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칠의 디오니시오 읽기
디오니시오의 신비신학 1장
[온전히 하느님을 고백하고 만난다는 건 무엇인가?]
1장 신성한 어둠이란 무엇인가?
초월의 삼위여! 모든 신 위에 신이시여! 모든 좋음 위의 좋음이여! 그리스도교 신학의 수호자시며 삼위에서! 우리에게 조금도 알려지지 않은 지극히 찬란하고 가장 높은 계시 그 높은 것으로 이끌어주시니, 그곳에선 신학의 그 단순하고 절대적이며 조금의 변화도 없는 지극한 신비가 빛나며 ‘침묵의 어둠’ 속에서 숨겨져 있습니다. 가장 깊은 어둠 가운데 가장 찬란한 것 위에 빛나시며, 온전히 불가능하고 보이지 않는 것 가운데 숨겨진 것을 드러내시어, 그것을 볼 눈 없는 가련한 우리 마음을 그 초월의 아름다움, 그 영광으로 넘쳐나게 채우십니다.
이것이 나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티모테오여! 당신은 신비한 환상 가운데 쉬지 않은 만남으로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이성으로 알려는 노력 그리고 감각과 지성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모든 본질과 앎 위에 있으신 분과 하나 되는 무의식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깨끗함 가운데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황홀경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 바로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신성한 어둠’의 모든 무엇으로 있는 것을 넘어서는 빛으로 높이 높이 날아오를 겁니다.
유대칠 풀이
디오니시오라고 불리지만, 사실 우린 이 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익명의 디오니시오(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 Ψευδο-Διονύσιος ὁ Ἀρεοπαγίτης)’라고 부를 뿐입니다. 오랜 시간 많은 이들은 그를 「사도행전」 17장 34절에 등장하는 사도 바오로에 의하여 개종한 아레오파고 판사인 디오니시오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글을 쓴 이는 그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에 관하여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가 우리에게 글로 남긴 지혜만 알 뿐입니다. 아마도 그는 5세기말부터 6세기 초까지 활동한 그리스의 기독교 신학자이자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일 겁니다. 그의 철학, 즉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이후 스콜라 신학에 매우 큰 영향을 줍니다. 에크하르트와 니콜라우스 쿠사누스 등을 비롯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의 글을 읽고 풀이하였습니다. 그만큼 비록 우리가 그를 알지 못하지만, 그의 지혜는 참으로 깊이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금 그는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처지에서 그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고백은 우린 조금도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린 하느님을 우리의 이 작디작은 생각 속에 개념이란 조각으로 조각조각 내어 다시 조립하곤 하느님을 안다고 합니다. 이게 하느님이라 합니다. 사실 그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속 개념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욕심이 녹아든 그런 존재일 뿐이다.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나에게만 좋은 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하느님이시기에 나에게만 좋은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좋음 위의 좋음”이십니다. 각자의 바람이 녹아든 이런저런 신들이 아니라, “모든 신 위에 신”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두고 무슨 말이라도 할 때 우린 어쩔 수 없이 내 욕심과 내 경험과 내 처지에서 만난 하느님, 이미 하느님 아닌 하느님을 말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고백은 무지의 고백이며, 가장 온전한 하느님과의 만남은 “침묵의 어둠 속에서 숨겨져” 우리 모두, 아니, 존재하는 모두를 품은 하느님을 ‘신성한 어둠’ 속에 만나는 겁니다.
하느님을 만나 누리는 기쁨의 황홀경은 소유의 기쁨이 아닙니다. 내 것을 남보다 더 누린다고 기뻐하는 기쁨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 누리는 그 “헤아릴 수 없는 황홀경”은 우리가 욕심내고 우리가 포기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 바로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당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할 때, 아무것도 아님을 누리는 기쁨입니다. 온전히 비워져 온전히 하느님과 더불어 있음을 누리를 수 있는 기쁨입니다. 결국은 그 기쁨이란 말도 할 수 없는 무언의 지경에 이를 때, “모든 무엇으로 있는 것을 넘어서는 빛으로 높이 높이 날아오를 겁니다.”
유대칠 옮기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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