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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ul 07. 2023

종교와 철학: 베다의 시대에서 불교의 시대로

유작가의 인도 철학 이야기 2

종교와 철학베다의 시대에서 불교의 시대로          

     

괴롭지 않기 위해 나와 세상의 참모습을 보려는 게 철학의 시작이라 했다. 그러면 이제 그 참모습을 보자.      

신(神)이나 신성한 어떤 것이 있고, 그 존재가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내 지금의 괴로움은 어쩌면 그런 신성한 존재의 말을 듣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그 존재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나의 괴로움은 온전히 나의 잘못이다. 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나의 잘못이고, 순종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다. 어쩌면 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내 부족한 능력의 탓이다. 그리고 정말 간절히 지금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내가 듣지 못하는 신성한 존재의 말을 알아듣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의 말이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 신의 말을 듣지 못한다면, 그렇게라도 신의 마음에 들어야 하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나의 참모습을 궁리하기보다는 나의 참모습을 알고 있는 신과 그 신의 대리인인 성직자의 말을 잘 들으면 된다. 즉 나는 철학이 필요 없이 말을 잘 들으면 된다. 성직자의 말을 진리라 믿으며 말이다. 많은 종교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몇몇 성직자만이 홀로 신의 말을 들을 수 있거나 자신이 신 그 자체와 하나 되어 신의 뜻을 홀로 알 뿐이다. 그러니 그를 정점(頂點)으로 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어느 곳에선 ‘선지자’ 혹은 ‘예언자’라 불리며, 정점에 있었고, 경우에 따라선 그곳에서 종교의 권력을 넘어서는 세상의 권력마저 손아귀에 잡고 있었다. 또 다른 어느 곳에선 ‘천자(天子)’라 불리며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구도 천자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고, 천자는 그 공동체 구성원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가지고 있었다. 죽일 수도 있고 마음에 들면 살게 할 수도 있었단 말이다. 그럴 권력이 있었다. 그 역시 ‘신의 대리인’이었으니 말이다. 인도에선 ‘브라만(brāhmaṇa (브라흐마나), 婆羅門)’이라 불렸다. ‘브라만’, 즉 ‘브라흐마나’라는 말은 원래 가장 신성한 존재이며 원리인 ‘브라흐만(Brhmanh, Brahman)’에서 나온 말이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도 다른 이들과 달랐다. 그들은 보통의 사람과 신성한 존재인 브라흐만 사이의 존재였다. 그 존재 자체가 다른 보통의 사람과 다르단 말이다. 결국 그는 브라흐만의 뜻 혹은 브라흐만 그 자체를 가장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이 땅에 제대로 구현할 존재다. 그러니 그를 정점으로 하는 공동체는 당연한 것이 되고, 그 공동체의 누구든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    

  

철학은 이런 곳에서 모두를 위한 철학으로 있을 수 없다. 굳이 철학이 있다면, 이런 곳에선 오직 성직자만이 철학 비슷한 걸 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조선에선 조선 사회의 권력자이고 주체인 양반만이 성리학(性理學)을 했다. 서유럽에선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철학을 독점하고 자기 신학을 위한 합리화의 수단으로 철학을 소비했다. 오직 신학자의 철학만 있었을 뿐이란 말이다. 고대 인도에도 참된 나와 참된 우주는 내가 보는 게 아니라, 브라만의 몫이었다. 그만이 참된 것을 보고 그가 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이 당시의 철학이 ‘베다 철학’이다. 브라만이 하던 브라만의 철학이 바로 베다 철학이다. 브라만을 정점으로 하는 사회의 위계는 브라흐만의 뜻이 담긴 경전 『베다(Veda)』로 더 확고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경전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 변화로 인도철학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이 경전이 가지는 권위를 그대로 긍정하며 이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브라만’을 중심에 두고 이어져간다. 다른 하나는 경전의 권위를 부정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갔다. 이제 브라만과 같은 성직자 혹은 사제가 아닌 ‘수행자(修行者)’, 즉 ‘사문(沙門, śramaṇa)’을 중심으로 한 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전자를 ‘유파(āstika)’라고 하고, 후자를 ‘무파(nāstika)’라고 한다. ‘정통 철학파’인 ‘유파’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는 Āstika(아스티카)다. 그 말의 뜻은 우주 보편의 원리 혹은 신인 ‘브라흐만’ 혹은 ‘범(梵)’의 존재를 믿는 이들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 신의 뜻이 담긴 경전인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성(自性, ātman)’ 혹은 ‘아(我)’의 존재를 믿었다. 즉 ‘나’의 존재를 믿고 이 존재가 신적 존재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을 통해 온전한 존재가 된다고 보았다. 쉽게 말하면 수행으로 나는 신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브라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말이다.    

  

‘비정통 철학파인’인 ‘무파’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는 Nāstika(나스티카)는 부정을 의미하는 ‘Na(나)’가 더해져 ‘비(非)-아스티카’라는 말이다. 즉 유파가 믿는 것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이들이란 말이다. 그러니 그들은 신성한 존재인 ‘브라흐만’도 그와 하나 되어야 하는 ‘자성’도 믿지 않았다. 한마디로 ‘범아일여’를 이상으로 두지 않았고, 따르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유파’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 철학파’라고 할 수 있다. ‘무파’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부정하는 ‘비정통적 철학파’다. 전자인 힌두 철학은 흔히 ‘여섯 철학파’, 즉 ‘육파철학(六派哲學)’으로 나눈다. 그 구성원은 이와 같다. ‘삼키아 학파(Sāṃkhya)’, ‘요가학파(Yoga)’, ‘니야야학파(Nyāyá)’, ‘바이셰시카 학파(Vaiśeṣika)’, ‘미맘사 학파(Mīmāṃsā)’, ‘베단타학파(Vedānta)’다. 후자인 비정통적 학파는 ‘불교(Buddhism)’, ‘자이나교(Jainism)’, ‘짜르와까(Cārvāka)’, ‘아지비카교(Ājīvika)’, ‘아즈나나(Ajñāna)’ 등이다. 21세기 한국 사람인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인도철학이며 동시에 종교인 불교는 인도 철학사에 있어서는 ‘비정통적 철학파’에 속한다. 불교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도 않고, ‘브라흐만’의 존재를 믿지도 않는다.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신이나 원리와 합일해야 한다는 ‘범아일여’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교는 ‘사제’, 즉 ‘브라만’의 종교가 아니라, 전문 수행자이든 그렇지 않은 수행자이든 모두를 위한 ‘사문’의 철학이다.      


권위를 극복하고 이제 내가 스스로 나의 힘으로 나의 참된 모습을 보고 깨우치며,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으며 해탈하고 열반에 이르게 된다. 이제 나란 개인은 브라만의 말을 듣고 순종하며 깨우쳐 열반에 이르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치열하게 궁리하고 궁리하며 깨우쳐 스스로 아집을 깨고 일어나 열반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유지승 씀

2023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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