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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ul 13. 2023

고민거리 네 가지,‘법’,‘재물’,‘쾌락’,‘해탈’

유작가의 인도 철학 이야기 4

고민거리 네 가지, ‘’, ‘재물’, ‘쾌락’ 그리고 해탈       

        

삶을 고민할 때 고민하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삶의 부분이며 우리 행위의 ‘목적(Puruṣārtha)’이다. 바로 ‘법(Dharma)’, ‘재물(Artha)’, ‘쾌락(kāma)’, ‘해탈(mokṣa)’이다. ‘법’도 ‘재물’도 ‘쾌락’과 ‘해탈’도 모두 우리 삶의 목적이 된다.      


법, 즉 다르마(Dharma)는 ‘지탱하다’ 혹은 ‘유지하다’라는 뜻의 dhr에서 나온 말이다. 이를 참고해 생각해 보면, 다르마는 하나의 공동체 그리고 우주 전체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의무’ 혹은 ‘법’을 의미한다. 공동체가 공동체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의무(義務)와 같은 법이 지탱하기 때문이다. 우주 전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떤 원리(原理)가 되는 법이 우주 전체를 지탱하고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 본다면, 다르마, 즉 법으로 사람과 우주는 조화 속에 조화를 유지하고 있는 거다. 이러한 법, 즉 다르마가 각 개인에게 적용될 때 업(業), 즉 카르마(Karma)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법 혹은 의무인 다르마는 카르마라는 행위와 무관할 수 없다. 다르마, 즉 법을 잘 따르면 선업(善業)이 쌓이고 윤회(輪回)를 통해 더 존귀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법을 거슬러 악업(惡業)이 쌓이면, 미천한 존재가 된다. 헬라스 철학에 의하면 우주와 사람의 공동체는 로고스(logos)에 따라 질서와 조화 속에 존재한다. 그 로고스에 합일하며 살아간다면, 사람은 가장 잘 살아가는 것이며, 로고스에 합일하지 못한다면,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사고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심지어 유사한 것이 「요한복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같지 않지만, 우주를 조화 속에 유지하고 지탱하게 하는 신성한 무엇이 있고 그것과 합일되거나 잘 따르는 게 잘 살아가는 것이란 사상은 다르마에 관한 사상과 유사한 면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이런 다르마는 불교에 와서도 조금 다르게 활용된다.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라는 불교의 삼보(三寶), 즉 세 가지 보배 가운데 ‘법보’가 ‘다르마’다. 또 모든 존재자를 의미하는 ‘일체법(一切法)’ 역시 다르마다.     


‘재물’, 즉 아르타(artha)는 생활 유지에 필요한 모든 걸을 의미 한다. 그렇다고 정신적 삶을 위한 것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적 삶을 위해 필요한 물질적 안정을 의미한다.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다. 정말 너무나 가난하여 생존 자체가 힘들다면, 정신의 삶을 돌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재물 자체를 악으로 볼 필요는 없다.      


‘재물’은 정신의 삶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수단이다. 즉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니지만, 수단으로 충분히 가치를 가진다는 말이다. 재물은 쾌락, 즉 카마(kāma)를 위한 수단이다. 즉 재물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쾌락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거나 가지기 위한 수단이란 말이다. 쾌락, 즉 현실적 욕심이 너무 과대하면, 모든 게 그것의 지배를 받는다. 기쁨 없이 기계적으로 재물에만 집중한다면, 그 역시 문제다. 그러니 재물과 쾌락 사이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법, 즉 다르마와의 사이에서도 조화가 이루어진다면 더 좋을 것이다.      


마지막은 해탈, 즉 목사(mokṣa)다. 이 말은 해방된다는 말이고, 자유로워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고 해방인가?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어쩌면 자기 본성, 즉 참된 자기에 대한 무지(Avidyā)로부터의 자유이고 해방이다. 우파니샤드는 사람의 참된 자기 본성을 두고 아(我), 즉 ‘아트만(Ātma)’이라 하며, 바로 그 아트만은 결국 범(梵), 즉 ‘브라흐만(Brahman)’이다. 즉 참된 자기 자신, 즉 개인으로 자기 자신의 본성은 우주의 보편적 본성인 브라흐만이 그 가장 참된 모습이며 자리다. 그러니 개별적 자아는 우주의 보편적이고 신성한 원리와 합일함으로 해탈에 이르게 된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던 그 무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그 앎에 따라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범아일여(梵我一如)라 한다.


유지승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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