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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ul 24. 2023

해탈이 필요할 때

유작가의 인도 철학 이야기 5

해탈이 필요할 때               


그리스도교의 교부 가운데 몇몇은 자기 성기(性器)를 스스로 도려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잔혹한 금욕이다. 어쩌면 광기(狂氣)로 보일 정도의 금욕이다. 그리스도교만 이런 건 아니다. 몇몇 다른 종교의 과도한 금욕주의에서도 이처럼 극단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자기 성기를 도려내진 않을 거다.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자기 성기를 도려냈겠지만, 적어도 중요한 공통점 하나는 바로 이것일 거다. 몸, 즉 육체를 향한 강한 거부감과 부정의 마음이다. 육체 없는 영혼,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참모습이며, 육체는 그런 자신의 참모습에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참모습을 더욱 쉽게 망각하게 하는 방해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망각에서 수많은 악행이 이어지니, 결국 육체는 악의 근원이며 악의 뿌리다. 그리고 그런 육체의 대명사와 같은 게 성기다. 그러니 성기를 도려내는 거다. 그리고 그런 종교는 종국엔 육체 없는 상태인 죽음 이후를 찬양한다. 그리고 살아서 육체의 기쁨을 억제하고 산 대가로 천국으로 가 그곳에서 육체 아닌 영적 기쁨으로 살아간다고 믿는다. 그러니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죽음 이후를 그리워하고 육체를 멀리하려 한다.     


그렇다면 인도철학도 그와 같을까? 인도철학은 해탈(解脫)은 죽음 이후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육체를 혐오하는 많은 철학과 종교는 죽음 이후를 동경한다.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육체에서 벗어나니 말이다. 그러나 인도철학은 그 ‘자유’, 즉 해탈을 살아서 이루고자 한다.      


우파니샤드에 의하면, 나의 참모습, 즉 ‘아트만(Ātma)’은 변덕스럽고 영원하지 않은 그런 게 아니다. 태어나 이런저런 변덕에 힘들어하며 죽어가는 그런 ‘나’는 진짜 ‘나’가 아니다. 진짜 ‘나’는 우주의 보편적 본성이며 신성인 ‘브라흐만(Brahman)’과 다르지 않다. 즉 ‘아트만’은 곧 ‘브라흐만’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걸 망각하고 변덕스러운 기쁨에 빠져 변덕스러운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다. 그러니 망각에서 벗어나 제대로 깨우쳐야 한다. 그러면 그 깨우쳐야 하는 시기는 언제인가? 죽어서인가? 아니다. 육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지금이다. 그리고 그 깨우침은 그저 생각 속 ‘깨우침’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브라흐만’이란 사실을 깨우치는 바로 그 순간 우리가 괴로워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해탈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해탈이 가치 있는 때다. 이미 육체 없이 있는 때에 깨우침이 무슨 소용인가? 해탈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해탈이 필요한 시기, 참된 자유가 필요한 시기는 육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바로 지금이다.      


해탈 이후 굳이 육체를 저주하거나 성기를 도려낼 필요는 없다. 무지(無知)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우친 이에게 이런 건 방해가 되지 않는다. 괴로움은 무지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일어난다. 자신을 모르기에 이런저런 당황을 하게 되고, 자기 아닌 것으로 자기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 자기를 깨우치면 그럴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이 우주의 보편적 원리이며 신성한 ‘브라흐만’이란 것을 깨우친다면, 그와 다르지 않은 하나란 걸 깨우친다면, 죽음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병으로 힘들어하는 것도 근본적 괴로움이 아니다. 이별로 헤어짐으로 아파하는 것도 근본적 괴로움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순간을 살아가는 찰나의 나를 진짜 나로 판단한 무지에서 나온 거다. 그러나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라면, 이 모든 것이 괴로움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제 육체와 더불어 살아도 문제 될 게 없다. 제대로 자기를 깨우쳤으니 말이다.      


나의 참모습을 깨우침으로 모든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해탈이 간절하고 해탈이 뜻을 품을 시기도 바로 지금이다. 인도철학은 그렇게 죽음 이후를 동경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해탈을 위해 애쓴다. 지금 여기 나의 삶에서의 해탈에 애쓴다.


유지승 씀


해인사에서 사진 유대칠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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