은 벗이 아닌 매매의 대상이고 투자의 대상이다. 사람 역시 다르지 않다. 사람 역시 돈으로 평가받는다. 얼마를 벌거나 가진 사람으로 말이다. 그 형님은 산을 계산하지 않았고 그 산도 형님을 계산하지 않았다. 항상 필요 이상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산 역시 그 형님에겐 예의를 다 해야 하는 주체적 존재였다. 하지만 아집의 세상에선 이 모든 것이 그냥 동화 속 이야기다. 이용당하고 당한 만큼 이용하는 것, 서로서로 계산기를 들고 자기 이득을 따지는 공간이란 말이다.      

불교의 말 가운데 ‘선혜(善慧)’라는 말이 있다. ‘착한 지혜’ 혹은 ‘바른 지혜’란 말이다. 제대로 된 통달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라 한다. 아집 속에서 서로를 이용하는 비법이 아니라, 착한 지혜란 말이다. 아집에서 벗어나 산을 보면 산은 그냥 산이다. 산을 산으로 보는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 해도 적어도 산을 자기 욕심을 이룰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산을 향한 선혜다. 산을 통달함이다. 남을 이기고 남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아집이란 주인의 종이 되어 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산과 더불어 살던 그 형님의 그 마음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2022년 1월 29일

유대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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