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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ul 08. 2023

참 깨우침의 도구, 논리

유작가의 인도 철학 이야기 3

참 깨우침의 도구, 논리             


종종 논리적이라면 서구의 철학만을 떠올리기도 한다. 깊은 이야기를 제외하고 아주 단순하게 정말 서구의 철학만 논리적일까? 과거 어떤 이는 서구의 철학은 논리적이라면 동양의 철학은 논리성에서 부족함이 있다고 했다. 나는 조금도 이런 억견(臆見)에 수긍하지 않는다. 누구도 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논리적이다. 그 논리의 생김새가 나와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생각해 보자. 어떤 외부 교육도 받지 못한 깊은 숲의 누군가를 생각해 보자. 그도 논리적으로 생각한다. 자신의 조건에서 말이다. 자신의 논리성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적응하고, 살아간다. 서구의 철학자만이 논리적인 게 아니라, 서구와 다른 지역인 인도와 동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등등의 사람들도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논리적이다. 지금 우리가 알아가는 인도철학 역시 논리적이다. 그들의 자리에서 정말 치열하게 논리적이다.      


인도철학에선 크게 3단계로 철학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사실 ‘만남’ 없이 논리적일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언어를 넘어선 어떤 신비의 방식이라 해도 자기 혼자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굳이 논리 정연하게 이해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고 그와 대화하려면 자기 생각을 그에게 잘 전달해야 하고 또 그의 생각을 잘 알아듣기 위해 그리고 둘이 만나 더 나은 답을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그 만남의 자리엔 ‘논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찌 보면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논리가 필요하다. 막연하게 알던 것을 논리적으로 따지면 더 선명하게 알게 되고 더 선명하게 모르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라도 논리는 필요하고, 인도철학에서도 논리는 절실하다. 물론 동아시아의 철학이나 다른 어느 지역의 철학에서도 논리는 절실하다.      


첫 단계를 보자. 첫 단계를 귀를 여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마음을 여는 거다. 나의 답만이 답이라는 아집 속에서 남의 답을 들으면 남의 정답을 듣는 게 아니라, 나와 다른 오답만을 듣게 되고 처음부터 왜곡하여 혹은 부정적으로 만나고 듣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지 말고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방의 ‘의견(purva paksa)’을 듣는 거다. 그의 논증을 처음부터 거짓으로 부정하며 빈정거리는 게 아니라, 온전히 듣는 거다.      

두 번째 단계는 이제 알아들었다면, 상대방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논박(khandana)’한다. 만나서 잘 알아들었다면, 이제 질문하는 시간이다. 그냥 질문이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 가운데 수긍하기 어렵거나 자신의 편에선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질문하며 논박하는 거다. 철학의 만남은 누가 누구를 계몽하는 만남이 아니다. 즉 누군가는 말하고 누군가는 듣기만 하는 그런 만남이 아니다. 들었으면 질문하고 질문해도 부족하면 비판할 수 있는 만남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이제 자신의 편에서 ‘결론(Siddhānta)’을 내리는 거다. 결론이 만들어지면 어느 하나의 질문에 대한 자기 생각이 확립되었다는 말이다. 그 확립된 답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면, 그 결론은 곧 한 학파의 시작이 될 거다.      


인도철학엔 ‘괴로움’에 대한 다양한 답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도 자세히 보면 그 가운데 수많은 답이 있다. 하나의 답이 독재자(獨裁者)가 되어 있지 않다. 수많은 답이 저마다 공존하고 있다. 답이 그렇게 풍성한 이유는 수많은 만남이 이제까지 있었고 그 만남마다 서로 다른 둘 이상의 답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만남에 단 하나의 승리자가 등장하고 그의 답으로 모든 다른 답들이 통일되지 않았다. 이후 순서가 되어 시간이 되면 살펴볼 ‘부파불교(部派佛敎)’만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주 많은 답이 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답은 그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다. 헬라스 철학과 동아시아 철학 역시 마찬가지지만, 철학의 앎이란 그저 앎으로 그치는 앎이 아니다. 삶이 되어야 한다.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 되어야 한다. 인도철학도 그렇다.      


서로 다른 철학이 더불어 만난 ‘철학의 만남’에서 얻게 되는 자기 결론, 즉 자기의 깨우침은 그저 하나의 이론을 위한 이론, 앎을 위한 앎을 가지게 됨이 아니다. 삶의 방식을 하나 얻게 됨이다. 삶을 위한 앎을 하나 얻게 됨이다. 인도철학의 그 수많은 답, 그 논리적 만남에서 이루어진 논리적 결론들은 모두 삶을 위한 앎이다.      


‘괴로움’에 관한 싯다르타의 깨우침은 그 깨우침에 근거한 삶의 방식으로 이어졌다. 그저 괴로움에 관한 앎 하나를 얻은 게 아니다. 쉽게 말해, 그저 지적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괴로움을 두고 그렇게 깊이 궁리한 게 아니다. 그 궁리의 시작은 삶의 괴로움에서 시작했다. 삶의 문제에서 시작되었으니 그 마지막도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삶을 위한 앎, 삶을 위한 궁리, 삶을 위한 깨우침이 되어야 한다. 논리는 이를 위한 수단이다.      


만일 철학이 뛰어난 논리로 단장한 듣기 좋은 고상한 이야기일 뿐이라면 철학은 지적 유희일뿐이다. 그런 철학은 참된 철학이 아니다. 참된 철학은 자기 삶의 변화를 위한 거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고 묻고 궁리하고 답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의 답을 가지고 자기와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설득하려는 이유는 그저 앎 하나를 전하려는 게 아니라, 삶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철학의 논리는 세련된 언어와 세련되고 화려한 언술을 위한 게 아니라, 내 삶을 바꿀 지혜를 얻고 스스로 설득하기 위한 가장 절실한 도구이다. 


유지승 씀

2023년 7월 7일



구미 도리사에서 2022년 사진 안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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