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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ul 16. 2023

가장 좋은 나는 더와 덜도 아닌 적당한 나다.

야고보의 편지, 더불어 읽기

나는 성서학자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니다. 그냥 일상 속 편하게 취미 삼아 야고보의 편지를 헬라스어에서 우리말로 옮기며 읽어봤다. 그렇게 종교적인 글은 아니다. 그래도 성경의 하나를 읽으니 전혀 종교적이지 않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종교적 영성을 기대하며 읽으려는 분은 실망스럽겠다. 그저 편히 유대칠의 일상 속 유대칠의 독서 흔적이라 보고 읽어주시면 되겠다. 


1장     

1. 야코보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의 평안을 바랍니다

(᾿Ιάκωβος, Θεοῦ καὶ Κυρίου ᾿Ιησοῦ Χριστοῦ δοῦλος, ταῖς δώδεκα φυλαῖς ταῖς ἐν τῇ διασπορᾷ, χαίρειν.)

(이아코보스 테우 타이 퀴리우 이에수 크리스투 둘로스 타이스 도데카 퓔라이스 타이스 엔 테 디아스포라 카이레인)

2. 내 형제여당신이 온갖 시험(πειρασμοῖς)’에 던져져 있을 때그조차 온전히 기쁨이라 여기셔야 합니다

(Πᾶσαν χαρὰν ἡγήσασθε, ἀδελφοί μου, ὅταν πειρασμοῖς περιπέσητε ποικίλοις,)

(파산 카란 헤게사스테 아델포이 무 호탄 페이라스모이스 페리페세테 포이킬로이스)     


‘좋음’이란 ‘중용(μεσότης)’ 속에서 좋음으로 남는다. 너무 과한 것도 그렇다고 너무 부족한 것도 온전한 좋음이 될 수 없다. 참된 좋은 항상 적당해야 한다. 과도한 슬픔과 과도한 기쁨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가 중용이다. 하지만 그 중용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 그 중용은 우리의 지혜로 항상 궁리해야 한다. 경우마다 처지마다 다르니 말이다. 그렇게 친하지 않은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갔다고 생각해 보자. 잘 모른다고 하여 장례식장에서 재미난 동영상을 보면서 웃고 있다면 좋은 사람인가? 아니다. 그렇다고 장례 절차에 방해될 정도로 쉼 없이 울고 몸부림을 친다면, 그것도 분명 좋은 건 아니다. 중용이어야 한다. 궁리한 중용 말이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났을 때, 과도한 자기 자랑은 거만함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이라 보진 않는단 말이다. 그렇다고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과도하게 자기 부정하는 것 역시 자학하는 듯하여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진 않는다. 그러니 거만하지 않으면서 자신감이 있어 보이고, 겸손한 중용의 모습을 궁리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때 우린 그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나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적당히 나만 생각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의 틀 속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니 말이다. 단지 문제는 중용을 벗어나 과할 때다. 내가 궁금하니 남의 사생활도 허락 없이 함부로 조사하고 소문낸다면, 그것은 나쁜 사람이다. 그렇다고 나만 생각하기에 다른 이들이 죽든 말든 관심 없다면 그것도 문제다. 그 역시 나쁜 사람이다. 중용이 필요하다. 중용이 무너진 과도한 관심은 폭력이고, 과도한 무관심 역시 악이다.      


야코보는 우리가 시험당할 때 그조차 기쁨으로 여기라고 한다. 신학적이고 성서학적인 배경 없이 그냥 이런 생각을 해봤다. ‘시험’이란 중용을 고민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아닐까? 어느 것이 중용인지 우리는 우리 삶 동안 시험을 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시험으로 우린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물론 우린 좋은 사람이 되려 한다. 그런데 좋은 사람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그 시험에 충실해야 한다. 중용이 무엇인지 쉼 없이 궁리하고 궁리해야 한다. 궁리만 해서도 안 된다. 궁리한 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때 우린 조금씩 좋은 사람이 된다. 가장 좋은 우리는 과도한 이기심과 과도한 이타심 사이의 중용일 거다. 나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의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포기하며 살아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 사이 어딘가가 어쩌면 우리의 가장 좋은 모습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이타적인 그 중간 어딘가 말이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하며 사막에 가서 하늘만 보며 수도 생활하는 나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철저하게 현실의 것만 추구하며 지금 여기 쾌락이 내 존재 전체라는 듯이 살고 싶지도 않다. 적당히 영적이며 적당히 쾌락도 즐기는 그런 나로 살고 싶다. 그게 나에겐 나의 가장 좋음이다. 최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답, 그것은 중용이다. 


유대칠 옮기고 씀     


아들과 함께 사진 안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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