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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대칠 자까 Jan 07. 2024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욕심'의 진정한 의미

유대칠의 에크하르트 읽기 

자기 욕심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    


에크하르트 씀

유대칠 옮김


사람들은 쉬이 말합니다. “주님! 저도 하느님과 더불어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더불어 많은 것을 헌신하며 평안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저들처럼 살고 저들처럼 청빈의 삶을 살 수 있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이런저런 곳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일을 하지 않으면, 저에겐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거나 조용한 암자 혹은 수도원에 들어가 살아야만 합니다.”     


진심으로 (당신이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지요.)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 때문입니다. 당신 아닌 다른 것 탓을 하지 마세요. 정말 그 이유를 모르나요. 혹은 저의 말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나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이유는 바로 당신 자신의 의지(=욕심)입니다. 당신이 왜 ‘평화 없는 혼란’으로 힘겨워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든 모르든 그 이유는 바로 당신 자신의 의미입니다. 그것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피해야 하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우리가 이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든지, 어떤 물건을 피해야 하고 또 찾아야 하는지, 어느 장소를 혹은 어떤 사람을 피하고 또 찾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수련 방법을 피해야 하고 또 찾아야 하는지, 어떤 모임이나 어떤 활동을 피하고 또 찾아야 하는지, 정말 어떤 것이든지, 정말로 당신을 방해하는 건 이런 게 아닙니다. 이런 것과 제대로 관계 맺지 못하고 방해받으며 살아가는 바로 당신 자신이 (당신을 평화 없는 혼란을 겪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당신을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당신 자신을 떠나세요. 진정 당신이 당신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디로 떠나 어디에서 가서 (어떤 수도의 삶을 살든) 당신을 힘들게 하는 방해꾼과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 걸 피하지 못할 겁니다. 어디에서 어떤 수행을 하든 누구와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물어나 저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청빈이나 자기 겸손 등 눈에 보이는 이런저런 것으로 평화를 구하는 이가 있다면, 그가 구하는 이러한 것이 아무리 대단하고 또 대단한 성질의 것이라 해도, 결국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이 당신에게 평화의 샘이 되어줄 순 없습니다. 이런 것으로 평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정말 잘못된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오히려 더 잘못된 길을 따라가는 것이기에 평화로부터 더 멀어져 더 찾기 힘들어질 겁니다. 마치 길을 잃은 이들이 더 멀리 갈수록 오히려 더 길을 잃어버린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찌해야 합니까? 우선, 당신 자신을 버리세요. 그러면 모든 걸 버리게 됩니다. 만일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부여잡고 고집한다면, 그가 자기 왕국과 온 세상을 버렸다고 해도, 사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겁니다. 또 어떤 이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버렸다면, 그가 무엇을 가지고 있듯이 그것이 설령 왕국이든 영광이든, 그는 모든 걸 포기한 겁니다.      


베드로는 작은 배와 그물만을 남기고 (모든 걸 포기하고 아무것도 자기를 위해) 남기지 않았을 때, “주여! 보소서. 우리가 모든 걸 버렸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뿐 아니라, 우리가 버려야 하는 건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거나 심지어 욕심내는 모든 겁니다. 자기 욕심과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며, 원하지 않은 모든 걸 하느님에게 맡기고 포기한 삶을 살아가는 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이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겁니다.(마태오 5:3) 누구도 이런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마세요. 이보다 더 좋은 길이 있다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러면, 우선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할 겁니다”(마태오 16:24). 이건 정말 중요한 겁니다. 자기을 돌아보고, 어느 곳에서든 항상 자기 자신을 버리고 떠나세요.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유대칠 풀이     


왕국을 가진 이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그 가운데 하느님의 뜻이 더불어 있을 때, 그는 왕국의 지배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왕국 가운데 살아가는 이를 위하여 헌신하는 이가 될 겁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며 하느님의 뜻이 되어 살아가는 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지 못합니다. 조금 더 왕국을 자기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홀로 모든 걸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니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만 홀로 드러나야 하니 모두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야 합니다. 거짓을 통해서 이길 수 있다면, 스스로 거짓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거짓이 되어 그 거짓을 참된 것이라 스스로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에게 참된 것이란 더불어 모두에게 올바른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홀로 좋은 것일 뿐입니다. 이런 욕심으로 살아가는 이는 그가 종교의 권력자가 되어도 국가의 권력자가 되어도 아무리 거룩해 버리고 강해 보여도 사실 지친 영혼이며, 독을 머금고 살아가는 이입니다.      


어느 수도회에 입회하여 살아도 그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그냥 수도복을 입은 채 그 영혼은 독을 머금은 사람일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청빈의 삶을 산다 해도 그 속에 여전히 나만이 홀로 거룩하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면, 그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사람만을 고르고 골라 자신의 옆에 두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욕심으로 가득한 데 도대체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디에 가서 산다고, 무엇을 가지고 산다고, 누구를 만나고 산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홀로, 자기 홀로 누리고 이루고 더 거룩하고 성스럽다는 그 아집을, 그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조금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그렇게 아집 없는 자, 욕심 없는 자, 그가 참으로 행복한 겁니다. 참 평화를 누리는 겁니다. 자기 욕심이 비어진 그 자리에 자신의 외로움을 품어줄 하느님과 참된 그의 벗이 더불어 함께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기억합시다. 욕심을 비우고 살아가는 이, 마음이 가난한 이, 그의 그 비어 있음에 하느님께서도 더불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참 평화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억합시다.


유대칠 옮기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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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강가에서 사진 유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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