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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11. 2024

드디어 가려진 것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았다.

유대칠의 불교 공부

연기를 깨우침     


“시간이 흘러 점점 더 깊은 생각에 빠진 성자에게 있는 모든 것이 그대로 드러난 그날, 그 모든 가려진 것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연기(緣起)’의 도리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自說經)』 1:1 菩提品)     


‘연기(緣起)’는 불가 철학의 핵심이다. 어쩌면, 연기를 깨우치는 순간, 출가(出家)는 완성된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 깨우침이 삶이 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삶이 되지 못한 앎, 그 앎이 무슨 가치겠는가. 그러나 제대로 깨우쳤다면, 삶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기에 삶이 되지 못한 거다. 사실 철학이나 신학이란 모든 그런 거다. 삶이 됨을 완성된다.      


오랜 시간 싯다르타는 궁리하고 궁리했다.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 진리가 아니다. 싯다르타의 그 지혜는 오랜 궁리의 결실이다. 그렇게 궁리하고 또 궁리하다 드디어 깨우쳤다. 모든 이들은 그저 ‘홀로 있지 않다.’ 홀로 있어 보이지만 사실 서로 통하고 있으며, 서로 더불어 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게 『잡아함경』의 한 구절이다.      


此有故彼有 (차유고피유)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此生故彼生 (차생고피생)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

此無故彼無 (차무고피무)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고

此滅故彼滅 (차멸고피멸)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도 사라진다.     


사랑이 있어서 미움이 있는 거다. 사랑이 없었다면 미움도 없다. 이렇게 모든 게 사실 다 연결되어 있다. 저기 저 작은 싹도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또 다른 어떤 식물이 죽어 기꺼이 흩어져 그름이 되고 흙이 되었기에 저 싹도 싹으로 있을 수 있는 거다. 우주 만물 그 어느 것도 그저 홀로 있을 수 없다. 감정이든 생물이든 무엇이든 서로의 덕으로 있다. 반드시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보조 원인인 ‘연(緣)’, 즉 조건의 결합으로 일어난다. 부모라는 그리고 가정이란 ‘인연’으로 한 사람이 있다. 고아 역시 다르지 않다. 부모와 보육원이란 ‘인연’으로 한 사람으로 있다. 부모가 없었다면, 있지 못했고, 가정과 고아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모습으로 있지 못했다.     


태어났기에 죽는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지 않는다. 죽기에 내 몸을 이루던 기운이 다시 다른 생명의 근거가 된다. 내가 죽어야 한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이어진다. 내 사라짐도 누군가에게 그 존재할 수 있는 존재 이유다.      


‘괴로움’도 그러하다. ‘괴롭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욕심내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이 되려는 것도 욕심이다.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욕심은 부자가 아닌 이를 실패자로 보게 만든다. 괴롭게 만든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기 바라는 것도 욕심이다. 그 괴로움으로 이별이 힘들다. 괴롭다. 모두가 욕심 탓이다. 아집(我執) 탓이다.      


불교가 말하는 구원(救援), 즉 열반(涅槃)은 그 아집에서 벗어남으로 가능하다. 그 벗어남, 즉 해탈(解脫)을 통해 열반에 이른다. 그런데 그 해탈은 누군가의 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초자연적인 힘으로 해탈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철저하게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사실 출가라는 것도 불가 철학을 공부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바로 그 깨우침을 위한 거다.      


불교는 나를 구할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불멸의 영혼도 없다. 초월적 존재를 대신하여 나를 이끌 누군가도 없고, 그의 말을 잘 따라 불멸의 영혼이 된다는 논리도 없다. 불멸의 영혼,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걸 구원, 즉 열반으로 보지도 않는다. 불교는 괴로움을 지우려는 종교다. 초월적 존재가 있다면, 그와 하나 되기 위한 욕심으로 괴로울 거다. 그 초월적 존재의 대리자로 이 땅에서 권세를 누리는 이의 말을 들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욕심도 쉽지 않을 거다. 불교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철학이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다.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것도 다르지 않다. 영원한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도 영원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깨우쳐야 한다. 우리가 괴로운 건 초자연적 존재, 초월적 존재의 말을 듣지 않아 받은 벌이 아니다. 그의 대리자에게 순명하지 않은 죄로 받는 벌이 아니다. 우리가 괴로운 건 무지 때문이다.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원인, 바로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욕심이다. 그 욕심을 도려내면 괴로움도 사라지고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게 된다. 무언가를 가지고 싶은 욕심은 그것을 가지지 못해 일어나는 괴로움의 이유다. 욕심을 버리면 괴로움은 사라진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 욕심도 마찬가지다. 항상 조바심 나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우리를 괴롭게 한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관한 욕심을 도려내면 그런 괴로움도 사라진다. 여기에서 도려내는 건 다른 누가 대신 해 줄 수도 없고 초자연의 어떤 존재가 대신해 줄 수도 없다. 오직 자신이 해야 한다. 즉 자신을 괴로움에서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는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불가는 공부하고 공부하는 깊은 철학이지만, 똑똑해지기 위해 공부하는 건 아니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다. ‘연기’를 제대로 깨우쳐 욕심과 아집에서 벗어나려 공부하는 거다. 연기를 깨우치면 어떤 식이든 자기 자리에서 출가하게 되어 있다. 출가승이 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삶에서 자기가 궁리한 방식으로 자기 욕심과 자기 아집에서 해탈하려는 삶을 궁리하게 되어 있다.      


내 존재가 있어 내 사라짐도 있다. 

내 기쁨이 생겨 내 슬픔도 생겼다.

내 존재가 없으면 내 사라짐도 없다.

내 기쁨이 사라졌다면, 내 슬픔도 사라졌다.      


내 존재가 당연하면 내 사라짐도 당연하다. 사라짐에 괴로워하지 말자. 내 기쁨이 당연하면 애 슬픔도 당연하다. 괴로워하지 말자. 존재하려는 욕심을 도려내면 사라짐으로 힘겨운 괴로움도 없다. 기쁨에 대한 집착을 도려내면 슬픔으로 힘겨운 괴로움도 없다. 싯다르타는 바로 이것을 깨우쳤기에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싯다르타가 되었다. 이것이 없었다면 싯다르타는 우리가 아는 싯다르타가 되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궁리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일상 속 우리의 공부와 수행이 따라야 하고 궁리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유대칠 씀


[대구에서 그리고 온라인 공간에서 독서와 철학 그리고 신학 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소소하지만 삶에 녹아드는 독서와 철학 그리고 신학을 더불어 누리고자 한다면, 그렇게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자 한다면, 연락 주셔요. oio-44o4-0262로 꼭 문자를 먼저 주셔야 합니다.]



직지사에서 (사진 안현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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