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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09. 2024

욕망에 사로잡혀 살 수 없어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칠의 불교 공부 

1. 불가 철학의 탄생     


“대왕이여, 저 설산의 기슭, 

오래전부터 코사라국에 속한 땅에 

재물과 용맹을 모두 가진 단정한 부족이 산다고 합니다. 

그들을 일러 ‘태양의 후예’라고 부릅니다. 내 생족(生族)의 이름은 ‘샤캬’입니다. 

대왕이여저는 그것을 떠나와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온갖 욕망에 머물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經集」 3:1 出家經)     


싯다르타 가우타마(Siddhārtha Gautama)는 샤캬족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를 사캬족의 성자라는 뜻으로 ‘샤캬무니(Śākyamuni)’라고 부르기도 하고, 한자어로 ‘석가모니(釋迦牟尼)’라 부르기도 한다. 그냥 편히 줄여서 ‘샤캬’ 혹은 ‘석가(釋迦)’라고 부르기도 하고 말이다.      


‘싯다르타’가 출가(出家)한 이유는 간단하다. 욕망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다. 우리의 세상은 욕망으로 움직인다. 꿈을 가지고 살라는 말도 결국 욕망을 가지고 살란 말이다. 공부를 하는 이유도 욕망 때문이다. 남보다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한다. 남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조금 더 편히 벌기 위해 공부한다. 결국 남보다 더 좋은 대학을 가야 하고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니 공부란 것도 결국은 남과의 싸움이다. 어려서부터 싸움터에서 산다. 그리고 그 싸움터에서 자기 등수(等數)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마치 그 등수가 자신의 행복 정도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해진다. 남을 이기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이들은 더 많아진다. 욕망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이 더 가득 하단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행복은 멀기만 하다. 항상 남을 이기며 살아야 하는 이들이니, 항상 남과 싸움 중인 이들이니, 그들이 행복한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싯다르타는 바로 그 욕망의 세상에서 벗어나 정말 제대로 있기 위해 수행자의 삶을 택했다. 그렇게 욕심으로 서로 다투고 또 서로 미워하며 한 없이 괴로운 그 서글픈 처지에서 벗어나려 출가했단 말이다.       


싯다르타가 깨우친 네 가지 진실이 있다. 이를 흔히 ‘사성제(四聖諦)’라고 한다. 이 네 가지는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다. 이를 줄여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도 한다.      


‘고제’란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괴로움이다. 태어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괴로움이다(生苦). 태어났다고 끝이 아니다. 늙어간다. 어느 순간부터는 점점 기력이 약해진다. 그냥 늙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병든다(老苦). 심지어 아직 한창의 나이에 힘겨운 병에 걸려 괴로운 이들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 참 괴로움이다(病苦).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무리 많은 돈으로 우리를 치장하고 이런저런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 해도 결국 우린 죽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삶은 참으로 허망하다(死苦). 괴로움이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생명 가진 존재로 겪게 되는 네 가지 괴로움으로 괴로움이 끝난 게 아니다. 아직 더 있다.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겪게 되는 괴로움이 있다. 사랑하는 이와 만나 사랑하지만 그 사랑도 영원하지 않고 어느 순간에 이별하게 된다(愛別離苦(애별이고)). 참 괴로운 일이다. 거기에 함께 하는 것도 괴로운 이들과 함께 해야 할 때도 있다. 참 미운 데 어쩔 수 없이 만나고 함께 해야 할 때가 있다면 참이다(怨憎會苦(원증회고)). 참 괴로운 일이다. 그렇게라도 원하는 것을 얻으면 다행이지만, 얻지 못할 때가 많다(求不得苦(구부득고)).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그런데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과 이별의 괴로움, 미운 이와 함께 해야 하는 괴로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괴로움, 이 모든 일곱 가리 괴로움은 결국 ‘나’ 혹은 ‘내 것’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우리 삶 자체가 괴로움이다(五取蘊苦(오취온고)).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 괴롭다. 이 역시 결국 원하는 걸 얻지 못해 당하는 괴로움이다. 이별로 아파하는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결국 모든 만남은 이별을 전제한다. 그것을 깨우치지 못하고 얻게 되는 괴로움이다. 싯다르타는 고제, 즉 8가지 괴로움을 마주하고 그 괴로움을 원인을 궁리한다. 그것이 ‘집제’다.      


‘집제’란 한마디로 괴로움의 원인이다. 괴로우면 그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싯다르타는 다른 누군가에게 자기 괴로움을 해결해 달라 부탁하지 않는다. 초자연의 어떤 존재에게 해결을 청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괴로움의 이유를 따져 깨우치고 자기 스스로 그 이유를 도려내자고 한다. 집제는 이를 위해 꼭 궁리해야 하는 거다. 결국 우리가 괴로운 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인 욕애(慾愛), 영원히 살고자 원하는 유애(有愛), 또 이와 반대로 이제 그만 삶을 끝내고 싶은 욕망인 무유애(無有愛) 등 세 가지가 있다. 영원히 지금처럼 살고 싶으니, 늙고 병들어가는 자신이 괴로울 거다. 원하는 걸 모두 가지고 싶으니 이별이 괴롭고 욕심나는 걸 가지지 못한 게 괴로울 거다. 그러면 이런 욕망을 도려내면, 그 욕망으로 일어나는 괴로움도 치유됨이 당연하다. 여기에서 ‘멸제’가 등장한다.      


‘멸제’는 욕망을 도려내고 그로 인해 괴로움에서 벗어난 해탈(解脫)의 경지,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도제’는 바로 이런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행법인 올바른 견해(正見(정견)), 올바른 생각(正思(정사)), 올바른 말(正語(정어)), 올바른 행위(正業(정업)), 올바른 생활(正命(정명)), 올바른 노력(正精進(정정진)), 올바른 주의력(正念(정념)), 올바르게 마음을 안정케 함(正定(정정)) 등 8가지 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사성제, 즉 고집멸도는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 녹야원에서 다섯 제자에게 처음으로 설한 가르침, 즉 초전법륜(初轉法輪)이다. 싯다르타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된 건 욕망의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결국 그의 깨우침은 바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정이다. 그걸 얻기 위해 수행자의 삶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괴로움을 바로 알고, 그 괴로움의 이유를 깨우치고, 그 괴로움의 이유를 도려낸 경지에 이르고,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 즉 사성제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다.       


‘범아일여(梵我一如)’는 불교 이전 우파니샤드 사상의 핵심이다. 철학의 핵심적 물음 가운데 하하는 “너는 누구인가?”이다. ‘범아일여’는 그 물음에 관한 답이다. 우주적 자아인 ‘범(梵)’, 즉 ‘브라흐만(Brahman)’과 개체적 자아인 ‘아(我)’, 즉 ‘아뜨만(Ātman)’이 같다는 거다. 이걸 깨우쳐야 한다. 나는 나로 독립되어 존재하는 게 아니다. 애당초 나는 없다. 나, 즉 아뜨만에 관한 집착을 버리고 ‘브라흐만’과 하나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게 바로 범아일여가 전하는 말이다.      


그런데 불가는 이러한 ‘브라흐만’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집(我執)’을 벗어나 ‘브라흐만’과 같은 신적이고 우주적인 개체와 하나 되려 하지 않는다. 당시 성직자 계급에 있던 ‘브라만’은 자신이 ‘브라흐만’과 더 가까운 사람이라며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했다. 쉽게 말해 다른 이들보다 더 신성한 존재에 더 가까우니 자신과 달리 신성한 존재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보다 더 귀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위계를 만든다. 그 위계는 다시 욕망을 자극한다. 더 신성한 존재에 가까워지려는 욕망을 자극하고, 더 신성한 존재로 살아가는 이는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자극한다. 불가는 이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 모든 욕망에서 벗어날 때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바로 출가다. 신과 신적 권위를 따라 살기 위해 수행자가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구조에서 벗어남이다. 불가의 철학은 바로 그러한 벗어남에서 시작된다. 출가로 시작되는 불교의 삶, 범아일여가 아니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길을 따라 삶이다. 일체 모든 게 어떤 실체성도 없다는 것을 깨우치고 온 삶을 이를 실천하는 거다.


유대칠 씀


[대구에서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서 독서와 철학 그리고 신학 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삶에 녹아드는 독서와 철학 그리고 신학을 더불어 누리고자 한다면, 그렇게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자 한다면, 연락 주셔요. oio-44o4-0262로 꼭 문자를 먼저 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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